조이 북카페(Joy Book Cafe)에서 주최하는 <즐거운 독서(Joyful Reading)> 2014년 4월 19일 모임을 위한 책소개와 토론 질문.



‘숨은 신’ 그리고 ‘벧엘’의 사다리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한겨레, 2013.




이 소설을 쓰기 전인 2012년은 많이 힘든 해였다. 나는 ‘하느님 대체 왜?’라는 오래된 물음과 격렬하게 씨름하기 시작했다. 몸은 피곤했고 마음은 황폐해졌다. …… 새해를 맞으면서 …… 이 거칠고 품위 없는 세태가 나를 휩쓸어가기 전에 더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하나씩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말로 본질로 돌아갈 시간이다. 
- 공지영, <작가의 말>에서, 374쪽.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를 소개하기 위해서 먼저 책 맨 뒤에 붙은 <작가의 말>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인용한 구절처럼 이 소설은 “하느님 대체 왜?”라는 작가의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 신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며 씨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숨어 계시고, 침묵하시며, 말씀하시더라도 매우 제한적으로만 그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서로 상관없는 것 같던 그 질문들이 모두 “합창 소리”(352)와 같이 한 곳에서 조우하면서, 주인공은 침묵 가운데 빽빽하게 들어찬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경험하게 됩니다(360). 그럼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돌아가고자 한 “본질” 또는 “근본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1. 숨은 신과 비극적 세상
     이 소설 속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가슴 아픈 사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신서원을 앞두고 있던 주인공 정요한 수사는 친동기와 같은 벗 미카엘과 안젤로를 불의의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자로서의 자신의 부르심을 져버리고서까지 영원히 사랑하고자 했던 여인 소희로부터 까닭을 알 수 없는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요한의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에 흥남부두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으며, 요한이 수도원에 입회할 때에 모델로 삼았던 토마스 수사 역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풀어 놓는 이야기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비극의 한 장면, 또는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한 부분과 같이 매우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배경에는 ‘숨은 신’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n)은 파스칼(Pascal)을 인용하여 “숨은 신(The hidden God, Deus absconditu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숨은 신은 더 이상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신이 인간에게 나타나면 그 순간 인간의 비극은 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은 비극을 넘어서게 합니다. 그러나 숨은 신은 인간의 비극을 지켜보기만 할 뿐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여 말이나 행동으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 신은 부재하는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숨은 신은 동시에 부재하면서도 현존하는 신입니다.[각주:1]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에도 이런 ‘숨은 신’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이 더욱 더 뼈저립니다. 토마스 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물어도 [하나님은] 늘 그렇듯 대답이 없으세요. 80년이 넘도록 물어도 대답 없는 양반이니 말이지요(108).” 심지어 젊은 시절의 토마스는 절망적인 박해로 인해 “신은 우리를 버렸어.”(229)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대답이 없는 것은 요한에게도, 요한의 할머니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소설에서 요한은 세 번 정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처음은 그가 소희에 대한 사랑과 수도자로서의 소명 사이에서 갈등하며 기도할 때에 들려온 음성으로 요한에게 비극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127-128). 그러나 얼마 후 미카엘과 안젤로의 비극적인 죽음이 일어났을 때에 신은 요한에게서 ‘숨어 버립니다.’ 그의 내면에서 “왜? 왜! 대체 왜!”(163)라는 비명이 솟구쳐 올랐을 때에, 요한은 어떠한 하나님의 음성도 그분의 현존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 “신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멱살을 잡았을 것 같았다.”(163)라고 당시의 솔직한 심정을 술회합니다. 소설의 후반부에 나오는 나머지 두 번의 하나님의 개입(288-290, 312)은 골드만의 책에 나오는 것처럼 요한에게 비극의 탈출구가 됩니다. 그래서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비극 가운데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은 ‘숨은 신’입니다. 책 속에 인용된 아빌라의 테레사의 말처럼 “당신이 하시는 걸 보면 당신에게 친구가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닌(107) 그런 ‘무정한’ 존재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하여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현존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입니다.
     

2. 신의 현존과 섭리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마지막 부분, 곧 뉴튼 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가 자신의 과거를 술회하는 부분에서 작가에게 약간의 실망을 느꼈습니다. 요한의 할머니, 요한, 그리고 마리너스 수사의 인연을 눈치 채면서, 이것은 공지영 작가답지 않은, 너무나 영화 같은 설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마리너스 수사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만남이 소설가가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영화 같은 일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과 섭리 속에서 퍼즐처럼 맞춰진 것이지요. 아니 소설에서 서술된 것보다 실제는 “훨씬 더 극적인 일들이 그 안에 잉태되어 있다.”고 합니다(375). 작가는 화자 요한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생을 뒤바꿔버린 사건이나 시간들을 통틀어 떠올려보면 그 때는 보지 못했던 징후들이 마치 영화의 티저 영상처럼 삶의 거리 여기저기에 깔려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살갗에 닿는 바람결로 봄을 느끼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서 조그만 들꽃의 싹이 피어나고 뜻밖에도 양지쪽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난 걸 보게 되듯이. 몸이 봄을 느끼기 전에 봄의 징후들이 도착하듯이.
  그 징후들이 가지고 온 사명의 기호가 해독되는 것은 이미 사건이 종료되고 나서이거나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라는 것이 삶의 비극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에 다시 돌아보면 삶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스포트라이트는 늘 우리가 그렇다고 믿었던 그곳 말고 엉뚱한 곳을 비추고 있었다.(44)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저의 ‘스포트라이트’는 요한과 소희의 사랑 이야기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요한의 심리 묘사는 매우 뛰어났고, 두 사람의 애달픈 사랑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말>을 읽은 후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에는 처음에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곧, 주인공의 환경을 구성하는 인물, 사물, 사건, 대화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요한의 할머니, 토마스 수사, 뉴튼 수도원 등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퍼즐처럼 맞춰질 조각들이 이미 글의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있었는데, 저는 중심인물과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것이지요. 비록 비극이라는 무대 위에서는 분명히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비극이지만, 과정과 결과 속에 나타난 신의 섭리는 분명히 그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심을 증명합니다. 마치 요한이 뉴튼 숲속의 나무 사이에 하나님의 현존이 꽉 차는 것을 보게 된 것처럼(359-360),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 사람에게는, 사람과 사건 사이의 ‘빈 공간’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성서 룻기의 이야기에서처럼 하나님은 무대 밖에 계시나 분명히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현존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아마 여러분도 이와 같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해나 해석이 안 되는 과거와 현재의 고통들도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고통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들에게 당신의 섭리를 명쾌하게 알려 주지 않으실까요?


3. 고통과 무의미
     고통의 의미를 ‘머리로 아는 것’과 고통의 의미를 ‘살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소설의 화자 정요한 신부는 고통 가운데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미혼모 모니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아픈 주사를 맞히는 것이 사랑이듯 우리가 때로 그분에게 매질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206).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이 사실을 별로 믿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지식’으로부터 별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이후 정요한 신부는 하나님의 섭리와 고통의 의미를 헤아려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고통이 우리에게 부여한 그 의미를 안다 해도, 시련을 통과하는 동안은 그것을 조망할 수 없고 그래서 결코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는 데 함정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의미를 속삭이고, 우리는 한낱 먼지 속으로 소멸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생명에의 충동만큼 강하게 느끼곤 하지 않는가.(163)

어쩌면 이것이 소설 속에서 하나님이 숨으신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등장인물들의 절규가 들어간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침묵으로 대답하시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의미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을 살아낼 때에야 그 의미를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수도자는 이렇게 고통을 직면하고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요한이 인용한 토마스 머튼의 정의처럼 고통 가운데서도 “결사적 각오로 죽음을 들여다보고 인간 무(無)의 심연을 헤아리고 인간의 불확실성을 탐색하며 인간 해방을 부르짖[는]”(10) 사람이 바로 수도자입니다. 요한과 미카엘과 안젤로가 수련 수사 시절 이메일 서명에다 붙여 놓은 것처럼, “슬픔의 잔을 고즈넉이 마시는 일이 성실한 크리스천들의 운명”입니다(110). 그래서 이 소설은 베네딕트 수도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넓게는 비극적인 세상 속에서 고통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고통을 살아내야 합니다.

     고통을 살아내는 것은 바로 무의미에 대한 저항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말처럼 고통과 시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의미를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안젤로와 미카엘을 상실한 요한은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177)고 말합니다. 인간은 시련 속에서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를 상실하기가 쉽습니다. 이 무의미에 가장 처절하게 저항한 인물이 토마스 수사의 동료 요한 루드비히 신부입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극심한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도,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 하나님께 봉헌함으로써 기쁨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수사는 요한 루드비히 신부의 말(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이제 나는 저들이 나에게 강제로 시키는 모든 고통은 기꺼이 내 것으로 받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이 되었네. 이로써 무의미는 의미로 변하고 악의는 사랑의 열매로 변할 수 있다네. (235)

     그렇다면 이 ‘무의미’를 강요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무의미를 제공하시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지영 작가는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파괴하려는 것이 바로 ‘악’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토마스 수사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악은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의미입니다.”(239) 또한 작가는 이 소설의 출판 직후 열린 한 독서 콘서트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공간과 시간이 달라도 이들 수용소[평양인민교화소, 옥사덕수용소, 아우슈비츠, 삼청교육대]의 공통적 특징은 인간다움을 말살시키고, 인간의 모든 존엄성을 파괴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을 바로 ‘악’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고, 이를 끊임없이 각인시킵니다.”[각주:2]

그러므로 악이 가득한 지옥은 다름 아니라 무의미가 한 여름의 모기떼처럼 달려드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미카엘의 옛 약혼녀의 입을 빌리면, 옥사덕과 같이 자유를 제한 당한 곳이 아니라,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305)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이 아니라, 고통을 피해 도망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악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고통을 살아냄으로써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슬픔의 잔을 고즈넉이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고통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요한 루드비히 신부는 악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의심하여 사람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엄하게 여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231). 곧, 무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킬 때 발생하고,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을 때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의미’ 그 자체입니다.


4. 종소리 그리고 사랑
     《높고 푸른 사다리》를 성장소설로 분류한다면, 주인공 요한은 무엇보다 사랑에 있어서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 요한은 우연히 한 쌍의 남녀가 로마 공원의 벤치에서 입맞춤을 하는 사진을 보게 됩니다. 그 사진을 보고 그는 “이러한 삶을 동경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다 영원한 것에, 보다 더 항구한 것에 나를 바치고 싶다고” 결심을 하고는 벅찬 감동을 느낍니다(48). 이때 요한은 ‘남녀 간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신에 대한 사랑’은 보다 영원하고 항구적인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희가 ‘자신의 갈비뼈를 열고 가슴 속으로 들어온’ 이후에 그는 여인에 대한 사랑과 종소리로 상징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십자가상 앞에서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녀를 사랑한다고 아주 정직하고 진실하게 기도하지요(122-124). 이처럼 소설의 1부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사랑’이 분명히 구별되고 서로 상반되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도하는 요한에게 “내가 그녀를 네게 보냈다. 사랑하여라, 요한.”(128)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전에는 그의 이성이 소희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이와 같은 음성을 들은 후에는 요한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좀 더 성숙하게 되지요. 구체적으로 요한은 소희와 떠난 짧은 여행에서 그녀에게 “사랑해, 영원히.”라고 고백하게 됩니다(192). 즉, 그는 이제 남녀 간의 사랑도 영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약혼자에 대한 질투로 “영원은 고사하고 한순간도 그녀를 편안히 해주고 있지”(197) 못할 정도로 그의 사랑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강렬하지만 불완전한 사랑 속에서 요한은 소희로부터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게 됩니다. 이미 수도원을 떠나 소희와 함께 살기로 결심하였던 요한은 이해할 수 없는 소희의 변화에 깊은 괴로움 속으로 빠졌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의 두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사랑하라 요한, 더욱 사랑하라.” “사랑이란 …… 요한, …… 사랑이란 모든 보답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289-290) 이 음성들은 그에게 소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내가 소희에게 가졌고 주었던 그 모든 것은 사랑이 아니었던가”(290). 나아가 요한은 토마스 수사와의 대화, 미카엘의 옛 약혼녀와의 만남, 그리고 미혼모 모니카로부터의 편지 등을 통해서 사랑에 대해서 숙고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제 요한의 사랑은 더욱 넓고 높게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소설의 3부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뉴튼 수도원의 숲속에서 다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그 목소리 속에 요한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공존합니다.

나는 최대한 귀를 기울여 그 목소리를 가늠했다. 그것은 소희의 목소리 같았고, 그것은 미카엘의 목소리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안젤로의 것 같기도 했으며, 할머니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것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 부름을 듣고 서 있었다. (359)

이전에 소희를 향한 요한의 사랑이 하나님과 미카엘, 안젤로를 향한 사랑과 분리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사랑이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부름 속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지요. 앞서 언급한 뉴튼의 숲속에서 하나님의 꽉 찬 현존을 발견하는 경험은, 요한이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이와 같은 부름을 들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요한은 다시 소희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전보다 완전한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집착도 떠나보냅니다(360). 10년 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내 것이 아니었던 허망했던 사랑 말고 나는 더 넓고 따스한 사랑을 찾아낸 것이었다”(362). 그것은 소희도 비슷합니다. 10년 후 어느 날 밤, 죽음을 앞둔 소희는 요한에게 이메일을 보냅니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두 사람의 사랑이 별처럼 지금도 우주를 떠돌고 있으며, 비록 두 사람은 10년 전에 헤어져서 따로 있지만, 두 사람은 함께 그 사랑의 빛을 통해서 하나라고 말합니다(368). 이처럼 소희 역시 고통을 겪으며 사랑에 있어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토마스 수사의 말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사랑은 가시지 않아요.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르는 거니까”(371). 사랑은 영원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 고통과 사랑


1. 작가는 ‘악’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곧 ‘무의미’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무의미’가 존재합니다. 어떤 무의미들이 있습니까? 그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소설 속 미카엘 수사의 교회(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과 급진적인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소설의 초반부에서 요한은 소희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32-34절[각주:3]에서 결혼을 하게 되면, 세상일을 염려하고 마음이 갈라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영혼의 사랑을 신랑과 신부의 사랑으로 비유하지요. 여러 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배우자(연인)에 대한 사랑은 서로 평행선과 같은 것일까요? 동시에 하나님과 배우자(연인)를 기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이미 결혼을 한 또는 앞으로 결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까요?


3. 이 책에는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인 순명(obedience), 정주(定住, stability), 환대(hospitality), 노동과 기도 등이 언급됩니다. 여러 분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가치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가치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이 있을까요?


두 번째 이야기 : 책과 나

1. 이 소설 속에 나오는 하나님은 ‘숨은 신’입니다. 부재하면서 동시에 현존하는 하나님이지요.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재 또는 현존(임재)을 강하게 경험한 때는 언제입니까?


2. 지금까지 여러분이 경험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그 섭리가 지금 여러분께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이 소설에서 ‘종소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꿈꾼 사다리(창세기28:10-17)[각주:4]처럼 하늘로, 곧 신에게로 올라갈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통로이자(22),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소명, 은총, 개입을 상징합니다(135, 243, 268, 371). ‘숨은 신’과 나를 연결해 주는 상징이 종소리, 곧 “높고 푸른 사다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종소리/사다리는 야곱의 사다리와 같이 신이 숨은 것과 같은 고통의 공간이 바로 ‘하나님의 집’(벧엘)임을 암시합니다. 요한은 한 때 종소리를 저주하기도하고(22-23), 종소리와 상관이 없어지기를 원하기도 하였지만(199-200), 사실 요한은 그 종소리를 사랑하였습니다(22, 367).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말하자면, 힘들다고 해서 그 종소리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종소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새벽하늘, 푸르스름한 빛 속에 종탑이 우뚝 솟아 있고 종소리가 퍼져가고 있었다. 새벽의 찬 기운을 피하려고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올려다보면 그것은 이 지상에 유일하게 허락된 영원에의 통로, 야곱이 보았다는 그 사다리가 소리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만져볼 수도 붙들 수도 머물 수도 없으나 분명히 거기 있는, 그런. (22)

당신에게도 이런 ‘종소리’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당신을 이어주는 상징이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4. 그 외 이 소설을 읽을 때 여러분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내용이나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또는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오늘의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서 8장 28절/새번역)


  1. Lucien Goldmann, The Hidden God, trans. Philip Thody (New York: Humanities, 1964), 36-37. [본문으로]
  2. “공산당 박해 받고도 ‘반공’ 선택하지 않은 수도자들,”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2013년 12월 27일,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453 (2014년 4월 11일 접속). [본문으로]
  3.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고린도전서 7장 32-34절) [본문으로]
  4.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창세기 28:10-1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