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제주도를 찾은 것은 단지 그곳이 20년 전 아내와 함께 갔던 신혼여행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주도의 바다, 제주도의 바람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제주도 동북쪽에 자리잡은 한 어촌 마을 펜션에 짐을 풀고 곧바로 해변으로 나갔다. 해질녘이 되니 까페도 일찍 문 닫고, 겨울날 올레길을 걷는 사람도 없었다. 한적한 포구에는 나와 아내와 아이와 바람과 파도와 새들만 있었다.

 

여행은 짧았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남는 것은 사진이라고, 아쉬운 마음에 휴대폰 속에 저장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 보았다. 즐거운 모습이 담긴 사진들 사이에는 숙소 앞 해변에서 촬영한 짧은 동영상도 있었다. 잿빛 구름이 잔뜩 낀 해변에는 파도소리를 압도하는 바람소리가 가득했고, 지구가 만들어 내는 그 소리들과 함께 거센 바람에 밀려 힘겹게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의 울음소리와 방파제를 뛰어 다니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 소리가 섞여 간간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다시 나를 제주 바다로 데려가 주었다.

 

그렇게 잠시 추억 속에 머무는데, 문득 여행 중 어디선가 받았던 기념 엽서가 생각이 났다. ‘사운드 컬러링’(Sound Coloring)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혔 있는 엽서 세트였다. 찾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제주 곳곳의 소리풍경을 녹음하고, 각각의 장소에 서식하는 특징적인 동물들을 그려 두어 사용자가 색연필로 칠할 수 있도록 한 엽서들이다. 엽서에 인쇄된 큐알(QR) 코드를 스캔하니 제주도의 풍경 사진과 함께 그곳에서 녹음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웹사이트로 연결되었다. 비록 이번 여행 중에 내가 직접 가본 곳들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를 듣고 있으면, 사진 속의 풍경이 마음속에 떠오르며 마치 제주도의 구석구석까지 이끌려 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엽서와 풍경 소리를 통해 영어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말은 소리를 뜻하는 ‘sound’와 풍경을 뜻하는 ‘landscape’를 합성한 단어로서 소리로 경험되는 풍경을 의미하는 말이다. 랜드스케이프가 확실히 시각을 통해서 경험되는 경치라면, 사운드스케이프는 소리를 통해서 경험되는 풍경이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소리풍경’으로 번역된다. ‘아, 이런 말도 있구나!’ 소리풍경이라는 개념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말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곱씹는데, 나의 의식은 어느새 작년 영성 순례 때 다녀온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가의 몽생미쉘 수도원으로 가 있었다. ‘몽생미쉘’(Mont-Saint-Michel)은 문자적으로 ‘성 미가엘의 산’이라는 뜻으로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이다. 이곳에 709년 생 오베르(Saint Aubert) 주교가 꿈에 천사장 미가엘의 지시를 받아 예배당을 세웠고, 그것이 11세기에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으로 발전되었다고 전해진다. 작은 섬 위에 세워진 웅장한 중세의 건축물과 조수간만의 차가 큰 노르망디 해안의 자연환경이 매우 아름답게 조화되어서 ‘서구의 경이’(Wonder of the West)라고 불리는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고, 매 년 수백 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사실 수도원들을 순회하는 영성 순례를 준비하며 몽생미쉘을 여정에 꼭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이곳은 근대 이후에는 수도원이 아니라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또 현재는 너무 관광지화되어서 수도원 본래의 맛을 느끼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을 다녀오신 한 영성학 교수님께서 꼭 가보라고 권면해 주셔서 먼 길을 달려 갔는데, 함께 간 거의 모든 분들이 정말 이곳에 오기 잘했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잊지 못할 추억이 남는 곳이 되었다. 많은 여행 안내 자료에 소개된 것처럼 건축물과 환경이 정말 아름답기도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몽생미쉘에서 체험한 경이(wonder)의 절정은 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의 회랑(回廊)에 있을 때 찾아왔다.

 

회랑(cloister)은 건축물의 주요 부분을 둘러싸거나 연결하는 지붕이 있는 복도로서, 일반적으로 아치를 사용한 사각형의 회랑은 수도원 건축물을 특징짓는 공간이기도 하다. 몽생미셸 수도원 성당의 북쪽 날개 부분(transept) 바깥에는 사각형의 회랑이 자리잡고 있는데, 한쪽 면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어서 아치 너머로 보이는 바다 조망이 매우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이 그곳에 들어 섰을 때에는 이미 해질녘이었고, 중년의 한 여성이 청소년으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프랑스어로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일행의 목소리가 방해가 된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떠나갔다.

 

그것을 보고 나는 우리 순례단원들에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침묵의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회랑의 한쪽 모퉁이 벽으로 붙어 일렬로 앉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으니 주위의 소리들이 마음에 들리기 시작했다. 지붕과 정원 바닥에 떨어지는 차분한 빗소리와 마음을 깨우는 바닷바람 소리, 그리고 회랑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정겨운 발자국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다를 향하여 난 아치의 빈 공간에서는 해질녘의 하늘이 아련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침묵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소리들과 풍경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심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린 잘 알 수 있었다.

 

마침 그때의 장면을 담아 둔 영상이 있어서 찾아 보았더니 그 침묵의 시간이 다시 경험되며 마음이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차 오른다. 이렇게 소리풍경은(soundscape)은 시각적인 풍경(landscape)과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그 시간과 공간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한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어떤 세계를 추억이나 기대 속에서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소리풍경이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다녀온 여행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지금 내가 그 한 부분에 몸담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한 현재적인 고민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각각 어떠한 소리풍경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이들은 강단에서 전해는 메시지의 내용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어떠한 소리풍경을 그 마음에 담아갈까? 그리고 그 소리풍경에 대한 기억과 울림들이 그들이 엿새 동안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칠까? 어떻게 하면 소리풍경이 성도들의 영성을 깊게 하는 교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여행을 다녀온 사진과 영상을 보다가 괜히 엉뚱한 고민만 깊어진다.

 

 


 

〈월간 문화목회〉45(2024년 3월호), 19-23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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