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던 (John Donne)의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는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토마스 머튼에게 영향을 주었다. 머튼은 존 던의 시의 첫 구절을 가져와서 "아무도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머튼이 '자유를 위한 노래'를 위하여 쓴 씨, "All the Way Down"(1966)에서도 이러한 존 던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생각과 공명을 이루고 있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머튼은 2차세계대전으로 온 세계가 전쟁과 죽음의 폭풍 가운데 있던 시기를 살았으며, 여러가지 저술활동 등을 통해서 활발하게 반전운동을 벌였다.

 

이 시에서 머튼은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간 이야기를 통해 아래로 깊이 내려가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관상 체험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온 인류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전쟁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의 종을 울린다'는 표현을 통해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종을 울리는 것', 그것은 머튼이 세상에서 관상한 것을 나누는(Contemplata aliis tradere)  방식이었다.




ALL THE WAY DOWN

(Jonas Ch.2)

 

I went down

Into the cavern

All the way down

To the bottom of the sea.

I went down lower

Than Jonas and the whale

No one ever got so far down

As me.

 

I went down lower

Than any diamond mine

Deeper than the lowest hole

In Kimberly

All the way down

I thought I was the devil

He was no deeper down

Than me.

 

And when they thought

That I was gone forever

That I was all the way

In hell

I got right back into my body

And came back out

And rang my bell.

 

No matter how

They try to harm me now

No matter where

They lay me in the grave

No matter what injustices they do

I've seen the root

Of all that believe.

 

I've seen the room

Where life and death are made

And I have known

The secret forge of war

I even saw the womb

That all things come from

For I got down so far!

 

But when they thought

That I was gone forever

That I was all the way

In hell

I got right back into my body

And came back out

And rang my bell.

 
줄곧 아래로

(요나서 2장)

 

나는 내려갔다.

동굴 속으로

줄곧 아래로

바다의 바닥까지.

나는 더 밑으로 내려갔다.

요나와 고래보다도

아무도 나만큼

그렇게 아래로 가보지 않았다

 

나는 더 밑으로 내려갔다.

어느 다이아몬드 광산보다도

킴벌리의 가장 낮은 동굴보다도

더 깊이

줄곧 아래로.

나는 내가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도 나보다는

더 깊이 내려가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내가 계속해서

지옥에 있다고

그들이 생각했을 때

나는 즉시 내 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나의 종을 울렸다.

 

아무리 그 어떤 방법으로

그들이 지금 나를 해하려 한다고 해도

아무리 그 어떤 무덤 속에

그들이 나를 두려고 해도

아무리 그 어떤 불의를 그들이 행한다고 해도

나는 보았다

모든 믿음의 뿌리를

 

나는 그 방을 보았다

생명과 죽음이 만들어 지는 곳.

그리고 나는 알았다

전쟁의 비밀 요새를.

심지어 나는 자궁도 보았다

모든 것들이 나오는 곳.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멀리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내가 계속해서

지옥에 있다고

그들이 생각했을 때

나는 즉시 내 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나의 종을 울렸다.



 

*킴벌리(Kimberly)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중부의 도시이며 다이아몬드 광산의 산지이다.

 

 

우리에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의 제목으로 잘 알려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는 원래 영국의 사제이자 시인인 John Donne (1572~1631) 이 쓴 시의 제목이다.

 

이 시에서 존 던은 모든 사람은 섬과 같이 떨어진 존재가 아니며, 모두 대륙과 같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곧 나의 죽음이며, 내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누구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조종을 울리는 지 알아보려 하지 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종은 나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1937년 스페인의 내전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다루며, 우리는 모두 한 인류임을 이 시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후에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다른 글에서 머튼의 시와 함께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최근, 잔인하게 살해된 안양 초등학생 혜진이와 예슬이를 생각하며, 그리고 티벳에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어가고 있는 많은 이들을 기억하며 존 던의 시를 읽어 본다.

 

 

For Whom the Bell Tolls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사람은 아무도 자기 홀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이니

만일 한 조각의 흙덩이가 바다에 쓸려 내려가면

유럽은 작아진다.

곶이 씻겨 내려가도 마찬가지이며

당신의 친구 또는 당신 자신의 땅이 쓸려 내려가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죽음도 나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저 조종이 울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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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어난 숭례문 화재와 관련된 소식이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뉴스가 수사 진행과 문화재관리 대책, 책임소재 규명, 복구방법과 비용 등에 맞추어져 있다. 이 모든 것들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70대의 노인이 숭례문에 불을 지른 이유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알려진 대로 용의자는 토지보상문제와 관련한 기업에 대한 원망과 관계 당국에 대한 분노 등으로 그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일들은 숭례문과 전혀 무관한 데도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몇 해 전 대구지하철 방화에서도 있었다.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그때도 범인이 개인적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여,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작년에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 역시 비슷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

 

갈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그 분노를 쏟아놓고 있다. 가슴에 난 불을 스스로 다스리고 끄지 못해 그 불똥이 무관한 사람들, 문화재 등으로 옮겨 붙어 큰 피해를 입해는 것이다.

 

물론 문화재보호를 위한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문화재를 훼손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난 분노의 불, 원망의 불씨를 다스리기 위한 사회적, 국가적 관심과 노력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2008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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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한 것이 좋다

날적이 2008. 1. 25. 10:16

오랜만에, 누님의 아이들, 그러니까 조카들과 며칠을 함께 보냈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준영이,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는 가영이는

다른 사람들은 썰렁하다고 표정을 굳히는 나의 유치한 유머에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팬들이다.

'유치한' 게, 나랑 통한다!

 

많은 어른들은 유치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치해서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늘 복잡하고, 삶을 살아가는 많은 노하우로 그 머리와 가슴을 채우고 있다.

그 노하우들이란 대개 선입관, 편법, 탐욕,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들이다.

나도 그런 어른이다. 벌써 삼십대 중반이다! 

 

유치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하다는 말이리라. 그리고 단순하다는 뜻도 된다.

깨끗함과 단순함은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미성숙한 사람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일지는 모르나

기독교신앙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래서 난 유치한 것이 좋다. 순수한 우리 조카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아이가 된 것 같다.

나도 벌써 때가 많이 묻은 아저씨이기에

아이들과 같이 놀다보면, 나도 그 순수함으로 덩달아 정화되는 것 같다.

비슷하게 무한도전 같은 유치한 방송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으면, 일종의 카타르시스도 느껴진다.

 

조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효과일까?

어제 저녁, 유치한 영화를 보며, 제법 눈물을 흘렸다.

함께 간 사람들은 모두 지루하다는데, 혼자 눈이 빨개져서 극장을 나왔다. 창피하게도......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도 눈물이 또 나왔다.

 

우습다.

 

'권혁일, 이 정도면, 유치하다 못해 청승이다!'


2008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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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우체국에 가기 위해 건널목에 섰습니다.
며칠 동안 씨름하던 원고를 급히 부치기 위해서입니다.
멈춰진 신호등 앞에 서니 사람들이 보입니다.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 ......
그리고, 복잡한 교차로를 빠져나가는 여러 모양의 자동차들 ......
각각 다른 모습으로, 각각 다른 방향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저들도 모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겠지?'
비록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지도 알지 못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목적을 잘 깨닫지 못한 이들이 있을지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조금 전엔 내가 빠르기 길을 걸어가기 위해 피해가야할 존재로 보였는데
이제는 함께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는 동료로 느껴집니다.

신호등이 바뀌고
저도 그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위해 성실히 살 때에
세상이 굴러갑니다 지구가 돌아갑니다

이번 한 주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주일에 만나 함께 즐겁게 예배합니다
주일은 교차로에서 신호대기를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살아가지만
우리가 더 큰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는 지체인 것을 확인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기쁜 날, 쉼의 날 되길 기대합니다

 

2007년 9월 6일 부산, 수영교차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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