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단상



하나. 카네이션

길거리마다 카네이션이 가득하다. 

영등포역에서 교회로 오가는 길에는 대목을 맞은 상인들이 부지런히 카네이션 바구니를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마치 대학시절, 학교 앞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도 매년 이맘 때 쯤에는 수많은 카네이션들로 길가가 채워졌다. 그리고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아주 신중한 얼굴로 이쁜 것을 골라 사가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카네이션을 고르거나, 바구니를 손에 들고 걸어가는 저들의 무리에 나도 동참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든다. 그러나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멀리 부산에 계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KTX가 개통되었다고 하나 부산은 하루에 오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아마 부모님과 함께 사는 동생이 카네이션 증정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어버이날이 되어도 부모님을 찾아 뵙고 꽃 한 송이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히 죄송하고,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신데도 이렇게 서운하다면, 부모님께서 돌아가신다면 오죽이나 더 하겠는가? 비록 지금은 학생 때보다는 더 좋은 꽃과 선물을 살 수 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 지금은 그것이 큰 의미는 없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비록 지금은 비싼 선물을 살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을 때 잘 하자!


둘. 선물

제주선교 답사로 하룻밤 외박을 해야 하는데, 마침 장모님께서 일이 있으셔서 서울에 올라오셨다. 이 기회에 어버이날 선물을 직접 드리기로 하고, 작은 선물을 몇 가지 준비했다. 작은 선물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인 장모님이 들고 다니시기에는 부피가 그리 작지는 않다. 원래 내용이 실속 없을 때 양이 커지는 법이다 ^^: 그리고 아주 당연히 돌아가시는 차표를 마련해 드렸는데, 내려가시는 날 아침 장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방도 작은데 선물을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 자꾸 이러면 부담스러워서 자주 못 오는데…” 그렇다. 장모님은 확실히 부담을 가지고 계시다. 장모님 뿐만 아니라 친부모님도 혹시 필요하신 게 있냐는 질문에, 아예 값싼 한 가지 항목으로 한정지어 대답하신다. 그리고 평소에도 액수를 떠나서 우리가 부모님을 위해 재정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에 적잖은 부담을 갖고 계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거의 대부분) 아무런 부담을 갖지 않고 부모님께서 나와 형제들을 위해 시간과 재정을 사용하시는 것을 누려왔다. 어머니께서 나와 식구들을 위해 온갖 집안일을 하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구입하기 위해 재정을 지출하시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누려왔다. 그러므로 부모님도 자녀들의 섬김을 부담없이 받으실 당연한 권리가 있으신데도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께서 베푸신 것보다 훨씬 미약한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그 권리를 찾아 누리려고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들의 존재가 자식에게 부담과 짐이 될까봐 염려하신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이것이 하늘아래 가장 높다는 부모의 사랑인가?

셋. 전화

5월 7일,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저녁 전화기를 들었다. 8일 아침 일찍 전화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매일 아침 집을 나서기에 바쁜 우리인지라, 아예 미리 전화를 드리기로 했다. 직접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자, 이렇게 전화하는 것이나 직접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부모님은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신다. 얼마 전 한 방송사의 ‘효도합시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최소한 일주일에 3번 이상씩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자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과 이야기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떨어져 있을 때의 전화뿐만 아니라 함께 살 때에도 대화에 참 인색한 것 같다. 많은 시간을 컴퓨터나 친구들과 함께 보내지만, 부모님과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고, 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어린아이들이 처음 유치원에 가면, 집에 돌아와서 유치원에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도 엄마에게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가 물어 보아도 잘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엄마들은 서운함을 느낀다는데,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부모님과 대화를 잘 하지 않고 살아왔다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서운하실까? 특히 부모와 자녀의 대화의 단절은 나아가서 세대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부터라도 부모님과 대화를 위해 시간을 좀더 늘리는 것은 어떨까? 비록 무뚝뚝한 성격의 아버지라도 곧 마음을 여실 것이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약속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에베소서 6장 1-3절)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칼럼

200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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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교회 4부예배 주보 목회칼럼

2004. 4. 25.

준비된 헌신, 계속되는 헌신

 

얼마 전 한 후배가 많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의 병명은 간암 말기. 고작 스물아홉의 나이에 간암이라니, 더욱더 병원에서도 손을 놓아버린 말기라니... 갑작스런 소식에 몇 명의 지인들이 함께 병문안을 갔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웃음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는 원래 간염으로 군대에 가지 않았지만, 이후에 치료를 받아 항체가 생겼다는 판정에 안심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 몇 년 동안 바쁜 사회생활과 개인적인 일들로 몸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더욱이 그날은 탤런트 이미경씨가 페암으로 사망한 다음 날인지라, 병문안을 다녀오는 우리들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요즘은 웰빙(well being)’ 열풍이 불어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건강관리, 또는 균형 잡힌 몸을 위해 시간과 재정을 투자하지만, 난 먹고 자는 것, 그리고 걷는 것 빼고는 건강을 위해서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운동을 해야 되는데..’라는 마음은 있지만, 운동의 우선순위를 늘 뒤쪽으로 밀어 놓고 살고 있다. 그래서 요즘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전국적으로 운동을 하자는 캠페인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마음에 동요가 생기지 않는다. 정말 마음이 완고하다. ^^; (아마 여기에는 학교 다닐 때 체육시간, 특히 실기 시험 때의 긴장감에 대한 기억도 한 몫하리라. 사실 난 큰 키와는 달리 운동에는 별 소질이 없어, 어설프게 흐느적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선후배들의 질병 소식들과 언론에서 나오는 각종 통계와 보도들은 젊음이라는 것이 결코 건강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나니, 내가 오래 살고 싶은 욕심보다 가족을 위해 건강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 중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라는 책이 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inerd, 1718-1747)18세기에 활동한 미국 인디언 선교사이다. 그는 21세에 개종을 하고, 24세에 헌신을 해서, 29세로 생애를 마친 짧지만, 뜨거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주님께 얼마나 깊이 헌신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생애를 29세라는 젊은 나이로 마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는 건강을 돌볼 겨를이 없이 수고하고 헌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이 약해 제대로 걷기 힘들 때에도 먼 곳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말을 타고 며칠 씩 걸리는 거리로 찾아가기도 했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브레이너드의 이러한 헌신된 삶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건강을 돌보지 않아 일찍 숨을 거둔 것으로 인해 안타까움을 느끼게도 한다.


물론 흑백논리처럼 우선순위를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헌신에는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고,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건강이 뒤따라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의 예물은 반드시 흠이 없는건강한 양이어야 했다. 이것은 곧 신약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12:1) 헌신에서, 우리가 흠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흠이 없다는 것은 영적, 도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강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4월 한 달 동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헌신이라는 주제로 4부예배를 드리고 있다. 헌신의 시작은 그 마음의 결단이겠지만, 지속적인 헌신, 즉 헌신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흠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 시간과 재정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는, 예쁘고 멋있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지속적이고 깊이 있게 헌신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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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이 없을 때

 


부산에 있는 우리집은 수영구 수영동에 있고, 아내가 살던 처가는 해운대구 재송동에 있다. 비록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수영동과 재송동은 중간에 강을 하나 두고 맞닿아 있다. 더욱이 우리집과 처가는 중간의 높은 건물만 없다면 육안으로도 보이는 거리인데, 문제는 강을 건너는 다리가 한참 아래쪽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집에서 처가로 가려면 버스를 타러나가는 시간 10, 잘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평균 10, 돌아서 가는 버스 10, 내려서 걷는 시간 5분 이렇게 평균 35분이 걸린다. 그래서 부산에서 연애를 하던 시절, 중간에 다리가 하나 더 생겼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랬던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드디어 그 강에 다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물론 그 다리가 개통된 것은 우리가 부산을 떠나고 2-3년이 흐른 뒤라서 그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어째든 그 다리의 개통으로 인해 우리집과 처가는 자동차로, 모든 신호가 다 걸려도 5분 안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 ! ! (너무 팔불출 같이 웃었나 ^^; )

 

이처럼 지름길이라는 것은 정말 좋다. 지금길이 있으면, 원래 들여야 할 노력과 힘에 훨씬 못 미치는 양으로도 같은 성과를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지름길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호 목사님께서 KTX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시간보다 많이 걸린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 영등포-의정부간 구간이 그렇다. (물론 객관적인 시간으로는 서울-부산은 KTX3시간 30, 그리고 영등포-의정부는 1호선과 도보포함해서 1시간 40분으로 영등포-의정부 구간이 훨씬 가깝다. 그러나 체감시간으로는 부산 가는 길은 금방이고 의정부 가는 길은 한참이다) 결혼하기 전, 의정부에 집을 얻을 때만해도 ‘1시간 40분쯤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매일 왕복 3시간 이상, 다른 볼 일이 있으면 4시간 정도를 차타고 다니다보니 이건 장난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많이 버스를 타고 다닌다면 차가 막히지 않는다면 좀 시간이 단축되겠지라는 기대를 할 수 있지만, 웬걸 전철은 신호대기로 지연되는 법은 있어도 빨리 도착하는 법은 절대 없다. 아무리 급하게 마음을 먹고 전철을 타기 전에, 또는 전철에서 내려서 뛰어도 꼬박 3시간을 투자해야만 영등포-의정부를 오갈 수 있다. 물론 승용차로 오가면 시간이 단축되겠지만, 승용차로도 보통 왕복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이다. 앞으로 서울시 지하철에도 고속전철이 도입되거나, 영등포-의정부 직통 자동차 전용도로가 뚫리지 않는다면 이 시간은 줄어들기 힘들 것 같다.

 

이처럼, 우리 삶에는 지름길이 없는 경우도 많다. 만약 지름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아서 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지만, 지름길이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한 때는 의정부에서 교회로 올 때 좋다! 이 틈에 모자란 잠을 보충하리라마음을 먹고 작정하고 않아서 잠을 잔 때도 있다. 하지만 한참 잠을 잤다고 생각하고 눈을 떠보면 청량리이고, 조금 더 자면 시청’, 더 이상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신문을 읽어도, 1면부터 32면까지 다 봐야 겨우 반 정도 밖에 가지 않는다. 무언가 전철 안에서 시간을 보람 있게,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보내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아무래도 먼 길을 오가는 지용이나, 보라에게 그 노하우를 좀 전수 받아야 할 것 같다.)


어째든 이것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지름길이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내 삶에서도 지름길이 없는 때가 꽤 있었다. 특히 대학이나, 신대원 시험을 준비하던 기간이 그랬고, 군복무 기간이 그랬다. 물론 좀더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만, 힘들고 지친다고 해서 정해진 시험날짜를 앞당길 수도, 군복무 기간을 단축시킬 수도 없었다. 등산을 할 때도 그랬다. 정해진 등산로 외에 지름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할 일이었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도 묵묵히 정해진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새로운 지름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름길이 없는 그 길을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등산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겠지만 등산에는 노하우가 있다. 배낭을 싸는 법부터 시작해서, 복장과 신발의 선택방법, 그리고 걷는 방법과 적당한 휴식시간과 방법이 있다. 이러한 등산의 노하우를 알게 되면, 무작정 배낭을 싸짊어지고, 막무가내로 올라가는 것에 비하여 훨씬 효율적으로 산을 오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시험을 준비하거나, 군복무를 하거나 또는 다른 지름길이 없는 길을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혹시 지금 지름길이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매일매일 억지로 걸음을 옮기고 있으며, 한 숨이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 지름길이 없는 것을 한탄하거나,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 길을 좀더 쉽고 효율적으로 걸어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구하라. 물론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권하는 것은 그 길을 주님과 함께 걸으라.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라!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분이시며,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분이시다. 혹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이 있다면, 로또나 경품행사들과 같은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것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지 말고,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과 함께 오늘의 길을 걸으라. 그분은 우리가 넘어질 때 일으켜 주시며, 일어나지 못할 때 업어주시는 분이시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그분께 말씀드리라. 그러면 매일매일 억지로 옮기던 무거운 발걸음이 어느덧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옮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뀔 것이다


주후 2004 4 24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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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주의보

 

 

정확히는 알지 못 하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건조주의보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지난 겨울 100년만의 폭설이 온 뒤로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있다. 최근 비가 조금 내려서 잠시 건조주의보가 해제되기도 했지만, 다시 건조한 날들이 계속되어서 지난 9일에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건조주의보건조경보로 강화되었다. 요즘은 한낮 최소습도가 1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단다. ‘건조주의보는 실효습도가 40% 미만일 때, 그리고 건조경보는 실효습도가 30% 미만일 때 발효된다. 그리고 습도 외에 바람의 풍속도 고려되어서, ‘낮은 습도강한 바람이 함께 만들어 내는 작품이 건조주의보건조경보이다.

 

일단 날씨가 건조하게 되면, 무엇이든 잘 마르게 된다. 그래서 입안이나 콧속이 건조해져서 편도나 코 안이 좋지 않거나, 마른 기침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다. (경험적으로^^) 그리고 산에 나무가 잘 말라서, 산불이 나기 시작하면 급속히 퍼진다. 설상가상으로 강한 바람이 동반되는 날이면 불길을 잡기가 더욱 어렵다. 실제로 지난 몇 달 동안 국내에는 크고 작은 산불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으며, 진화작업 중 소방대원들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날들이 건조해지면서, 때로는 우리의 마음도 건조해지는 것을 느낀다. 물론 이 둘 사이에 과학적인 인과성을 증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전철 안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건조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요즘 우리 청년1부의 많은 지체들을 만날 때 그런 느낌이 든다. 물론 모두가’ ‘항상그런 것은 아니지만, 겨울수련회가 있었던 지난 1,2월에 비해서는 많이 마음이나 신앙이 많이 건조해진 느낌이다. 3,4월을 맞이하면서 직장이나 학교에서 바쁜 일들이 많고, 특히 요즘은 중간고사와 과제물들이 쏟아지는 때라서 그런지 리더모임을 하거나, 개별적으로 만날 때 마른 한 숨을 쉬는 지체들이 많아 졌다. 대통령 탄핵과 총선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 그리고 이라크와 원유를 두고 불안정한 국제정세도 이러한 건조현상에 한 몫을 했으리라.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건조해지면 어떻게 될까? 앞에서 말한 호흡기 질환이나 산불과 비슷한 현상들이 발생하지 않을까? 편도가 붓거나 콧속이 마르는 호흡기 질환은 큰 병은 아니지만, 생활하는 데에 적지 않은 불편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마찬가지로 마음과 신앙이 건조해질 때 우리의 삶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른 기침이나, 편도가 붓는 것과 같은 이상 징후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강하고, 친밀하게 유지, 발전시키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또한 산불을 생각해보자. 마른 산은 일단 불이 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일단 성냥불과 같은 작은 불씨라도 떨어지고, 그것을 초기에 진화하지 못한다면 온 산과 집을 태우고 생명을 앗아가는 큰 불로 악화된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건조해져 있을 때에 작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것을 초기에 잘 해결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되어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과 신앙의 건조현상은 당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다.

 

요즘과 같이 건조한 때에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 주는 든든한 친구(^^)가 있으니, 그것은 임원과 리더들이 결혼선물로 사준 공기청정 가습기이다. 원래는 빨간 네온 불빛이 나오는 에로 가습기를 선물해 준다고 했는데, 노영이가 분위기보다 실용성을 고려해서 공기청정 가습기로 골랐단다. 어째든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습기는 이 건조한 시기를 별 무리 없이 잘 보내게 도와 주고 있다. ‘습기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몸으로는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신앙에도 습기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은혜이다.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지체들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매일 매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 은혜는 우리의 신앙을 메마르지 않게 해 주신다.

 

지금의 건조경보또는 건조주의보가 언제 해제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신앙의 건조와 메마른 현상을 이겨내기 위해서 부지런히 가습기를 틀어야 한다. 우리가 트는 가습기는 사랑과 은혜가 가득 뿜어져 나오는 가습기여야 한다. 바쁘고 힘든 때이지만, 시간을 내어 가족과 그리고 지체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은 우리의 맘에 사랑이라는 습기를, 그리고 피곤한 중에서도 매일 매일 펴는 성경과 두 손 모으는 기도는 우리의 신앙에 은혜라는 습기를 뿜어줄 것이다. 오늘 당장 우리의 마음과 신앙의 습도를 체크해보자. 여러분의 마음의 습도, 신앙의 습도는 몇 퍼센트(%)인가? 만약 아주 낮은 습도라면, 또는 계속해서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밤은 꼭 가습기를 틀고 자자.


 2004. 4. 10.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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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교회 청년부 4부예배 주보 목회칼럼

2004. 3. 28.


사순절에 생각하는 웰빙(well-being)문화

 

 

작년 하반기 이후로 웰빙(well-being)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한 마디로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육체로 인생을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웰빙(well-being)문화'의 핵심이다. 그래서 웰빙족은 고기, 화학조미료, 탄산음료를 꺼리고 대신 생선과 유기농식품을 선호한다. 동시에 요가, 피트니스, 필라티즈, 단학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추구한다. 또한 이들은 아로마 테라피, 라이트 테라피 등 심신을 안정시키는 자연요법에도 관심이 많다. 근래에 유행하는 반신욕 붐도 이런 웰빙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웰빙문화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행처럼 따라 갈 것이 아니라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먼저 웰빙족(wellbeings)은 몸과 마음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한 건강을 추구하고자 단학과 요가, 명상 등을 활용한다. 물론 여기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들 운동은 단순히 신체적 운동만이 아닌 뉴에이지적 성격을 띠고 있는 비성경적인 종교적 운동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최근에는 웰빙 열풍이 상업주의적으로 이용되면서 단순히 잘 먹고 잘 살자는 식으로 편안한 생활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인 삶을 강조하는 것으로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딤후1:8)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하늘 보좌를 떠나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고 본받아야 한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의 몸을 보다 가치 있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곧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12:1)

 

최근 웰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잘 살고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환경오염과 과중한 업무로 인한 건강의 약화와 정치, 경제, 사회, 가정적 혼란과 침체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급증이 역설적으로 웰빙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웰빙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극단적으로 반대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 잘 사는 것이며, ‘건강한 삶인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한 정신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말씀과 더불어 살아갈 때에 가질 수 있으며, ‘건강한 육체는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따라 살고 환경을 아끼고 보존할 때에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칙이다. 이에 따른 구체적인 생활 방식(Life style)은 각자의 삶에서 창조적으로 구현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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