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8. 토.



토요일 오전, 빨래와 청소를 하고 나니 '급' 피곤해졌다. 마루바닥에 뻗어서 잠시 자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기초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 오후 늦게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요즘 내가 하는 운동이라곤 산책이 전부이다. 몸을 별로 움직이지 않는 게으른 운동. 오늘도 운동은 별로 되진 않았지만, 길을 걸으며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유익했다. 허약한 남편이 "닳을까봐" 아껴주는 아내의 마음이 고맙다. 흐리고 바람이 부는 약간 쌀쌀한 날, Mint Mojito Iced Coffee를 마시니 정신이 바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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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5. 수.


버클리에 돌아온 지도 벌써 열흘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이웃들이 함께 울어주고, 위로해 주었다. 몇몇 분들은 모든 일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니 너무 슬퍼하지도 후회하지도 말라고 말해준다. 모든 일어난 일들을 결과론적으로 '하나님의 때'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에는 저항감이 있으나, 사람의 이해와 바램을 뛰어 넘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는 분노를 완전히 버리고 용서해야 하는 때라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 병원과의 대화가 진전 되어 드디어 어제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 일로 아버지와 같이 슬프게 돌아가시는 분이 생기지 않는다면, 최소한 줄어든다면, 아버지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내 맘 속의 분노와 원망의 감옥에 가둬 두었던 이들을 놓아 보내려고 한다. 이번 일이 젊은 의료진이 의사로서 성장하는 데에, 그리고 앞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치료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한국에 있는 동생 내외는 "순국선열을 기리는 현충일을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 소풍에 간다고 한다. 나도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제부터는 새로운 책 번역을 시작했고, 곧 중단된 공부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어제 오랜만에 사진기를 들고 버클리 다운타운에 나갔더니 이정표에 꽃이 피었다. 내 삶의 이정표에도 분홍색 장미꽃이 피기 시작했다.


논문을 읽고서

아직도 깊이를 해득할 수 있는 몇 번의 탐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관계 문헌을 읽고 이해를 가져야겠지만 개략적인 면에서 영성이란 우리 교인이 가져야 할 신성한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버지로서 자식의 전도의 의해 교회에 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아직도 너무나도 부족하다. 잘 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신령한 품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혁일이가 형식화된 경건적 신앙을 벗어나 신령한 품성으로 허약한 신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논문을 발표할 수 있도록 어려운 과정 중에서도 개척되어 나가는 면모를 볼 때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따라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찬란하고 성스러운 도전 앞에 있는 나의 아들에게 그 꿈 이루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2004. 6. 4.

청천(淸川) 



약 십여 년 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며 쓴 논문을 아버지께 드린 적이 있다. 많은 기대를 걸고 있던 아들이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데에도 반대하지 않으시고, 힘을 다해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셨던 아버지가 고마워 논문을 드렸지만, 초신자이신 아버지께서 전문용어가 많은 학술논문을 직접 읽으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아버지께서 내 논문을 읽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품들 속에서 위의 글을 발견했다. 먼저 논문 속에 나오는 주요 개념들과 어려운 신학 용어들을 자료를 찾아 정리해 놓으시고, 그 아래에 논문을 읽고 난 감상을 적어 두셨다. 이 글을 읽는데,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 글은 특히 아버지의 신앙, 그리고 믿음을 가지시면서 그 성품이 참 온화하게 변해가셨던 아버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버지의 육신은 이미 재가 되어 버렸지만, 당신의 생명은 나와 우리 남매들에게 전해져 우리들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남매가 이땅에서 맺는 열매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리고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나눠주신 생명과 가르침, 기도가 열매 맺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글을 읽으며, 공부가 어렵다고 낙심하지 않고 교회와 세상에 유익을 줄 수 있는 좋은 글들을 써서,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2013. 6. 4. 아버지의 일흔 두 번째 생신에.


2013. 5. 26. 주일.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잠에서 깨었다. 꿈에 아버지와 함께 병원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침 아버지를 담당했던 의사가 그 옆을 지나갔고, 그를 본 아버지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큰 소리로 항의하셨다. 의사는 매우 당황해했고, 난 아버지를 진정시켜 드리려고 하다가 깨어났다. 너무 생생했고,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서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마음의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꿈 속에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오늘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이기에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서둘러야 한다. 


어머니와 함께 주일 오전예배를 드리고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부산에서는 미국까지 직항이 없기 때문에 인천으로 가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동생 가족이 김해공항까지 배웅을 나와서 한국에서 먹는 마지막(?) 밥이라며 점심을 사준다. 약 5년 전 처음 유학을 나올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중에 아버지도 계셨다. 내가 탑승을 위해 들어갈 때 뒤에서 슬쩍 눈물을 닦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리고 지난 1월 내가 비자 갱신을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 왔을 때 아버지는 다시 살짝 젖은 눈으로 나를 맞아 주셨다. 그래 또 있다. 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그때도 아버지는 눈물을 훔치셨다.



설 전날 밤

 

 

이젠 아버지의 키를 훨씬 넘어버린

아들에 대한 대견함인가.

아들의 대학 합격 발표를 듣고

평소엔 손 한 번 잡지 않던

아들 몸뚱아리 와락 끌어 안으며

잘했다 잘했다 외엔

더 이상 말 잇지 못 하시던 아버지.

 

어릴 적

지붕에 메주만 매어 달아도

쓰러질 것 같던 찌들린 집안살림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가난한

촌사람의 설움이

지난 50년 동안 가슴 아팠던 절절한 사연이

모두 씻기어 눈물로 녹아 내리고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도

어느덧 깊게 패여진

눈가의 주름살 사이로

눈물 흘러 내리는데

 

일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새삼 아들의 가슴에 되살아나

잠 못 이루고 괜히 뒤척거리는

오늘은

자면 눈썹 하얗게 센다는

///

 

1994년 구정


아주 오래 전에 쓴 시인데,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잘못된 부분이 있다. '경상도 사내'였던 아버지는 평소에 자녀들 손을 잡아 주시는 것은 거의 하시지 않으셨지만, 한 번씩 약주를 하고 오시면 우리 남매들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시며 애정 표현을 많이 하시곤 했다. 사실 난 스물 살까지는 아버지에 대하여 불만도 있었고, 아버지와 그리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아주 엄하신 편이었기 때문에 눈치를 많이 보기도 했고, 허락을 받을 일이 있을 때는 거의 어머니를 통해서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가 대학  1학년 때 "네가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말해 준 교회 선배 성훈이 형과의 대화를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내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점점 이해하게 되었고, 또 이해가 깊어지자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점점 깊어져 갔다. 그러나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난 지금까지도 따라잡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결코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며 어디로 가야할까?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 대문 앞에 홀로 서서 차를 타고 떠나는 우리 부부를 향해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 생각난다. 물론 동생 가족이 가까이에서 최선을 다해 모시긴 하겠지만, 어머니를 홀로 남겨 두고 떠나게 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처럼, 혹시 어머니도 갑자기 돌아가시게 될까 두렵다. 또한 공항에서 헤어진 동생의 어깨가 참 무거워 보인다. 몸을 비행기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있다. 한 달 전 아버지의 회복을 간절히 기도하며 한국으로 건너갔는데, 지금은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돌아 가니 마음이 참 복잡하다. 그때와 상황은 다르지만 이번에도 역시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 노트북을 꺼내서 지난 일들을 정리한다. 병원과의 대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한다. 아마도 꿈에서 느낀 아버지의 분노는 아직도 바다에 버리지 못한 나의 분노일 것이다. 뜬 눈으로 밤을 샌다.





2013. 5. 17-18. 금-토.


거제도로 계획에 없던 여행을 왔다.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드리고 허전해 하실 어머니를 위해 삼남매가 함께 뭉쳤다. 마침 동생 내외도 휴가가 며칠 더 남았고, 자형의 배려로 누나도 집안 일로부터 며칠 간 휴가를 얻었다. 그리고 나와 아내, 상속절차를 비롯한 각종 뒷일들을 도맡아 처리하기로 했지만 아버지의 사망신고가 처리되기까지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 갑자기 떠나온 여행이라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마침 공휴일이 낀 연휴라 피서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숙소도 유람선 표도 어렵게 구했다. 길은 막히고 뭔가 딱딱 들어 맞는 것은 없지만,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좋다. 어려운 일을 함께 겪으면서 가족들 사이에 정이 더욱 끈끈해 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관광지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숙소로 가는 길에 한적한 어촌 마을에 들러서 저녁을 먹는다. 섬들이 묵상에 잠겨 떠 있는 바닷가 마을, 나중에 이런 데서 살아도 좋겠다며 아내가 이야기한다. 해가 지는 조그만 항구에 서니 대학 시절 읽은 시가 한 편 생각난다. 


바다에 오는 이유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모두 버리러 왔다


몇점의 가구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인장과

내 나이와 이름을 버리고


나도

물처럼

떠 있고 싶어서 왔다.


- 이생진


우리는 왜 이 바다에 와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할까? 안타까움도, 죄송함도, 분노도, 그리움도, 후회도 이제 버려야 한다. 버려야 흐르는 물처럼 떠 있을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