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나가는 길목



바다로 나가는 길목을 구름이 막아 섰다

바다 저쪽 아버지 집은 보이지 않고

그리움만 뭉쳐서 바다 위를 가득 덮는다

바람을 타고 많은 질문들이 들리지만

대답은 구름에 묻혀 보이지가 않는다

아니 대답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붉게 퍼지는 석양을 타고 네 슬픔이 내게 배어들어

내 눈도 붉어 진다


2013. 9. 3. 화.

'시와 수필 > 멸치 똥-습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글픈 뒷모습  (0) 2013.09.04
모퉁이의 너  (0) 2013.03.22
턱을 괸 남자  (0) 2013.03.08

'산책길' 팀블로그게재한 글을 옮겨 놓는다. 

(2013년 8월 16일)


장명등을 밝히는 사람들 :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시간을 '때우기 위해' 교회 북까페의 책장을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제목을 발견했다. 이전에 어디선가 광고를 보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인데, 이곳 태평양 바다 건너편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은 평소 좋아하는 작가이고, 지리산도 스무 살 때 무거운 배낭 위에 텐트까지 얹어서 기다시피 올랐던 '지리산 등반대'의 초록빛 추억이 깃든 산이다. 게다가 평소 제법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교'에 관한 글이라 책 제목을 보는데 군침이 막 돌았다. 그러나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이 책이 나의 예상과 달리 '교육'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발견은 나에게 실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인터넷에서 찾아본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이 책은 "지리산과 섬진강 주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으로 묶여지기 전에 <경향신문>에 약 9개월 동안 연재되었던 글이며, 책으로 출간된 이후에도 <MBC 스페셜>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고 한다(2011년 3월 4일).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이야기 속에 나온 사람들의 집이나, 이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지리산학교'를 찾는 방문객이 많다고 하니 가히 세간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제서야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고 앉아 있으니, "쯧쯧!" 수 년 동안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무지'와 지금의 '뒷북'에 대한 핑계가 될까? 


      어쨌든, 이 책은 다 '먹어 치우는' 데에 하루가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 책이 참 '맛있는' 이유는 먼저 이 책의 등장인물이 영위하고 있는 지리산 산골마을과 섬진강변에서의 삶이 세속적인 도시 생활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던져 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시를 떠나 지리산으로 온 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부를 욕망하는 삶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사람, 생명, 평화를 사랑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삶을 사는 데에 많은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적게 벌고, 적게 쓴다. '최 도사'라는 인물은 일 년에 몇 달 시내의 마트에서 주차 관리 요원으로 일해서 번 '연봉 200만원'으로 일 년을 충분히 산다. '낙장불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원규 시인은 방문객들을 위해서 자신이 사는 집을 통째로 비워주기도 한다. 공지영 작가의 손을 거쳐 맛깔나게 쓰여진 이들의 이야기는 행복을 찾기 위해 유형, 무형의 것들을 자꾸만 소유하려고 발버둥치는 도시인들에게 참된 행복은 오히려 소유가 아니라 욕심을 비우고 생명과 사람, 평화를 사랑하는 삶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인물들이 취한 의미있는 '방향 전환'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처음부터 지리산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들이 아니라, 다른 도시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살다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어떤 계기로 인해 지리산 산자락과 섬진강변으로 옮겨간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해서, 어떤 이는 결혼 생활에 실패해서, 어떤 이는 보다 의미있는 삶을 찾아 지리산으로 향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각각의 인생에서 어느 순간 중대한 '방향 전환'을 해야할 때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디에서 살 것인지와 같은 '장소'의 문제는 나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내 나이 올해 마흔. 평균 팔 십 년을 산다고 생각했을 때 산술적으로는 인생의 반환점 언저리에 서 있다. 지리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조만간 있을) 커다란 인생의 방향 전환을 앞두고 내가 누구인지,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나에게 신선하고도 가치있는 질문들을 던져 준다.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이 책에 나오는 지리산 사람들은 도시를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떠나 보내지 않았다. 소문을 들은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집 대문을 넘나들고 있고, 특히 신문 연재와 책을 통해서 유명세를 탄 이후에는 이들의 이야기가 더욱 많은 이들의 입과 인터넷 사이트에 오르내리고 있다. 최근에 이 '지리산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책의 영향력은 앞으로 당분간은 지속되리라 본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삶은 이 책 속의 함태식 옹에 대한 글로 요약될 수 있다. 함태식 옹은 1972년 나이 마흔에 지리산에 입산하여 노고단 산장을 열고 거의 40년 동안 피아골 대피소를 지키며 많은 조난객들을 구한 인물이다. 


"노고단 산장에 처음 가서 내가 호롱불을 만들어 현관에 달아놨어요. 근데 작은 호롱불빛이 말이야. 멀리 화엄사 입구에서도 보여. 등불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찾아오는 거야. 길게 밝혀 준다고 그걸 장명등이라고 하지."


그의 말대로 빛이라는 게 그렇구나 갑자기 우리는 숙연해졌다. 작은 일도 지극해지면 생명을 살리는 등불이 되는구나. 장명등,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 공지영,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서울: 오픈하우스, 2010), 57-58.


장명등(燈), 어두운 밤 멀리까지 빛을 비추는 등불처럼, 기이하면서도 소박하고 진실된 지리산 사람들의 삶은 한 때의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도시 생활이 커다란 기계가 물질을 생산하기 위해 굉음을 울리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 속의 삶 같은 한, 또 도시가 그 물질들을 소비함으로써 욕구를 충족하려는 소비자들로 가득 찬 백화점 같은 한, 이들의 이야기는 길게 한 줄기 빛을 비춰주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장명등을 밝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의 기독교 공인(313년) 이후 세속화되고 타락해진 기독교 신앙을 벗어나 마음의 순전함(purity of heart)을 얻기 위해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의 사막으로 들어간 4~5세기의 '사막의 수도자들'(Desert Fathers and Mothers)이다. 공지영 작가도 그녀의 책에서 지리산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사막 교부들이 떠오른다고 쓰고 있다. 그만큼 지리산 사람들과 사막의 수도자들은 여러 가지 비슷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들은 모두가 순수성을 잃고 점점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번잡한 도시 생활로부터 벗어나, 지리산/사막에서 단순하고 진실한 삶을 살며 그 속에서 참된 자아의 발견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더불어 이들이 물질을 소유하는 것보다 비움과 가치 추구를 통해서 행복을 발견하려 한다는 점, 이들이 도시를 떠났지만 도시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배우기 위해 몰려 온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삶이 하나의 '장명등'이라는 점들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공통점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천오백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보다도 더 큰 차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둘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못하다. 하지만 지리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옛날 사막 수도자들의 삶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만 짚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막 수도자들의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한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주로 4~5세기에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사막에 살던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를 시작으로 많은 이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훈련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사막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주로 평신도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글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어떤 이들은 혼자 동굴이나 무덤 등지에서 기거하는 은둔자(hermit/anchorite)로 살기도 하였고, 삼삼오오 모여 살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 대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생활(cenobite)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가장 활발했을 때는 '사막을 도시로 만들었다'고 묘사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이집트의 사막에서 수도 생활에 자신을 내던졌다.


      당시 사막에서는 많은 경우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거주하며 수도 생활을 배워 나갔는데, 그들의 배움과 훈련 방법은 스승의 강론을 듣고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스승의 삶을 관찰하고 따라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씩 외부에서 찾아온 방문자들이나 제자들이 스승에게 질문하거나 "아버지여(abba, 여성의 경우는 amma),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가르침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 책에 수집된 이야기들은 이와 같은 경우 영적 스승들이 남긴 짧은 가르침들 또는 이들과 관련된 짧은 일화들이다. 이 가르침들과 일화들은 구전과 기억을 통해서 전해져 오다 첫 세대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을 알지 못하는 다음 세대의 수도자들을 위해 그 일부가 기록으로 남겨졌다. 


      이 사막의 수도자들의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며 전해져 내려오는 이유는, 이들의 가르침이 어떻게 하면 금욕생활 또는 수도생활을 훌륭하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하여 금식과 철야, 그리고 여러가지 고행을 하기도 하였지만 고행 그 자체가 그들의 관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스승들은 지나친 고행은 수도자를 교만하게 하여 수도생활의 본질을 흐릴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어떤 형제가 한 은둔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금식을 해야 합니까, 육체노동을 해야 합니까? 철야를 해야 합니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까?"


은둔자가 대답했다. "분별력을 가지면 이 모든 것들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소. 많은 사람들이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까닭은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오. 오랜 금식으로 입에서 가시가 돋고, 말씀을 다 배워서 알고, 시편을 암송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가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겸손과 사랑이오." 


- 사막 교부들 지음, 배응준 옮김, 《깨달음》(The Desert Fathers: Sayings of the Early Christian Monks), (서울: 규장, 2006), 199. 


      그렇다고 해서 사막의 수도자들이 늘 소위 '영적인' 이야기, 또는 실제 생활과는 관련이 없는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를 하고 산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한 은둔자가 포에멘(Poemen)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러 왔다. 포에멘은 기뻐하며 그를 자신의 움막으로 맞아 들였고, 두 사람이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 은둔자가 "성경과 영적인 것들과 하늘에 속한 것들"에 대하여 말하였으나 포에멘은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당황한 은둔자가 밖으로 나와서 포에멘의 제자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 제자가 포에멘에게 들어가 그 이유를 물었다. 포에멘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아래에 속한 사람이라 땅의 것을 말하는데, 그 분은 위에 속한 사람이라 하늘의 것들만 이야기하지 않소? 만일 그 사람이 영혼의 격정에 대해 말했다면 나도 기꺼이 대답했을 것이오. 하지만 그는 영적인 것들만 말했소. 나는 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오.

-《깨달음》, 173.

 

이 대답을 전해 들은 은둔자가 다시 포에멘에게로 들어가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정욕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그는 포에멘의 대답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고 돌아갔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막 교부들의 이야기에는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인간적인 욕망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 책은 사막 수도자들의 옛날 이야기일 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인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난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이 책을 다시 읽다가 얼굴이 자주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약 1600여 년 전의 이야기들이 최근의 나의 어리석고 악한 마음과 행동들을 환하게 들추어 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 책이야 말로 기독교 영성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속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모든 시공간을 초월해서 적용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인물들에게 주어진 가르침들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던지는 나쁜 생각들에 주의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따르면서 그것이 악마들이 공격이라고 핑계대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쭉 읽어 내려가기보다는 중간 중간에 쉬어가며 충분히 묵상하고, 가능하면 주위의 벗들과 깨달은 내용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할 때 책 속의 내용들을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그 옛날 사막의 수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르침으로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수도자들의 이야기들은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가르침들을 담고 있는 것은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압바(암마)들의 이름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모은 편집본(Alphabetical Series)과 주제별로 모은 편집본(Systematic Series) 이 두 가지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편집본들에서 이야기들을 추출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은 라틴어 선집 Verba Seniorum도 존재한다. 이 책의 영향력을 증언하듯이 한국어로도 여러 가지 번역이 나와 있다. 그러나 현재 필자가 해외에 거주하면서 이 모든 번역들을 두루 검토하고 좋은 번역을 추천할 수 없는 점을 독자들께 양해를 구하고 싶다. 다만 현재 우리집 책꽂이에 꽂혀 있는 한국어 번역본은 규장에서 《깨달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인데, 이 책은 펭귄 클래식스(Penguin Classics) 시리즈의 The Desert Fathers: Sayings of the Early Christian Monks 이라는 영어 번역본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영어본은 베네딕타 워드(Benedicta Ward)가 Verba Seniorum을 대본으로 옮긴 것으로 매우 공신력 있는 텍스트이다. 하지만 규장의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영어본에 있는 워드의 뛰어난 서문은 물론, 본문도 중간 중간 적지 않게 생략되어 있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장(chapter) 순서도 뒤바뀌었는데 매우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시원한 활자와 삽화가 이정선의 영감 있는 그림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 잡고 읽고 싶게 만들며, 중간중간 묵상할 수 있는 휴지(止)다는 점에서 위로를 삼는다.


       한국은 아직 무더위가 한창이지만, 이곳 버클리는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지리산 단풍만큼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 산책길에 본 나무에 벌써 옅은 빨간 물이 흠뻑 들었다. 공지영의 책에 나오는 지리산 사람들도 그렇고 사막의 수도자들도 모두가 같은 색깔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아니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소박하면서도 참된 삶을 추구하고, 창조주가 디자인한 대로 각각 다양한 색깔의 잎사귀를 내는 사람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번 가을, 영성 고전 독서를 통해서 아름다운 삶, 순전한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기도하고, 실천하자. 그리하여 자신과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운 빛깔로 삶이라는 잎들을 물들여 가자. 우리 모두가 희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어두운 세상에서 각각 단풍빛의 장명등을 밝히는 사람이 되자. 


지리산은 그 모든 골짜기 구석구석마다 다른 빛깔로 각기 다른 사람들을 품고 있으니까 말이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26.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저자
공지영 지음
출판사
오픈하우스 | 2010-11-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망이 두려움을 넘어설 때 우리는 지리산 행복학교로 간다.어느 ...
가격비교



깨달음

저자
사막교부들 지음
출판사
규장 | 2006-10-3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진정한 깨우침을 주는 참스승, 사막의 은자들! 사막 은자들의 ...
가격비교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저자
두란노아카데미 편집부 지음
출판사
두란노아카데미 | 2011-02-0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기독교 고전의 가치, 그 풍성함을 ...
가격비교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저자
뻬라지오와 요한 지음
출판사
분도출판사 | 1999-08-14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가톨릭 신앙생활 교양서.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
가격비교



The Desert Fathers: Sayings of the Early Christian Monks (Paperback)

저자
Ward, Benedicta (EDT) 지음
출판사
Penguin USA | 2003-08-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The desert fathers provided the ins...
가격비교




Wisdom of the Desert

저자
Merton, Thomas (Author) 지음
출판사
New Directions | 1970-06-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The Wisdom of the Desert was one of...
가격비교




2012. 8. 31. 금요일. (2)

 

루이빌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다 바드타운(Bardtown)이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니 한적한 시골길이 나타났다. 앞서가는 스쿨버스가 듬성듬성 떨어진 시골집들을 다니며 아이들을 한둘 씩 내려다 주는 모습이 참 정겨워 보인다. 네비게이션은 아직 더 가야한다고 말하는데길 왼쪽으로 갑자기 수도원이 등장했다마치 펜팔로 사귀던 친구를 처음 본 것 같이 반갑다겟세마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성과 같다는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수도원에 들어가면 아내와 통화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차장에서 아내와 한참 통화를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아내와 통화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어두운 주차장을 헤매고 다닐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수도원 입구에서 평화롭게 서있는 잔디와 나무들이 마음을 열게 해주었다바람에 나뭇가지가 끊임없이 흔들린다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있으니 겟세마니에는 돌들에도 침묵이 배어있다는 머튼의 글이 이해가 가는 듯하다대신 돌멩이들은 보이지 않고 나무들이 침묵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듯하다.

 


겟세마니, 그 나무


침묵 속에 뿌리내리고

오후의 햇살을 즐기던 나무들이

보채는 바람에 못이기는 척

잎사귀를 하나씩 내어준다.

그도 메이플 나무 그늘에 앉아 

슬며시 흙 속에 발을 담군다.

발가락 사이를 지나는 시원한 침묵에

그의 발가락이 자꾸만 꼼지락거린다.


리트릿 하우스 입구를 찾지 못해 ’ 헤매었다바쁜 마음도 몰라주고 발은 자꾸만 헤매는 것이 내 삶에서 흔한 일이다. 다행히도 루이빌에 사는 필름 메이커라고 자신을 소개한 모건(Morgan)의 도움으로 리트릿 하우스 입구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 몇 번 와 본 듯 하다. 동네 아저씨처럼 마음씨 좋게 생긴 수사님이 리셉션 데스크에 앉아 있다나를 보더니 내 이름을 묻지도 않고 리트릿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아낸다그리고 한국에서 왔냐고 묻는다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많은 한국인들이 찾아 온단다이곳을 방문한 한국인들 중 두 명 정도는 누구인지 알 듯하다몇 명 있을 것이란 생각은 했는데많이 온다고 하니 의외다.



방에 도착해보니 작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욕실과 샤워부스도 딸려있고침대도 매트리스가 있다에어컨도 시원하게 나온다. 머튼이 쓴 자서전 《칠층산》에서는 수사들은 딱딱한 나무판자 위에 짚을 깔고 잔다고 하는데(아마 머튼이 살 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 여러가지가 바뀌었을 것이다.)방문객들에게는 엄격한 수행을 요구하지는 않는 것 같다이곳에 오는 방문객들은 그저 방문객들이다평생을 수도원 안에서 살고 죽기로 헌신한 수사들과는 다르다대부분이 그냥 며칠 이곳에서 쉬다가 적당히 기도의 분위기를 살짝 맛보고 떠나는 사람들이다개신교적 표현으로 그렇게만 해도 은혜를 받은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처음에 수도원 입구의 “Abbey of Gethemani”라는  표지석을 발견했을 때에 가장 먼저 저 멋진 돌을 사진으로 찍어 가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다그리고 짐을 풀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도 사진기를 들고 나가 이곳저곳을 찍어댄 것이다사진을 찍으며 내가 관광을 온 것인지리트릿을 온 것인지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빨리 사진을 찍어 버리고, 모드를 관광객에서 리트릿턴트로 바꾸자고 생각했다.

 

벧엘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으로 향했고.

요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다시스로 향했다.

머튼은 세상의 번잡함과 사악함을 피해 겟세마니로 왔다.

나는 무엇을 피해 이곳에 왔는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다리가 세워진 이곳에서

피하려고 한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저녁기도(Vespers)에 참가하는 것으로 리트릿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다사진으로만 보던 그곳, 수도원 교회 뒤쪽의 방문객들을 위해 분리된 공간에 앉았다. 수도자들이 수도원 담장에 갇힌 것일까? 내가 세상에 갇힌 것일까? 교회 천장이 꽤 높다. 그러나 화려한 대신에 트라피스트의 정신에 따라 매우 단순한 형태로 리모델링된 것이라고 한다. 수사들이 가대(歌臺)에 앉아 노래를 시작한다. 침묵을 열고 나오는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는 매우 경건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다들 연세가 많으셔서 그럴까? 랩처럼 이어지는 노래가 박자는 잘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것이 그럴 것이다. 다들 약속된 하나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고, 정해진 공통의 리듬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것이 획일적으로 통일된 집단이 아니라,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금씩 박자와 음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바로 이어지는 저녁식사. 빵과 샐러드와 스프가 준비되어 있다. 평소처럼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리다가 이렇게 먹는 것은 수도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과한 생각인 것 같지만, 왠지 수도원에서는 혀를 즐겁게 하는 드레싱 없이 소박하게 야채를 있는 그대로 먹어야 될 것만 같다고기도 없고 특별한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고요한 정원으로 향한 창 앞에서 하는 침묵의 식사는 영혼을 매우 살찌게 하는 것 같다그래도 집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제대로 하는 식사이다음식을 많이 가져온 것도 아닌데 내가 탐욕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이 된다.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는 나의 사소한 생각, 작은 행동 하나도 세심하게 돌아보게 된다. 


수도원의 식사


투명한 유리창 

너머의 고요한 정원.

소박한 나무 식탁 

위의 빵 한 조각.

달콤한 침묵

으로 드레싱한 샐러드.

영혼 깊은 배고픔

이 그릇 위에서 달그락.

비어가는 그릇

과 함께 비워지는

머릿속의 수다.

 

식사 후 방문객책임자(Guestmaster)의 오리엔테이션이 있었고, 이어서 머튼 학회 리트릿 참가자 모임이 따로 열렸다. 모든 참가자들의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는데, 낮에 리셉션 데스크에 있던 수사님이 내 이름을 쉽게 찾아낸 이유를 알 것 같다동양인은 나뿐이다그리고 대부분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이다이후 겟세마네 수도원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대교의 안식일 기도(Sabbath Prayer)가 진행되었다참가자 중에 에드워드 카프란(Edward Kaplan)이라는 유대인 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금요일 저녁 안식일을 시작하는 유대인 식사 전의 기도를 인도하였다색다른 경험이었다노래와 주기적인 기도가 삶의 리듬를 형성하는 유대교의 삶이 수도원의 삶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문에 리트릿 프로그램에 이 순서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앞줄에 앉아 있다가 엉겁결에 유대인들의 모자인 키파(kippah)를 얻었다모임이 끝난 후 서로 반가워하며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소외감을 맛본다. 언어의 문제도 있지만, 소심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주삣거리다가 도망치듯 주차장으로 빠져나왔다.

2012. 8. 31. 금요일. (1)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서둘러 호텔을 나왔다무엇이 마음을 이리 보채는지 모르겠다오늘은 헤매지 않고 벨러마인 대학교에 도착했다. 토마스 머튼 센터에서 논문을 두 편 요청해서 읽었다사실은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학교 도서관 저널 섹션을 뒤지면 구할 수 있는 글들인데딱히 다른 볼 것이 생각나지 않아서 공부하는 셈 치고 읽었다수도원에서의 환대(hospitality)와 공동(cenobitic) 생활에 대한 글들인데, 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오늘 겟세마네 수도원에서의 리트릿을 위한 사전학습으로도 좋은 듯하다. 


열람실의 테이블에 혼자 앉아 고요를 즐기고 있는데, 조금 뒤 한 젊은 여성이 센터장 피어슨 박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다. 그녀도 센터에 들렸다가 오늘 있을 리트릿에 참가하려나보다. 그런데 얼굴과 목소리가 낯익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작년 여름 시카고의 머튼 학회에서 만난 나탈리(Natalie)이다그때 내가 공부하는 학교의 석사과정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했는데지난 1년 동안 버클리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다시 이 먼 곳루이빌에서 만났다재미있다.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가던 이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머튼이라는 인물은 죽어서도 사람들을 이어준다. 심지어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말이다. 토마스 머튼, 머튼 센터, 겟세마니 수도원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길이 만나는 넓은 광장이다.


점심 시간을 조금 넘긴 후,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옮겨 가기 위해 머튼 센터에 작별을 고했다아마 이것이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지 않을까여행 경비를 아끼기 주차장에서 머핀 하나와 사과 하나그리고 과자 조금으로 점심을 때우고 루이빌을 떠나 수도원이 위치한 뉴 헤이븐(New Haven)으로 차를 몰았다약 한 시간의 거리평소 집에서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갈 때 하듯이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귀를 영어에 좀 더 익숙하게 하기 위해이다. 음악보다 말이 많이 나오는 채널을 찾았다수도원에 가서 리트릿 참가자들과 며칠 동안 영어로 대화해야하는 것이 좀 부담이 되었다정신이 산만했다갑자기 침묵을 수행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가면서 영어로 말하고 들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디오를 끄고 묵상하며 가기로 했다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2012. 8. 30. 목. (2)


토마스 머튼 센터가 문을 닫는 오후 5시를 몇 분 남겨두고, 나도 읽고 있던 책을 닫았다. 담당자에게 대여한 자료들을 반납하며 내일 다시 올 것이라는 인사를 남긴 뒤 루이빌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책에서도 여러 번 읽고, 나도  논문에서 몇 번 언급하였던 그 유명한 'Fourth & Walnut 거리'를 가보기 위해서이다. 


이곳은 1958년 3월 18일, 머튼이 세상을 버리고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간지 약 16년 3개월 만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 오고 화해를 이룬 곳이다. 이날 머튼은 출판과 관련한 수도원의 공무로 지역의 출판업자를 만나기 위해 루이빌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가 상점들이 밀집된 Fourth와 Walnut 거리의 모퉁이에 서 있을 때 그에게 신비한 환상이 일어났다. 머튼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게들을 드나드는 것을 볼 때에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고 있고, 그들과 자신이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신비한 깨달음에 휩싸였다. 1958년은 머튼의 인생에서 전기작가들이 "세상으로의 귀환"이라고 부르는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 시기이고, 이날 Fourth & Walnut에서의 환상은 그 전환의 굵직한 획을 긋는 체험이었다. 지금은 Walnut Street가 Muhammad Ali Boulevard로 도로명이 바뀌었지만, 이곳은 지금도 많은 머튼 연구자들과 독자들이 찾는 곳이다. 차를 몰고 가는데, 그곳에 서면 머튼의 경험과는 똑같지 않아도 나에게도 어떤 신비한 체험이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은근한 기대가 맘속에서 몽실몽실 피어 올랐다. 


벨러마인 대학교에서 루이빌 다운타운까지는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평일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거리는 한산했다.  "Merton Square"라는 표지판과 머튼 관련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는 안내 표지판, 그리고 머튼의 미소짓는 얼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는 석조조각이 머튼 대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 서는데, 드디어 이곳에 왔다는 잔잔한 감격과 함께 약간 생경한 느낌이 밀려왔다. 머튼 광장은 책에서 읽던, 그리고 은연 중에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현대화되어 있었다. 4번가는 "4th Street Live"라는 이름으로 공연과 외식 등 각종 유흥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고, 지나가는 전차의 모습을 한 버스 외에는 옛날의 모습을 추측하기가 힘들었다. 그랬다. 머튼의 루이빌 환상(Louisville Epiphany)이 일어난 지 벌써 반세기도 넘게 지났는데, 이 거리가 여전히 그때와 똑같은 또는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걸 알면서도 난 왜 그런 기대를 갖고 있었는지……. 이렇게 때론 아는 것과 바라는 것은 서로 다를 때가 많다. 그것은 이런 장소뿐만이 아니라, 사람, 사건 등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해 기대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 기대가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적지 않게 아쉬워하곤 한다. 오늘도 역시 이 거리에서 '관광 명소'를 알리는 안내판과 조형물 외에 54년 전 머튼의 발자국도 남겨지지 않고, 나에게 강력한 신비체험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좀 서운해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장소에 서 있다는 감격에 비하면 아쉬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은 토마스 머튼이란 영적 거장은 들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듯이 안내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쁜 걸음을 옮겼다. 오히려 그 안내판과 조형물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고 있는 한 동양인이 무안을 느낄 정도였다.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 옛날 머튼이 서있었을 것 같은 거리 모퉁이 한 켠에 조용히 한동안 서있었다.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머튼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있어서 그랬을까? 비록 그가 경험한 것과 같은 강렬한 체험은 없었으나, 그래도 왠지 지나가는 이들이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약 오 년 전 한국에 있을 때 집근처의 번잡한 교차로에서 건널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우주의 행성들이 창조주의 뜻과 계획 속에서 질서있게 움직이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나의 우주 속에서 하나님께 속하여 살고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은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었던 때가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각자의 궤도를 따라 여행하고 있는 사람들, 여기에도 그런 사람들이 우주를 떠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