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설교」(2018년 7-8월)에 게재된 글을 옮겨 놓는다. 이 글은 몇 년 전 산책길 기독교영성학당에 게재했던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슬퍼하는 자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윤동주의 〈팔복〉 그리고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
성경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기도 하고, 또한 많은 문학작품을 낳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영적 통찰과 교훈과 체험을 담고 있다(딤후 3:16). 그래서 성경은 열린 마음과 진지한 자세로 말씀을 읽는 독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독서를 통한 새로운 영적 체험이나 통찰로 인도한다. 같은 구절이라 하여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른 해석과 적용을 낳는다. 또한 같은 구절을 같은 사람이 읽어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항상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읽는 시기에 따라 다른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언제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예리한 칼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찔러 쪼갠다(히 4:12).
이 글에서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을 읽고 각각 다른 체험을 한 두 사람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는 성경 《메시지》와 에세이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등으로 유명한 목회자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시다. 피터슨은 주로 산문으로 된 책을 써왔지만, 2013년에는 《거룩한 행운》(The Holy Luck)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가 번역한 《메시지》가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피터슨이 시집을 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진 피터슨의 시집 《거룩한 행운》은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우러난 여덟 편의 시들의 모음이다. 그리고 2부 “바스락거리는 풀”(The Rustling Grass)에는 창조세계 속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시들이, 3부 “부드러운 돌들”(Smooth Stones)에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1부의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행운의 슬픈 자〉(The Lucky Sad)다. 그런데 제목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슬픈 사람’은 ‘불행한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시인은 이 시의 제목에서부터 그 통념을 뒤집고 있다. 이것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슬픈 자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지 이제 그의 시를 직접 읽어 보자. 먼저 영어 원문으로 인용하고, 그 다음에는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한국어로 옮겨서 소개한다.
The Lucky Sad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lash floods of tears, torrents of them,
Erode cruel canyons, exposing
Long forgotten strata of life
Laid down in the peaceful decades:
A badlands beauty. The same sun
That decorates each day with colors
From arroyos and mesas, also shows
Every old scar and cut of lament.
Weeping washes the wounds clean
And leaves them to heal, which always
Takes an age or two. No pain
Is ugly in past tense. Under
The Mercy every hurt is a fossil
Link in the great chain of becoming.
Pick and shovel prayers often
Turn them up in valleys of death. 1
행운의 슬픈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눈부신 눈물의 홍수, 그것들의 급류가
잔인한 협곡들을 침식시켜 오래 잊혀진
인생의 지층을 노출시킨다
평화로운 세월들 속에 눕혀진
악지(惡地)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를
황야의 작은 협곡과 평평한 언덕의
색깔들로 칠하는 바로 그 태양이 또한
비탄의 모든 오랜 상흔과 상처를 보여준다.
울음은 상처들을 깨끗이 씻어서
치료하기 위해 놓아두는데 치유엔 항상
한두 세대가 걸린다. 과거 시제로는
어떤 고통도 흉하지 않다. 신의 자비
아래에서 모든 상처는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연결고리가 되는 화석이다.
기도는 종종 죽음의 계속에서
그것들을 찾아내는 곡갱이와 삽이다.
- 유진 피터슨.
혹시 이 시를 읽을 때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이 있는가? 필자는 여행 중에 본 북미의 붉은 협곡과 사막이 눈앞에 떠올랐다.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이다. 이런 협곡들의 옆면은 마치 칼로 잘려진 것과 같은데, 거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지층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화가의 팔레트의 한 부분 같은 다채로운 붉은 색깔들을 띠고 는데, 특히 해질녘 석양이 비칠 때면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난다. 아마도 유진 피터슨은 팔복의 한 구절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협곡들 그리고 황야의 붉은 언덕들이 가지고 있는 지층과 그 속에 오래 간직된 화석들에서 이 시의 영감을 얻은 듯하다.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화석에 과거의 상처를 비유하고 있다. 물론 이 상처는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고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다. 협곡을 침식시킬 만큼 거대한 급류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비추는 빛 속에서, 곧 오늘의 일상 속에서 빛에 의해 그 상처가 조명되고 있다. 이때의 빛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신의 자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자비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Mercy) 아래에서 그 상처는 과거의 화석이 된다. 그리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연결고리”가 된다. 곧, 하나님의 자비로 상처가 치유될 때, 그 아픔과 슬픔을 통과하여 보다 온전한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슬픈 자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이다. 눈물을 통해서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어 온전하게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를 “죽음의 계곡”에서의 발굴 작업을 위한 “곡괭이와 삽”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에는 빛이시며,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읽을 시는 그렇지 않다. 비록 같은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앞의 시가 희망으로 빛나고 있다면, 뒤의 시는 절망으로 매우 어둡게 그늘 지워져 있다. 그 시는 윤동주의 〈팔복〉이다.
팔복 (八福)
-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윤동주
이 작품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다. 제목은 〈팔복〉, 곧 여덟 가지의 복인데, 시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중에 두 번째 복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다. 곧, 슬픔이 다른 일곱 가지 복을 모두 잡아먹어 버렸다. 그것도 원래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시인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 특히 이 시의 자필 원고를 보면, 원래 시인은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라고 썼다가, “오래”라는 말에 가운뎃줄을 긋고 “영원히”라는 말로 고쳐 써넣었다. “오래”와 “영원히”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래 슬픈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그 슬픔이 사라질 여지가 남아 있지만, 영원히 슬픈 사람에게는 그 여지마저도 없다. 시인은 그만큼 끝이 없는 절망에 빠져 있다.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때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0년 12월 무렵이었다. 이 사실은 시인이 왜 이렇게 거대한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신에 대한 불신과 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일까? 이러한 관점으로 이 시를 해석한 연구자들이 있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문자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 의미보다 더 깊은 사고와 정서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이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히브리 문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한나 크론펠트(Chana Kronfeld)에 의하면 억압당하고 한정된 인간이 “권위 있는 텍스트를 급진적으로 고쳐 쓰는 것은 때때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방식이다.” 비슷하게 힘없는 식민지 청년이었던 시인 윤동주는 위로에 대한 성서의 말들을 급진적으로 개정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자신과 독자들의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을 하나님께 표현하였다. 그가 진정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믿었다기보다는 성경에서 약속된 위로의 복을 영속적인 슬픔에 대한 기대로 바꿈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처한 심각하게 슬픈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비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시는 절망 가운데 부르는 비탄의 노래다. 비록 ‘기도’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절박한 기도다. 거대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역설적인 간구다.
이것은 윤동주가 비슷한 시기에 쓴 〈위로〉라는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병원 뜰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한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젊은이는 거기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보게 되는데, 그 나비는 거미줄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린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가 다가와 나비를 줄로 칭칭 감아 버리자, 이 사나이는 한숨을 내쉰다. 이에 시적 화자는 이 젊은이를 가엽게 여기고, 위로하고자 한다.
“나[歲]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윤동주, 〈위로〉 3연.
재미있는 것은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라고 했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만큼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강력한 구원과 위로의 행동이 없다. 거미줄을 헝클어뜨림으로써 화자는 나비를 구원한다. 비록 화자가 직접 젊은이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한숨을 쉬며 체념하던 젊은이는 나비가 놓임을 얻는 것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동주가 〈팔복〉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성경의 메시지를 뒤집어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표현한 것은, 〈위로〉에서 시적 화자가 거미줄을 뒤헝큰 것과 비슷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은 슬픈 자기 민족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구원할 수는 없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처럼 성경의 텍스트를 급진적으로 고쳐 쓰는 시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팔복〉은 동족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의 시’이자 역설적인 ‘위로의 시’다.
그렇다면, 같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행운의 슬픈 자〉와 〈팔복〉은 왜 이렇게 다를까? 그것은 시인의 위치 때문이다. 〈행운의 슬픈 자〉에서 슬픔은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처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그 상처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팔복〉의 시적 화자는 그 상처, 아니 상처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그 절망과 슬픔의 한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한 가운데에서는 ‘지금의 아픔이 나중에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라는 식의 해석에는 위로를 얻지 못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나아가 해야 하는 일은 우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맹목적인 긍정의 옷, 또는 이론적인 희망의 옷을 입히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개념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때에, 그 기존의 개념을 ‘헝클어뜨리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할 때에 그 기존의 개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설적인 ‘믿음의 행동’이다. 현실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자신을 책망하시기보다 긍휼히 여기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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