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최초로 누린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이다. 창세기에는 아담이 땅 위의 짐승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세기 2:19-20a)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름 짓기이야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역할과 태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동물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서 붙일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한낱 피조물인 아담에게 맡기셨다. 아담이 자발적으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만나는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동물들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다. 그가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말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권유하시지 않으셨을까? 아담, 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겠니?

 

성서학자들은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아담의 이름 짓기의 의미를 그 앞 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명령과 연관시킨다. 하나님은 땅의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신 후에 흡족하게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6-28).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최초로 한 행위는 그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새와 짐승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사람은 창조주로부터 그 동물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는다. 많은 피조물들 가운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살도록 지음받았다는 말과 같다. 아마도 하나님은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너희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이 나를 대리하여 너희를 다스릴 것이란다.

 

그런데 이름을 짓는 것은 단순히 권한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야기(19-20)가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인 것을 애처롭게 여기시고 그에게 배필을 만들어 주신 이야기(18-25) 안에 들어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가 아니라 그 아내와 관계를 맺고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어 살아가도록 뜻하셨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과도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의도일 것이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여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명명식(命名式)’을 눈앞에 그려보면,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아담은 자신에게 온 동물들을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보며, 손으로 어루만지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동물들에게 부여하신 그들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 그렇게 지어준 이름들 하나하나에는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향한 그의 애정이 담겨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 이름들을 부를 때마다 그의 마음에서 애정이 솟아났을 것이라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아담이 그렇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께서도 매우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행복해 하셨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들에게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붙임으로써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전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창조의 동역자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와 동역자로서 이 땅을 사랑과 정성으로 다스릴 사명이 있다.

 

이렇게 동물들의 이름은 아담이 지어 주었지만,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 주셨다. 앞서 인용한 창세기 126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담”(adam)이다. 히브리어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의 이름으로서 고유 명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하는 보통 명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기 이전에, 당신의 마음에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때부터 그 존재를 이미 아담이라고 명명하셨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의 이름을 따라서 아담’(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아담/사람이라는 이름에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딸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시편 8:4-8/새번역)

 

그리고 시인은 이어서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9)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에는 경이에서 솟아나는 창조주를 향한 깊은 경외심과 탐구심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름을 지으셨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을 권한이 없다. 다만, 이렇게 여쭈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32:29a). 또한,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3).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32:29b)라며 그 요청을 거절하시거나, 그저 나는 나다”(3:14)라고 대답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숨기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YHWH)라고 알려주셨다(3:16, 6:2).

 

그리스-로마 종교의 제의에서 사용된 기도문을 살펴 보면, 기도자는 자신이 청하는 신의 이름을 거창한 수식어를 사용하여 부르며, 사실상 그 신을 설득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20:7), 그 이름을 불러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로는 네 글자(YHWH)로 기록하면서도, 입으로는 직접 발음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주님(adonai)’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사실상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소리는 추정할 뿐,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우리에게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하나님을 소유하거나 조종할 수는 없고, 다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께 온전히 소유될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태초부터 시작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사람(아담) 사이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그분께 속한 존재로서 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이다. 이것이 영성 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신다(33:7).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의 근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간혹 경우에 따라 익명성 속에 숨고 싶을 때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아 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하는 욕구가 존재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확인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김춘수 시인은 잘 알려진 「꽃」이라는 시에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노래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사랑으로 불리고 존중받을 때 커다란 행복을 얻는다.

 

 

반대로 이름을 박탈당할 때, 또는 이름이 조롱당할 때 사람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깊은 모멸감과 고통을 겪게 된다. 미국 한인 이민사는 그러한 고통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9031월 하와이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 노동자로 모집되어 간 102명의 한인 이주자들은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렸다. 그들이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했던 식별 카드(identification card)에 적힌 번호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이었다. 농장주들을 그들을 사람이 아니라 생산 수단으로 취급하여 짐승처럼 구타하고 착취하였다.[1] 이러한 비정체성(non-identity)의 경험은 그들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은, 일본 유학을 위한 증서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며, 이름을 박탈당하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시로 남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참회록」, 부분)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박탈당함으로써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받지 못하고 좋은 자녀’, ‘좋은 학생’, ‘좋은 ○○등과 같은 미명으로 타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의 고통은 자신의 참된 이름을 찾을 때, 또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애정을 가지고 불러줄 때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나를 만드신 하나님일 때 우리 삶은 궁극적인 의미를 얻고, 더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참된 이름은 나의 신분증에 기록된 이름 몇 글자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에 새겨진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듣기까지 나의 이름은 비밀로 남아 있다. 그 비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왕상 19:12-13). 그리고 그 이름 속에 담긴 진리를 들은 자만이 자신의 이름을 삶으로 살아 낼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의 감리교 목사이자 작가인 테드 로더(Ted Loder)는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이 시가 자신의 기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침묵 가운데 제 이름을 지어 주소서

 

제가 지어 붙이는

어떤 이름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거룩한 분이시여,

침묵 가운데

제 이름을 지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당신께서 제 안에 두신

진리를 들으며,

당신께서 저를 향해 품으신

사랑을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께서 부르신 대로

당신의 인류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그 사랑을 살아 내게 하소서.[2]

 


[1] 서광운, 『미주한인칠십년사』(서울: 해외교포문제연구소, 1973), 27-30.

[2] Ted Loder, Guerrillas of Grace: Prayers for the Batt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4), 30.

 

「빛과소금」 2024년 6월호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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