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적 평범성에서 이타적 일상성으로

 

“어, 공이 어디 갔지?”

여름 휴가를 맞아 아이를 데리고 글램핑을 갔다. 아이는 캠핑을 하고 싶어 했지만, 아무래도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은 캠핑보다는 필요한 것들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는 글램핑이 훨씬 수월했다. 우리가 간 곳에는 놀이나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공용 물품들이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는데, 아이는 그 중에서도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전날 오후에 가지고 놀던 공이 다음날 아침이 되니 감쪽 같이 사라졌다. 아이와 함께 원래 공이 놓여있던 보관함은 물론 글램핑장 구석구석을 찾아 보았지만 공은 사라지고 없었다. 할 수 없이 다른 놀이를 하고 있는데, 조금 뒤에 어떤 다른 가족이 숙소에서 나와서 공놀이를 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노는 것은 우리가 찾던 바로 그 공이었다. 그제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 가족은 전날 저녁에도 그 공을 가지고 놀았는데, 아마도 공을 밤새 자기 숙소에 보관하고 있다가 아침에 다시 가지고 나와서 노는 것 같았다. 공용 물품을 마치 자기 것처럼 독점하고서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없이 즐겁게 웃으며 아들과 노는 아빠를 보니 마음이 씁쓸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는 이와 같은 이기적인 모습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면 그 이기심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출간된지 거의 반백 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 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쓴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이다. 이 책에 의하면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이기적 존재이며, 그 유전자가 빌리고 있는 인간의 몸은 유전자가 살아남아 계속 운반되기 위해 진화를 통해 만들어낸 생존 기계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주인은 유전자이며, 인간은 죽어도 유전자는 복제를 통해서 계속 이어진다.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이 유전자가 실제로 이기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품을 최대한 많이 퍼뜨리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은유적인 표현인지는 사실 불분명하다. 어쨌든 도킨스의 도발적인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이기심은 생존을 목표로 경쟁하는 유전자의 본래적 속성, 또는 그러한 속성이 빚어내는 현상에서 기인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오늘날의 ‘신무신론’(新無神論), 곧 ‘종교, 또는 신에 대한 가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반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일련의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창조주나 신의 계획이나 섭리를 배제한 채 철저히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생명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창조주의 뜻에 따라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진화를 통해 우연히 발생한 생존 기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이나 자연 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검증하려는 시도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과학적 방법론이 신비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없이 부족할 뿐이다.

 

서방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로 불리우는 아우구스티누스(Augnustinus of Hippo: 354-430)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중세로부터 전해진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닷가를 걸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당시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On the Trinity)》를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한 분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세 분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때 그는 우연히 한 작은 아이를 발견하였다. 그 아이는 바닷가의 모래에 작은 구멍을 파고서, 작은 조개껍질(또는 숟가락)로 바닷물을 퍼다가 그 구멍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잠시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자신은 바닷물을 전부 떠다가 모래 위의 작은 구멍에 넣으려고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반응하였다. “뭐라고? 그것은 불가능해. 확실히 바다는 너무 크고, 구멍은 너무 작아.” 그러자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맞아요.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한정된 이해력으로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찰하는 데 성공하는 것보다는 제가 바닷물을 모두 다 떠서 구멍에 부어 넣는 것이 더 쉬울 거예요.” 이 말에 놀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몸을 돌려 그 아이를 바라보았더니 그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제한된 이해력으로 신비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중세만이 아니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극히 부분적이라 할라도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모두 헛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복잡해지지 않도록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간단하게 한 가지만 언급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이실 수 있는 이유는 세 위격이 서로 이기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자신을 내어 주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인해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곧 하나님의 상호침투(또는 상호내주)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이기적이지는 않았다. 삼위일체, 곧 사랑으로 하나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 1:26) 만드신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본질적으로 이타적인 존재였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자신의 사랑이 자신만을 향하여 좁은 ‘자기’의 경계 속에 갇혀 있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를 닮아 그 사랑이 ‘나’의 경계를 넘어 타자를 향해 즐겁게 범람하는 이타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했던(창 3:5), 곧 더 이상 하나님께 사랑으로 종속되고 연합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독립하여 대등하게 경쟁하는 존재가 되기를 욕망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사람은 창조시에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곧 자신의 한계를 넘어 타인에게로 흘러 넘치는 사랑을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상태로 원죄(original sin)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는데, 토머스 머튼(1915-1948)은 그것을 사람이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라 통찰한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1948)의 첫 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15년 1월의 마지막날, 물병자리 별빛 아래에서, 큰 전쟁이 치뤄지던 해에, 스페인이 국경에 인접한 프랑스의 산맥 어느 기슭에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본성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유로웠으나, 내가 태어난 세상의 형상을 따라 나 자신의 폭력과 나 자신의 이기심의 죄수였다.”[1] 

 

머튼에게 있어서 사람이 원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은 이기심의 감옥에 갇힌 죄수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그의 다른 표현을 인용하면 “거짓 자아(false self)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이다.[2]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생존을 목표로 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로 인해 발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물학적인 유전자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기적인 유전자’이다. 그리고 구원이란 바로 그 죄의 사슬을 끊고 이기심의 감옥에서 놓임을 얻는 것이며, 거짓 자아의 가면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참 자아(true self)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 이러한 영적 해방과 회복은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랑이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다. 그러한 완전한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신 하나님이 아니면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께 듣고 우리에게 전한 말,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요일 1:5)는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이기심이 전혀 없다.”는 표현으로도 바꾸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요일 4:8 참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의 몸으로 이땅에 오시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구원이 이기심의 감옥에서 놓임을 얻는 것이라면,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은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적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을 얻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도 이기적인 모습들이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배당 안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성경책을 아예 ‘자기 자리’에 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비치용 성경책을 자기 집에다 비치해 두고 읽는 사람들도 있다. 예산을 배정하거나 사역을 할 때에 자기가 속한 부서나 그룹의 이익을 우선시하기도 하고, 부서장을 임명하거나 사역을 배분할 때도 자신이 좀 더 유력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경쟁하고 은밀히 담합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에 두는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한 번, 사도 요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요한에 의하면, 우리가 교회로, ‘성도의 교제’로 부름을 받은 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요일 1:3). 그런데, 만약 우리가 ‘나는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요일 1:5-6).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제대로 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어둠의 일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거짓에 대한 요한의 처방은 이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 1:7/새번역).

 

빛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어두운 일들을 내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이 탄식한 것처럼(롬 7:24) 당위나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다. 지하 감옥과 같이 좁고 어두운 우리 마음의 창문을 열어 전적으로 이타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마음 깊은 곳을 구석구석 비추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이기심의 감옥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어 빛이신 하나님의 사귐 속에 거할 수 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상호 침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속에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욕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이상 내가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나의 안전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게 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요일 4:18).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사귐을 통해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충만한 기쁨을 우리 또한 누릴 수가 있다(요일 1:4).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글램핑장에서 보았던 아빠는 아들과 함께 놀면서 그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가 만약 공용물품을 독점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쓰는 기쁨을 알았다면, 제한된 자원을 자신들만 누리는 차가운 기쁨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며 함께 누리는 따뜻한 기쁨을 아이도 알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1] Thomas Merton, The Seven Storey Mountain(FL, Orlando: Harcourt Brace & Company, 1948), 3.

[2]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New York: New Directions, 1962), 33.

 

「빛과소금」 2024년 9월호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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