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남한산성 영락수련원의 전기가 일부 나갔습니다. 전신주에 앉았던 까마귀가 감전되어 죽으면서 정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긴급 출동한 한전 기사님들 덕분에 한두 시간 후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지만, 저의 어두워진 마음은 곧바로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편리한 삶을 위해 세워놓은 문명의 시설에 생명을 잃어버린 산속 까마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기도드렸던 시편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편 147:8-9)

한 여름 태양이 대지를 뜨겁게 달굴 때, 하나님은 하늘을 구름을 덮으시고, 땅에 비를 내리십니다. 그 비가 땅에 스며들어 산에 풀이 자라고, 들짐승들은 그 풀을 먹고 삽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적인 현상이지요.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덩치가 큰 짐승들뿐만 아니라 배고파 우는 조그만 까마귀 새끼도 애처롭게 여기시고, 그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신다고 노래합니다. 물론 이것도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까마귀 새끼가 이슬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도 무언가를 먹습니다. 그리고 그 먹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하며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눈으로 보면 다릅니다. 시편 147편을 기록한 시인은 일반적인 자연 현상을 주목하여 보고, 시로 표현함으로써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 보입니다. 그리고 작은 까마귀 새끼의 울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주님의 자상하고 세심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눈은 오직 전문적인 시인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영락교회 제2여전도회의 회지는 ‘비전’이라는 제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비전’(vi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비시오’(visio)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비시오는 시각, 시력, 지각, 계시, 환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여성 명사입니다. 라틴어 명사는 성(性)을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의 성을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보통 남성보다 여성들이 더 잘 보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쌓이는 먼지, 가족들의 옷에 달랑거리는 단추, 시들어가는 화초 …. 사랑과 관심이 없으면 볼 수 없는 작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군부대 교회를 방문해도 젊은이들의 필요를 아마 더 잘 발견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매달 〈비전〉을 만들고 읽으시면서, 제2여전도회 회원님들의 눈이 더 밝아지시길 바랍니다. 지난 한 달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며 사랑과 관심이 더 깊고 넓어지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는 까마귀 새끼도 애처롭게 여기시는 어머니 하나님의 아름다운 눈을 닮아 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제2여전도회를 이번 달 제 기도에 담습니다.

 


영락교회 제2여전도회 월례회보 〈비전〉 2022년 7월호에 실은 권두언을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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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지금 저는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 가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4박 5일 동안 한남대학교에서 포이메네스 목회자 영성수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 할 일이 많은 데다가 이번 주는 출장(?)으로 거의 한 주를 비워야 하기 때문에 틈틈이 이것저것을 하리라 마음먹고 아내의 노트북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서울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속에서 갑자기 깨달음이 왔습니다. 파우치에 잘 담아놓은 노트북을 정작 여행용 가방에는 넣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단지 어댑터만 휴대폰 충전기와 사이 좋게 가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기차에서 노트북으로 권두언을 쓰는 것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앞만 바라고 멍하게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좌석 등받이에 꽂힌 KTX 매거진의 표지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천의 한 숲길이었습니다. “맞아, 어머니의 고향이 김천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서 저의 머릿속에 한 소녀가 김천의 숲길을 걷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가 아가씨일 때의 모습은 흑백사진이 남아 있어 본 적이 있지만 어린 시절의 모습은 전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장면은 그저 꿈결 속처럼 희미했습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아마 어머니께 여쭈어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시겠지만 그것은 매우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뿐이겠지요. 특히 유아 시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이글을 읽으시는 4여 회원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요즘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부모님들이 아이의 사소한 일상까지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두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아이들의 어린 시절 전체가 아니라 단편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어린 시절 전부를 정확히 기억에 간직하고 있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 형질이 이루어지던 때부터 그리고 장차 우리가 늙어 죽을 때의 모습까지 그 기억 속에 간직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기억은 과거를 돌아볼 뿐이지요.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과거와 미래 모두 현재형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모든 일생이 하나님의 기억 안에 생생하게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기억 안에서 여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매우 불안정하고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여행을 하다가 보면 종종 두려움이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의 기억, 또는 생각 안에서 하는 여행은 비록 우리 앞에 놓인 것이 미지의 세계, 불확실한 미래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각하시며 돌보시는데(시 8:4), 그 생각이 많아 셀 수가 없으며(시 40:5), 매우 깊으시다고(시92:5) 노래합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많은 생각, 그분의 기억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세심한 돌보심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4여전도회 회원님들과 함께 듣고 싶은 노래가있습니다. 우리 교회 갈보리찬양대 솔리스트이신 소프라노 한나형 님이 부르신 “여정”이라는 곡입니다. “나의 눈가에 주름이 지고, 어느새 눈물이 많아 졌습니다. 잠시 눈 감고 뜬 것 같은데 어느새 여기 있습니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곡은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 여정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나의 삶이 마치는 날까지 앞으로의 여정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또한 여러분들의 노래가 되시길 바랍니다. 

 

곧 기차가 대전역에 도착합니다. 이제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 것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영락수련원이 아니라 지역에서 하는 첫 번째 포이메네스 영성수련이라는 미지의 승강장에 발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기억 안에서 새로운 여정을 걸어갑니다.


영락교회 제4여전도회 월례회보 〈섬김〉 2022년 7월호에 실은 권두언을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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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 읽기 |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 하시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 묵상하기 | 
 

 

이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산을 내려와 다른 제자들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매우 딱한 처지에 놓인 아이와 그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그들이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지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무리들에게 둘러 싸여 서기관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제자들이 매우 ‘딱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보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시며, 한탄하셨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그들을 떠나셔야 하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그 믿음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답답하셨던 것입니다. 


앞서 마가복음 6장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둘씩  둘씩 마을로 보내시며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신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나가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산 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은 그 가련한 아이를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두고 쩔쩔매던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도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의 딱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도와주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질책과 비난을 면치 못하는 '딱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그런 꼴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말씀으로 묵상하고 기도하실 때 상상력을 사용하여 본문 속으로 들어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온 세 사람이나 산 아래에서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던 제자들 중 마음에 더 와닿는 입장이 되어 주님과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 기도하기 | 

 

 

| 바라보기 | 

 

 

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 읽기 |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


| 묵상하기 |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나타났던 놀라운 장면이 지나간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방금 본 것을 당신께서 부활하실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선포해야 할 때는 바로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질문하다가 답을 찾지 못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왜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말합니까?”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얼핏보면 이 두 질문은 서로 상관이 없는 질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질문 속에는 여전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예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제자들의 저항이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당대의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었던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을 또한 서기관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을 참조하면, 제자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것은 말라기 4장 5-6절은 물론 유대 문서인 집회서 48장 10절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당신이 심판날에 와서 하느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 분노의 불을 끄고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회복시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대와 상충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주님은 엘리야, 곧 세례 요한이 이미 왔음을 말씀하시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는 예언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혹시 나에게도 이런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 내게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또는 주님께서 아직 내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내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뜻과 상충되는 나의 뜻이나 욕구가 있습니까?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성찰해보고 주님과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 기도하기 | 

 

 

| 바라보기 | 

 

 

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 읽기 |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 묵상하기 | 
 

 

앞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이어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야하는데, 그러한 이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게 될 이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이 구절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변화산 사건을 뜻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이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당시, 제자들과 무리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당시에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두고두고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각각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죽음을 눈앞에 둔 것과 같이 힘겹고 어려운 때를 만나면, 이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기를 기다리고, 사모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자신들이 경험한 어떤 일이 바로 그것이라며 가슴 벅찬 감사와 감격에 젖어 끝까지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의 어떤 사건을 통해 임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에게 권능으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과거의 제자들과 무리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 복음서를 읽고 있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이 말씀이 나의 마음에 어떻게 들립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가만히 귀 기울여 보고, 주님께 응답해 봅시다.

 

| 기도하기 | 

 

 

| 바라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