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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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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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율법에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지만, 이혼이 가능한 조건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신명기 24:1-4). 그래서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은 이혼 자체의 타당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혼의 타당한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 곧 이혼이 옳은 것인지 물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옳지 않다.’고 대답하면 그것은 율법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고, 반대로 ‘옳다.’고 대답한다면 비인간적이거나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러한 질문은 진리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명령하였느냐?”라는 역질문으로 응수하신 뒤에, 원래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면 안되지만, 모세의 명령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서 허용한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명령한 것은 이혼을 장려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남성들이 아내를 함부로 대하거나 버리지 못하도록, 곧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허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시험의 주도권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무지나 이단성을 드러내기 위해 질문을 던졌지만, 결국 밝혀진 것은 그들의 완악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는 일반적인 법칙은 아닙니다. 주님은 성경 다른 곳에서 예외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는 이혼을 허용하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마5:32). 예수님의 요점은 자신의 배우자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으로 여기고 아내나 남편에게 신실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이혼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는 내 마음속 생각이나 감정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정직하게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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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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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에는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10:32) 가시는 중에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 오신 후 가버나움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이제 그곳을 떠나 새로운 여행길에 오르셨습니다. 주님과 그 일행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입니다. 어떤 고대 사본과 마태복음은 이곳을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마 19:1)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주님께서 가시지 않았던 새로운 장소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리 새롭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다른 곳에서 하시던 대로 그곳에서도 모여든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 곧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던지며 시비를 걸었는데, 이 또한 이전의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새로운 여행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가셨지만, 그곳에서도 이전에 다른 곳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일들이 비슷하게 반복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매일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매년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삶에는 어제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올해의 삶에도 작년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일상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밤이면 잠을 자고, 아침이면 눈을 뜹니다. 그리고 하루 세 끼 식사를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주일이 되면 예배를 드립니다. 새로운 학교나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는 새로움과 반복이 서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한 걸음씩 목적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행을 떠나 길을 갈 때 새로운 장소에서도 이전과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여행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일상에 매몰되어 여행의 방향을 잃지도 않으셨고, 머물러야 할 때 머물렀으며, 길을 떠나야할 때 떠나셨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도 당신께서 하셔야 하는 일을 이전처럼 정성껏 행하셨고, 그곳에서도 반대나 어려움을 만나도 당황하거나 회피하지 않으시고, 담담하게 맞으셨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머물러야 할 때 멈추고, 떠나야 할 때 과감히 길을 떠납니까? 새로운 시간, 새로운 장소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반복되는 일상을 수행하며, 일상 속에서도 매몰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날마다 나아갑니까?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에 정직하게 응답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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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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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은 소금과 관련된 세 가지 말씀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각각 다른 상황에서 하신 말씀들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가는 ‘소금’이라는 공통된 주제어로 이 세 가지의 말씀들을 연결해 두었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레 2:13, 겔 43:24). 아마도 제물이 부패하여 변하는 것을 소금이 방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금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변하지 않는 언약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를 참조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먼저 49절의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바로 앞 구절의 지옥에 대한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이 소금이 쳐진 채로 불에 태워지는 것처럼, 지옥에서는 그곳의 모든 사람이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소금치듯 태워질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는, 앞의 구절과는 별개로  제물이나 음식이 소금으로 정결하게 되고 그 맛을 내듯이, 사람은 불과 같은 시험이나 연단을 통해서 정결하게 되며 그 맛을 내게 된다, 곧 사람다워진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50절 상반의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동일하게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마 5:13, 눅 14:34-35). 그 복음서들의 문맥을 참조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이 되어 세상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0절 하반의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은, 당시 서로 다투고 경쟁하던 제자들에게, 높아지려는 욕망으로 부패해진 마음을 정결케 하고, 서로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화목하라고 당부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오늘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혹시 뼈아프게 마음을 찌르는 단어나 구절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 겸손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내어 놓고 말씀 드려 보십시오. 그러한 나에게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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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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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도 장애를 가진 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몸의 장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죄입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장애나 질병이 부모나 그 자신의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장애와 죄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은 온전해도 그 몸으로 죄를 범하며 사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지만, 몸은 온전하지 못해도 그 몸으로 온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손이나 두 발이나 두 눈을 가지고 범죄하며 살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차리라 그 중 하나를 잘라 버려서 범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신체의 일부를 잘라버리라는 권고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의지가 육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그치기 위해서는 손발을 자르거나 눈을 빼 버리는 것과 같은 단호한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 66장 24절을 인용하여, 영원한 생명과 대조되는 끝없는 지옥의 고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범죄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은 살아서는 온전한 몸을 가졌을 지 모르나 지옥에서는 그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 구더기에게 파먹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지 않도록 죄로부터 단절된 삶을 살라고 촉구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에 대한 차가운 경고가 아니라, 뜨거운 호소입니다. 혹시 습관적인 죄, 반복적으로 지으면서도 끊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기도 가운데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마음 깊이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도록 주님께 은총을 구하십시오. 또한, 손발을 잘라내거나 눈을 빼어 버릴 정도의 단호한 결단으로 죄와 맞써 싸울 수 있도록 용기를 구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나의 간구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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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금슬금 소리 없이



가을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걸까요? 24절기에 따르면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는 보통 양력 8월 8일 전후로 있습니다. 입추가 되면 신기하게도 밤이나 새벽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양력 8월 23일 무렵에 있는 처서(處暑)를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지고 늦더위도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달력이 9월로 넘어가면, “이제 드디어 가을이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완연한 가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즘 들어 더욱 심해진 지구온난화 탓이기도 하지만, 원래 가을이란 슬금슬금 오는 것이니까요. 

 

악견산이 슬금슬금 내려온다
웃옷을 어깨 얹고 단추 고름 반쯤 풀고
사람 드문 벼랑길로 걸어 내린다
악견산 붉은 이마 설핏 가린 해
악견산 등줄기로 돋는 땀냄새
밤나무 밤 많은 가지를 툭 치면서 툭
어이 여기 밤나무 밤송이도 있군 중얼거린다


박태일의 시 〈가을 악견산〉의 시작 부분(1행-7행)입니다. 악견산(岳堅山)은 경남 합천에 솟아 있는 해발 634미터의 산입니다. 정상부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암벽과 아름다운 꽃들이 어우러져 그 이름처럼 제법 높고 견고하며, 아름다운 곳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악견산을 의인화하여 “웃옷을 어깨에 얹고 단추 고름을 반쯤 풀고” 내려오는 사내로 묘사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사내는 가을입니다. 마치 가을 단풍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능선을 타고 점차 아래도 내려오듯이 “붉은 이마”의 악견산은 슬금슬금 능선을 타고 “어디 죄 지은 아이처럼 소리없이”(8행) 내려옵니다. 점차 물들어가는 단풍과 더불어, 밤송이도 익어 툭툭 떨어지고, 추수가 끝난 논에는 “나락더미”가 쌓입니다(9행). 그러다 드디어 “… 음구월/ 시월도 나흘 더 넘겨서/ 악견산이 슬금슬금 마을로 들어서면/ 네모 굽다리밥상에는 속좋은 무가 채로” 오릅니다(12-15행).  

 

이처럼 악견산의 가을은 “슬금슬금”, “소리 없이” 내려옵니다. 달력은 구월로 넘어가도 여전히 늦더위를 쫓아내느라 부채질을 하는 이들에게 가을은 너무나 더디 오는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도 악견산은 웃옷을 어깨에 얹고 등줄기에 땀을 흘리며 소리 없이 산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계절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추위나 더위가 얼른 지나가고 따뜻하거나 선선한 계절이 속히 오기를 바라지만, 겨울이나 여름은 때가 될 때까지 결코 물러가는 법이 없고, 봄이나 가을도 자신들의 때가 되기 전에 성급하게 등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조급한 건 자연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컴퓨터도, 통신도, 운송 수단도, 배달도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람의 인내력은 점점 더 그 능력을 잃어갑니다. 그러한 인류에게 가을은 조급해하지 말고 나와 함께 슬금슬금 걸어보자고 청합니다.

 

〈가을 악견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어느 순간 시적 화자가 등장합니다. 산꼭대기에서부터 걸어 내려온 악견산이 마을로 슬금슬금 들어서니, 이제 “나”가 마치 바통을 이어받은 듯 집 바깥이 궁금한 송아지처럼 사립문 밖으로 나가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갑작스럽게 마무리됩니다.

 

덜미 잡힌 송아지같이 나는 눈만 껌벅거리며
자주 삽작 나서 들 너머 자갈밭 지나

악견산 빈 산 그림자를 밟아가다 후두둑
산이 날개 터는 소리에
놀라 논을 질러뛴다.

 

이것은 산 그림자에 덮인 논에 앉아있던 새가 갑자기 날개 치며 날아오르자 그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토끼나 어린 짐승이 놀라서 재빨리 도망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장 구조상 여기서 논을 가로질러 뛰는 주체는 시적 화자인 “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소리 없이 걸어온 가을에 어느새 완전히 동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대부분의 독자들께서는 도시에 살고 있으시겠지요. 그래서 뒷산에 가을이 소리 없이 내려오는 것을 보기는 어려우시겠지만, 가을이 가로수길을 슬금슬금 걸어오는 것을 보신다면, 분주한 발걸음의 속도를 줄이고 가을과 보조를 맞추어 슬금슬금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렇게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계절과 함께 소리 없이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을이 되어 마음이 익어가고, 아름답게 물들지도 모르니까요. 

 

Magazine Hub 113 (2022년 9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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