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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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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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서로 누가 크냐 다투던 제자들 앞에 한 어린아이를 데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다정하게 안으셨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그들이 머물던 집안 한 구석에 있었거나, 아니면 누군가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복해주시길 바라며 데리고 와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 아이에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예수님과 그 품에 있는 아이에게 쏠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리고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이런 아이 하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가장 약한 존재이자, 가장 가볍게 여김을 받던 존재였습니다. 더욱이 당시 제자들의 시선은 스스로 으뜸으로 여기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거나, 경쟁자로 여기는 동료들을 의식하느라 어린아이와 같이 작고 힘없는 존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높아지려던 욕망으로 가득 차고 자기중심적인 그들의 시선에 아이들은 전혀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대의 어른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 역시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당대 사회의 가치관과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으로 굳어진 그들의 사고를 마치 망치로 내리치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나에게 깨달음을 촉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제자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나의 부끄러운 초상화는 없습니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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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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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가버나움에 돌아와 집 안에 함께 모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질문을 하신 것은 정말 제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기보다 그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다른 동료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한 존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했습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계층과 서열은 중요하게 작동했고, 그런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던 제자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처럼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고,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싶어하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사회적으로 전혀 높은 신분이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혁명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꿈꾸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그러한 욕망과 자리 다툼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기에 이후에 이 문제가 그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더 불거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꼴지가 되어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말 혁명적이고, 전복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겸손’을 강조하던 랍비들도 제자들이 자신을 섬기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혁명적인 겸손’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나에게 어떠한 질문을 던지십니까?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하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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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으로

기도문 2022. 7. 26. 15:13

당신의 손으로

- 미명의 기도

 
주님, 또 다시 새벽이 밝아옵니다
 
간밤에 열에 들떠 칭얼거리던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려 주시고
 
숨죽여 베갯잇을 적시던
엄마의 눈물 자국을 닦아주시며
 
한숨지으며 뒤척거리다 쪼그려 잠든
아빠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세요
 
2022. 7. 16.
 

Before dwan in the dark at Youngnak Retreat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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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는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나

주님의 집을 위해 봉사하도록

저희를 불러주시고,

건강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마음을 다해 주님의 집을 깨끗하게 할 때에

주님께서는 저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주소서.

저희가 예배당을 쓸고 닦을 때에

저희 마음의 죄악을 쓸어내어 주시고

근심과 불안과 우울함과 두려움을 닦아내어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이 봉사를 끝냈을 때

청결한 교회당 곳곳에서

그리고 땀 흘려 수고한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는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저희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예배드릴

성도님들의 마음에도 상쾌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무더위 속에서도

자원하여 기쁨으로 섬기시는

모든 분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시고

그 가정에도 주님의 평안으로 채워주시옵소서.

또한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그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을 통해

선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2년 7월 23일

교회사랑청소 봉사자들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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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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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을 내려오신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곳을 떠나 다시 가버나움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갈릴리를 지나 가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잠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여행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이때 제자들에게 은밀한 비밀, 곧 당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한 번 더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묻기도 두려워 하였습니다. 아니, 그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메시야가 고난받고 죽임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켰기에 그들은 그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만, 자신이 듣고 싶은 말씀만 듣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고, 자신의 바람이나 욕망의 충족을 보장하는 이야기들은 환영하며 마음에 간직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뜻이나 소원과 반대되는 말씀은 거부하거나 회피합니다. 말씀을 여러 번 들어도 무지나 망각으로 반응합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지만, 주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시기를 원합니다. 해피 엔딩을 원하지만,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거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혹시 내가 무지나 망각으로 거부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내 마음에 불안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말씀이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 갈릴리의 시골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씀 드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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