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한 사명

-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


지난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국토의 곳곳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고, 여러 언론들은 광복 직후의 낙후된 모습과 현재의 발전된 모습을 비교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잠시 감격에 젖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벌어진 팽팽한 군사적 대치는 온 민족을 다시 ‘오래된 위기’로 몰아넣었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을 계기로, 북한은 전방지역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고, 남한은 전면전 돌입을 경계하는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비록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서 긴장이 평화적으로 완화되고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전쟁을 그저 ‘쉬고 있는’ 분단국가임을 실감하게 하였다. 더욱 더 이웃나라 중국은 지난 9월 전승절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으로 자국의 군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고,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전쟁 참여를 금지하는 ‘평화헌법’ 수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러한 동북아 정세는 뜨거운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처럼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무엇이라 설교해야 할까? 20세기의 대표적인 영성가이자 사회비평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자.


비밀스러운 공개편지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Cold War Letters)는 일종의 ‘목회 서신들의 묶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목회(牧會)는 좁은 의미에서 한 목회자가 특정한 교회를 맡아 회중들을 지도하는 형태에 한정되지 않는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한 영적 지도자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편지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관한 지혜와 권면을 전달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의 서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도 이렇게 편지를 통해 영적 지도를 행한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머튼의 《냉전 편지》는 1961년 10월부터 1962년 10월까지, 약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그가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쓴 111통의 편지 모음집이다. 49통의 편지를 모은 첫 번째 묶음은 1962년 4월에 나왔고, 거기에다 62통의 편지를 추가한 두 번째 묶음은 1963년 1월에 나왔다. 모두 등사되어 스프링으로 제본된 형태로 제한된 사람들 사이에서 회람되었다. 그런데 갖가지 통신, 인쇄 기술이 발달한 20세기 중반에 이렇게 머튼이 ‘편지’와 ‘등사’라는 수단을 활용하게 된 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먼저 토마스 머튼은 베네딕트 규칙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는 트라피스트회(Trappist)의 수도자였다. 그는 1941년 12월 미국 켄터키의 겟세마니 수도원(Abbey of Gethsemani)에 들어간 이후, 줄곧 수도원 안에서 침묵과 기도와 노동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1948)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젊은 수도자 머튼은 수도원 담장을 넘어 매우 영향력 있는 영성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자서전 외에도 기도와 영성 생활에 관한 에세이집과 시집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그의 글에 감명을 받은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엽서와 편지들이 수도원으로 날아들었다. 이처럼 외부 세계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수도원 안에 살던 머튼에게 ‘편지’는 친구들과의 소통이나 영적 지도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이유는 머튼이 수도회에 속한 수도자였기 때문에, 그가 공적으로 출판하는 모든 글들은 수도회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침묵을 강조하는 트라피스트회의 당시 장상(長上)들은 머튼이 영성 생활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장려했지만, 정치적 이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머튼은 1961년 이후 전쟁과 군비 경쟁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가톨릭계 간행물들[각주:1]에 기고하였고, 그것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트라피스트 수도회 총장 가브리엘 소르떼(Dom Gabriel Sortais: 1902-1963)는 마침내 1962년 4월 머튼에게 더 이상 전쟁에 관한 주제로 글을 출판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정식 출판된 책이 아닌, ‘등사된 편지 묶음’이라는 형태는 머튼이 장상들의 지시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수도회의 검열을 피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이용한 방법이었다. 사실 검열 문제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 오던 머튼은 공식적인 출판 금지 지시가 내려지기 이전인 1961년 말부터 자신의 편지들을 ‘비밀스러운 공개편지’로 유통시킬 계획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이런 이유로 《냉전 편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지난 2006년에야 정식 출판되었다. 또한 그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글 모음집인 《기독교 이후 시대의 평화》(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 역시 1962년 4월에 완성되었지만, 등사본으로 읽히다가 그의 사후인 2004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각주:2] 

 

긴급한 위기

그렇다면 머튼은 왜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애를 썼을까? 그의 “냉전 편지들”은 역사적으로 “베를린 위기”(Berlin Crisis)가 일어난 1961년 10월부터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가 있었던 1962년 10월 사이, 곧 군사적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에 쓰여 졌다. 두 사건 모두 냉전 시대 자본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소련 사이에 일어난 군사적 대치로, 두 강대국은 서로를 향해 포문을 열고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다행히 미국 대통령 케네디(John F. Kennedy)와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냉전’(cold war)이 실제 무력을 사용하는 ‘열전’(hot war)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를 사용한 제3차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전 세계를 휘감았던 시기였다. 머튼은 당시의 위기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는 1961년 12월 런던의 한 대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사실상 도덕적 붕괴에 이르고 있으며, 그 속에서 국가의 정책은 거의 노골적으로 멸망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을 운명론적인 무관심으로 수용하거나, 무책임성과 수동성 속에서 무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침묵해왔다는 사실입니다.(9)[각주:3]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로 핵미사일을 운송하는 소련의 군함과 그 위를 비행하는 미군 항공기. Image from Wikipedia.org

머튼이 느낀 위험은 일차적으로는 핵폭탄, 생화학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로 인해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심각하게 여긴 것은 그러한 무기들을 생산하고 다루는 인간들의 도덕적 불감증과 무책임한 태도였다. 호전론(戶錢論)자들은 소련의 핵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군비 확충과 선제공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머튼은 무기 산업이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국민들을 선동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의 무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하고 있습니다. …… 무기가 우리를 분노하게하고 필사적인 상태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손가락을 [미사일 발사] 버튼 위에 올려 두고 레이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17). 그의 관점에서 이것은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학자들,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은 교부 신학이나 전례 등에 대한 작은 문제들에만 신경을 쓸 뿐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5). 그래서 머튼은 지금 서구 기독교는 인간성을 상실한 채 “추상적인 형식”(8)이 되어가고 있으며, 기독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불확실의 영역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3). 이러한 사실들이 그로 하여금 긴급히 펜을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머튼은 이용 가능한 최선의 수단을 다하여 전쟁을 폐지하고, 인류를 파멸로부터 구하는 것이 자신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우선되는 사명임을 확신하였다(2).


새로운 길을 찾아서

머튼은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도덕적, 영적 관점에서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였다. 그는 호전론자들이 “공산주의는 악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비도덕적이고 세속적일뿐만 아니라 완전히 비기독교적임을 폭로하였다(6). 구체적으로 머튼은 도로시 데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 또는 그가 속한 무리의 행동이나 정책으로부터 구분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악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여 그들을 형제자매가 아닌 죄인과 악당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향한 우리의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11). 나아가 그는 당시 미국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아내이며,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제수였던 에설 케네디(Ethel Kennedy)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러시아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입니다. …… 우리는 완전히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옳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육신을 입은 악마들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거대한 환상입니다.”라고 말하며, 증오와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과 상대편을 진실하게 직면할 것을 역설하였다(10). 곧, 머튼은 우리가 평화를 위해 제거해야할 것은 상대진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 그리고 그 전쟁의 뿌리가 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과 증오라고 믿었다.[각주:4] 

     머튼의 이런 견해들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부의 정책에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충(不忠)한 국민으로 간주되었으며, 전면적인 핵전쟁을 외치는 극우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튼은 비록 콜롬비아 대학시절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 잠시 기웃거린 적이 있긴 했지만, 그의 생애에 걸쳐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공산주의가 교회와 자유세계에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임을 지적한다(32). 또한 그는 전쟁에 저항하는 비폭력 평화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운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도 경고하였다. 구체적으로 머튼은 평화운동가인 제임스 포리스트(James Forest)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비폭력운동에 공격성과 도발성이 은밀히 내포됨으로 인해 오히려 상대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눈을 멀게 만들 수도 있으며(31), 평화운동가가 행동주의(activism)의 파도에 휩쓸리면 또 다른 종류의 “대중적 인간(mass-man)”, 곧 이성과 판단력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의견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할 것을 당부하였다(69). 이와 같이 머튼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거칠고 무분별한 평화운동은 전쟁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길을 추구하였을까?

     이처럼 당대의 문제를 도덕적 위기로 파악했던 머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도덕원리를 세움으로써 전면전을 피하고 전쟁 폐지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분열과 대치를 해결하고 통합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기독교 인간주의(Christian Humanism)”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때 머튼이 주장한 “인간주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써, 인간을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이해하는 태도를 말한다.(8) 이것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바탕을 둔 비인간적인 “정글의 법칙(jungle law)”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자연의 법칙(natural law)”에 따라, 원수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똑같은 ‘자연적 본성’(nature)을 지닌 형제자매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태도이다(11).

     물론 머튼은 자신이 정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의 인용구처럼 그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추구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자유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온전한 중도(sane middle path)를 찾고 발견해야 합니다.”(32) 그런데 이때의 ‘중도’는 보통 정치적으로 말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자적 또는 회색주의자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머튼은 《냉전 편지》를 등사하여 배포하는 일을 맡아 주었던 윌버 페리(Wilbur H. Ferry) 민주제도연구소(Center for Democratic Institutions) 부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제가 시도해온 것은 기본적인 도덕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덕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도 심각하게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원칙 말입니다.”(48) 또한 그는 다른 편지에서 “제3의 위치, 통합의 위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것은 냉전시대의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정치적인 신조와도 상관없는 새로운 위치이다.[각주:5]  


‘행복을 주는 약’을 버리라

로널드 W. 드워킨(Ronald W. Dworkin)은 《행복의 역습》(Artificial Happiness, 2006)이라는 책에서, 1950년대 이후 미국의 교회는 대중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적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설교하기 시작했는데(‘행복’과 ‘긍정적 사고’에 대한 강조가 대표적 예이다), 단기적으로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늘날 종교를 ‘정신작용약물’을 사용해서 ‘인공적인 행복’을 제공하는 의료산업과 비슷한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고 논증한다.[각주:6]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당시 기독교 매체와 교회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느끼게’ 만들면서도 당면한 위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수동적이게 만드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믿음은 그저 “행복을 주는 약(happiness pill)”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3). 

오늘날 우리 한국의 설교단과 서점 진열대도 “행복을 주는 약”들이 오랫동안 점령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 한국 교회의 도덕적, 영적 위기를 초래하는 데에 크게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머튼의 《냉전 편지》는 비록 반세기 이전에 쓰여 진 것들이지만, 시대의 도덕적 영적 위기에 대한 그의 통찰과 제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도 머튼이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교회의 생명력은 바로 영적 갱신에 달려있습니다. 이 갱신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며 심원한 차원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갱신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입니다. 이것은 그 위기들을 내적 의의와 인간의 성장과 인간 세계에서의 진리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69)


분명히 기억해야 것은 ‘영성 목회’는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목회자와 회중의 만족을 위한 ‘행복을 주는 약’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최소한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설교자는 당면한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행복을 주는 약’을 던져 버리고, 정치적 좌우를 넘어서는 도덕원칙, 통합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할 긴급한 의무가 있다. 그래야 영적 갱신이 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글쓴이 : 권혁일.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Ph.D. Candidate(Graduate Theological Union, 기독교 영성학). 《백투더클래식》을 편저하였고, 《제임스 게일》, 《베네딕트의 규칙》 등을 번역하였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1월 호에 "도덕적·영적 관점에서 본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실린 열한 번째 글입니다.


  1. 대표적인 매체로는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가 이끌던 《가톨릭 노동자》(The Catholic Workers)가 있다. 도로시 데이는 비폭력 사회 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가톨릭교회에서는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한 그녀의 삶을 높이 평가하여 성인으로 추대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생전에 머튼과 데이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냉전 편지》에도 머튼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2통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Cold War Letters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는 분도출판사에서 《머튼의 평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3. 인용문은 필자가 Cold War Letters (Orbis, 2008)에 수록된 원문을 번역한 것이며, 괄호 속의 번호는 냉전 편지 번호이다. 토마스 머튼은 《냉전 편지》를 직접 편집하며, 각 편지에 배열 순서대로 번호를 달아 두었다. [본문으로]
  4. 머튼은 그의 책, 《새 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16장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입니다”에서 이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5. Thomas Merton, The Courage for Truth: Letters to Writers (Harcourt Brace & Company, 1994), 54. [본문으로]
  6. 로널드 W. 드워킨, 《행복의 역습》(아로파, 2014), 220-222. [본문으로]

지난 2015년 11월 21일 한국토머스머튼연구회 31차 포럼에서 읽은 논평 원고를 옮겨 놓는다. 영어를 사용하는 강연자를 위해서 논평 원고를 영어로도 번역했는데, 아래에 함께 붙여 둔다. 연구회에서 부탁받은 대로 강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몇 가지 질문을 담았다. 강연자께서 ‘우문’에 ‘현답’을 준비해주셨는데, 실제 강연장에서는 시간의 제한으로 그 중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만 대답이 되어졌다. 하지만 이후에 모든 내용이 출판된다고 하니 기다려볼 일이다.


폴 피어슨의 “불가해하고 소란한 과학기술용어 세계 속에서의 침묵: 

토머스 머튼과 침묵의 예언적 역할”에 대한 논평



저는 논평과 번역을 위해 사전에 강의 원고를 받고서, 원고의 내용을 읽기도 전에 글의 제목에 매료가 되고 말았습니다. 강연자 폴 피어슨 박사님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 흔히 사용되는 “과학기술의 세계”라는 표현 대신에, “과학기술용어의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과학기술’을 의미하는 ‘technology’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의미하는 ‘babble’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혼성어, “과학기술용어”(technobabble)는 ‘난해하고’ ‘소란스럽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소음 속에서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특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강연자는 도입에서 각종 기기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들뿐만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일상을 점령하고 있는 미디어 기기들, 또는 그 기기들에 종속된 삶의 양식들을 침묵과 고독을 방해하는 일종의 소음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대 사회는 “과소비”와 “과잉소통”을 부추기는 “과학기술용어”의 소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물리적인 소음보다도 더 심각하게 현대인의 관상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일 것입니다. 이러한 소음이 위협하는 것은 침묵과 고독만이 아닙니다. 매일 “급류처럼 밀려오는 말의 홍수”(torrent of words)는 말의 힘을 앗아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가볍거나 난해한 정보 교환의 수준으로 저하시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토머스 머튼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 침묵과 고독의 가치를 말하는 피어슨 박사님은, 당신의 표현을 인용하면 “반문화적(counter-cultural)”이고, 머튼의 표현을 빌려오면, 시인과 수도자와 히피와 같이 시대적으로 “부적절(irrelevant)”합니다.[각주:1]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반문화성과 부적절성이 오늘날 과학기술용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타성과 관성에 도전하고, 인간 내면에 있는 근원적인 갈망, 곧 진정한 소통과 일치에 대한 갈망을 일깨웁니다. 벨라민 대학 ‘토머스머튼센터’의 책임자로서 머튼 관련 자료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폴 피어슨 박사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이해를 토대로 머튼의 출판된 글은 물론 미간행 자료들에서 침묵에 관한 핵심적인 언급들을 가져와 우리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오늘 제게 주어진 임무 중의 하나가 강연을 요약하는 것이므로, 이미 들으신 내용이지만 간략하게 몇 가지 요점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먼저 “머튼의 침묵 경험”이라는 제목이 붙은 부분에서 강연자께서는 오컴 시절부터 방콕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머튼의 영적 여정에서 침묵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요약적으로 그려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머튼의 예언적인 목소리가 역설적으로 점점 깊어지는 침묵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 피어슨 박사님은 침묵과 고독에 대한 머튼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1)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침묵 속에서의 하느님과의 대화”로 이끕니다. (2) “침묵은 우리가 내면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3) 그래서 우리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침묵과 연합하게 됩니다. (4) 이것을 “침묵이 우리를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불꽃, 곧 진정한 자기로 이끈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내적 침묵의 중요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강조가 아닐까합니다. “트라피스트의 침묵에 대한 규칙이 반드시 우리 내면의 소음을 잠잠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수도적 삶의 방식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단순히 입의 침묵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침묵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과학기술용어의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입으로는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손과 눈은 미디어에 뺏겨 있어서 내적 침묵에 이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피어슨 박사께서 머튼의 강연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침묵의 정의는 현대인들이 하느님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내적 소음을 떠나보내는 데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은 긍정적 현존입니다. [음성적 소리로] 들리지 않는 그 분의 현존입니다. 그래서 모든 혼란스러운 소리들과 사소한 소음들이 고요해지면, 유창한 실재의 목소리, 곧 하느님 그분의 목소리가 충만한 평화와 침묵 가운데서 들립니다.”


또한, 오늘 강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침묵이 역설적으로 말의 참된 가치를 회복시켜 준다는 점입니다. 침묵은 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말을 무의미와 상업적 또는 정치적 남용으로부터 건져내어 보존함으로써 말이 가진 원래의 창조적인 힘과 성사적인 가치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침묵은 우리의 마음의 귀를 열어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듣게 하고, 나아가 다른 이들을 들을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을 통해서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예언하는 것을 배우고, 다른 이들과의 참된 소통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역으로 우리가 진정한 소통을 잃어버린 이유는 침묵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 친교(communion)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강연자께서는 본문의 세 번째 부분에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위기이며, 진정한 영적 친교를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이유”라고 설득력 있게 논증하였습니다.


결론에서 피어슨 박사님은 머튼에게 있어서의 침묵의 가치를 이중적으로 요약하였습니다. 먼저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곧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깨닫게 하여 스스로를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진실하게 보여 주게 하는데, 이것은 “소통에서 친교로 나아가는 이동”(movement from communication to communion)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제가 바르게 이해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이동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은 사랑과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머튼이 캘커타에서 한 유명한 강연의 한 부분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소통의 가장 깊은 차원은 소통이 아니라 영적 친교입니다. 그것은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을 넘어서 있으며, 그것은 담화를 넘어서 있고, 그것은 개념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일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래된 일치를 발견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상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원래적인 일치입니다.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은 이미 되어져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각주:2]


여기에서 저는 피어슨 박사님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 아마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 중에도 비슷한 질문을 가지신 분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1) 머튼이 말한 ‘말이 없는, 말을 넘어선 영적 친교’는 무엇입니까? 그저 한 개인이 침묵 가운데서 이런 영적 친교의 ‘느낌’을 갖는 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하면 오늘날 파편화된 과학기술용어의 세계에서 한 가족이, 한 공동체가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이런 친교 가운데서 살 수 있을까요? 이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제안이나 사례가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오늘날은 영성지도자의 기본적 자질로써 듣기, 특히 “관상적 경청”(contemplative listening)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또한 박사님께서도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다른 이들과 영적 친교 가운데서, 진정한 대화 가운데서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각주:3]는 머튼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우리는 반드시 침묵하고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귀를 기울여서 듣기만 해서는 안 되고, 마음의 귀로 들려오는 소리를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to listen)과 들려오는 소리를 인식하는 것(to hear)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사전적 정의의 차이보다는 그것이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박사님께서는 “예언자의 모범”으로서의 머튼을 친절히 소개해 주셨는데, “듣는 자의 모범”으로서의 머튼에 대해서도 잠시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시다면 감사하겠습니다.


(3) 박사님께서는 머튼이 “긍정적(또는 창조적) 침묵”과 “부정적 침묵”을 구분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부정적 침묵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정적 침묵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신다면 침묵을 실천할 때에 분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마지막으로 오늘 박사님께서 전해주신 유익하고 통찰력 있는 강연은 물론, 이곳 먼 한국까지 오셔서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침묵에서 우러난 박사님의 강연과 현존은 역설적으로 오늘 이곳 가운데 “침묵의 분위기”를 조성해 주셨습니다. 




Hyeokil Kwon’s Response to “Silence in a World of Technobabble:

Thomas Merton and the Prophetic Role of Silence” by Paul M Pearson


I enjoyed the privilege of reading a copy of the script of this lecture in advance for translation and response. Upon receiving the copy, I was fascinated by the title of the lecture before reading the text. Dr. Paul M Pearson uses the phrase “the world of technobabble” rather than the commonly used phrase “the world of technology” in order to describe the world where we live today. The term “technobabble” is a portmanteau which comes from “technology” and “babble” so connotes “noisiness” and “incomprehensibleness.” I think this term captures well some characteristics of modern people who are unable to comprehend each other in noises produced by technology. Indeed, the speaker in his introduction has presented the media devices, which take up modern people’s everyday life, or their way of life, which is subordinated to the devices, as a kind of noise that disturbs their silence and solitude. Yes, our modern society is filled with the noise of technobabble that incites “over consumption” and “hypercommunication.” Perhaps this is a more serious threat to modern people’s contemplative life than physical noises. What such noise threatens are not only silence and solitude. The inundating “torrent of words” deprives of the power of words and degenerates people’s communication to the level of mere exchange of trivial or incomprehensible information.


Dr. Pearson, who asserts in this world of technobabble the value of silence and solitude through Thomas Merton’s life and teachings, is “counter-cultural,” in his expression, and “irrelevant” like monks, poets, and hippies in Merton’s expression.[각주:4] Paradoxically, however, such counter-cultural and irrelevant nature of his lecture challenges the inertia of modern people and evokes a fundamental desire in human beings for real communication and unity. Dr. Pearson, director and archivist at the Thomas Merton Center at Bellarmine University, is one of the persons who best know about Merton materials. He has introduced very well to us Merton’s core teachings on silence bringing both from his published and unpublished materials.


Because one of the tasks assigned to me today is to summarize Dr. Pearson’s lecture, I am going to mention several points concisely. First, in the section entitled “Merton’s Experience of Silence” the speaker has briefly described the importance and effect of silence in Merton’s spiritual journey from Oakham to Bangkok and has clearly showed that Merton’s prophetic voice was grown from his gradually deepening silence.


Then, in the second section entitled “Merton’s Writing and Teaching on Silence,” Dr. Pearson has highlighted Merton’s thoughts on silence and solitude: (1) Solitude leads us to the “dialogue with God in silence,” (2) “[S]ilence enables us to “reconcile[s] the contradiction within us,” (3) In silence, we are able to be united with God’s silence, and (4) “Silence leads us to the true self, to the spark of God in each of us.”


Moreover, what must be noted is the speaker’s emphasis on the importance of the inner silence: “The Trappist rule of silence does not necessarily silence our internal noise…it is the silence of the mind and heart that is central to the monastic way, not just the silence of the mouth.” Indeed, today’s people living in this world of technobabble often fail to reach the inner silence because of losing their hands and eyes to media devices while keeping their mouse silent. In this regard, Merton’s definition of silence quoted by Dr. Pearson is very helpful to modern people in letting go his inner noise by being attentive to the presence of God: “Silence is a positive presence, the presence of Him Who is not heard, so that when all confused sounds and trivial noises are hushed, then the eloquent voice of reality, of God Himself, makes itself heard in peacefulness and in silence.”


Also, it should be pointed out that silence paradoxically restores the true value of words. Silence does not annihilate words but instead restores and reserves their creative power and sacramental value by saving them from meaninglessness and commercial or political abuse. In addition, silence opens our ears of hearts so enables us to hear the Word of God as well as fellow human beings. This openness allows us to “learn to see the world as God sees it” and to make a prophecy as a fruit of our experience of silence. Conversely, the reason why we have lost the real communication is that we have lost silence. As a result of that, we have lost communion. The speaker has persuasively contended, in the section entitled “Merton as Exemplar of the Prophetic,” that such loss is “the grave danger we face and why we must work to restore authentic communication with one another.”


In his conclusion, Dr. Pearson has summarized the two-fold value of silence for Merton. In sum, through silence, we are able to realize our true identity, the beloved children of God, and to love ourselves. Such experience of God’s love and mercy encourages us to show the love and mercy, which we received from God, to others “in a movement from communication to communion.” Thus, if I understand correctly, the fundamental impetuses for the movement are love and mercy. This movement reminds me of a part of Merton’s famous lecture at Calcutta:


And the deepest level of communication is not communication, but communion. It is wordless. It is beyond words, and it is beyond speech, and it is beyond concept. Not that we discover a new unity. We discover an old unity. My dear brothers, we are already one. But we imagine that we are not. And what we have to recover is our original unity. What we have to be is what we are.[각주:5]


At this point, I would like to ask Dr. Pearson some questions that some of the audience might also have. (1) What is the wordless communion that Merton said? How can a family or a community in this fragmented world of technobabble live in such communion with deep mutual understanding beyond just a person’s feeling of unity in silence? If you have some suggestions for or an example of such communion, please share with us.


(2) Nowadays, “contemplative listening” is being emphasized as a qualification to be a spiritual director. Also, quoting Merton’s writing, “To live in communion, in genuine dialogue with others is absolutely necessary, if [we are] to remain human,”[각주:6] you has highlighted the necessity of silence and listening. Further, you has emphasized that we need “to hear…with the ear of the heart” not just to listen. Could you say more about this? What is the difference in our spiritual life between to listen, to pay attention with the ear, and to hear, to perceive sound with the ear? In addition, you have kindly introduced to us Merton as “exemplar of the prophetic.” Then, could you also let us know about Thomas Merton as exemplar of the listener or hearer?


(3) You have told that Merton made “a distinction between positive (or creative) silence and negative silence” but have skipped an explanation of the latter. I think that if you give us a brief account of the negative silence that we need to be careful of, that will be helpful to us in practicing silence. 


Finally, I really appreciate your presence here in Korea as well as your informative and insightful talk, which has paradoxically created an atmosphere of silence in my (perhaps our) life. 


  1. Thomas Merton, The Asian Journal of Thomas Merton (New York: New Directions, 1973), 305-6. [본문으로]
  2. Ibid., 308. [본문으로]
  3.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York: New Directions, 1962), 55. [본문으로]
  4. Thomas Merton, The Asian Journal of Thomas Merton (New York: New Directions, 1973), 305-6. [본문으로]
  5. Ibid., 308. [본문으로]
  6.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York: New Directions, 1962), 55. [본문으로]



광화문을 지나는 길에 "아이들의 방"에 잠시 들렀다. 별이 된 아이들의 빈 방의 사진들을 모아 놓은 천막은 아이들의 방만큼이나 쓸쓸했다.

이 날 밤, 여중생 조카의 방에서 잠을 잤는데, 몹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몇 달 동안 사라졌던 두드러기가 다시 등을 뒤덮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앉아 있으니, 마치 "아이들의 방"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사진을 보니 방에 비치는 햇살이 비록 아이들은 없지만 이 방들이 빈방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아직 물속에 있는 아이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기간제 선생님들의 순직이 인정되기를, 가족들의 마음에 위로가 끊이지 않기를, 사건의 진상이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처럼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바라며…….


2015. 11. 21.

'날적이 > 그림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재가 된 과거, 과거가 된 현재  (0) 2016.01.06
열한 번째 협곡을 지나며  (0) 2015.10.29
상기된 달의 얼굴  (0) 2015.10.26

나는 벌레입니다

- 시편 22, 농민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


나는 벌레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 사람이라면 

내가 땀흘려 지은 쌀로 밥을 먹는 

형제 인간들이

마시지도 씻지도 못할  독한 물을

거센 폭포수 같은 물줄기로 

내게 쏘아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살충제에 쓰러진 해충

이 되었습니다


흙냄새 배이고 태양에 그슬린 나는 

피가 흐르는 스테이크를 즐기는 

교양있는 논객들의 조롱거리이며

정글에서 벌레를 잡아 파티를 벌이는

상류 언론들의 비방거리입니다


나는 물 같이 바닥에 쏟아졌으며

내 머리뼈는 사자의 입에 달콤한 

사탕 같이 깨어졌고

내 마음은 횃불처럼 담대하나

양초처럼 힘없이 녹아내렸습니다

또 주께서 나를 죽음의 

아스팔트 위에 두셨습니다

거품을 문 물줄기가 여기까지 쫓아와 

나를 하수구로 밀어 넣으려 합니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라는 주님의 것이라 하셨으니

이 나라를 고치소서



2015. 11. 16.

'시와 수필 > 멸치 똥-습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멸치 똥  (0) 2015.12.22
나무인형  (0) 2015.11.14
홍시 같은 생각  (0) 2015.11.14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10, 15)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또한 이 땅의 모든 통치자들과 권세들의 머리이시다. 아,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부지깽이와 같이 부서질 권력을 쥐고 있 인간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존중함으로 그 힘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권력을 빼앗으시고 부끄럽게 하신다. 아,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복된 소식인가!


그런데 그 방법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의 방법은 십자가이다. 그리스도는 세상 통치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십자가'로써 무력화시키셨다. 이처럼 사람들의 눈에는 '무력해 보이지만' 십자가는 죽음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만일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난다면 십자가는 곧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상까지 바라본다면, 부활로 나아가는 십자가는 확실한 승리의 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독재 권력과 싸울 때에 그들에게 조롱과 억압의 빌미를 주는 폭력이 아니라, 철저히 비폭력적인 십자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 분노와 억울함을 다스리기가 어렵고, 또 구체적으로 그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들은 구체적으로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진지한 기도 가운데 식별해야 할 의무가 있다.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바탕으로 삼고자 메모를 남겨 놓는다.


2015. 11. 15. 주일.

'묵상 >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올무' vs '생각의 올무'  (0) 2016.11.22
삼손, 사랑에 배신당한 남자  (0) 2015.10.12
빡빡하신 하나님?  (0) 201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