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인형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피노키오는 

동화 속에만 살아있나봐


우리 사는 세상에서

피노키오들은 

박제나 조각상이 되어 

박물관과 거리에 전시되지 

주문에 걸린

고대의 유물처럼


대신 세상에는 거짓말을 

거짓말같이 해도

코는커녕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는

매끈한 나무인형들이 

매일같이 TV에 나와 

주문을 쏟아내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건 아마도 피노키오는 

나무인형이 아니라

부끄럼을 아는

사람이라 그런가봐

제페토의 따스한 호흡을

기억하는


피노키오를 사랑하는 아이들아 

인형들이 나오는 TV 말고

사람들이 나오는 동화만 읽으렴

피노키오랑 얼음땡 하며

마법에 걸려 얼어붙은

어른들의 마음을 녹여주렴


201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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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 같은 생각



올해는 감이 풍년이래

각박한 세상살이에 시달린 사람들

감을 나눠 먹으며 서로

발뒤꿈치 각질을 벗겨준다지


감나무의 애정과 기도로 여문

주홍빛 홍시 몇 개 얻어다 놓고


성급해서 터져버린 덜 익은 홍시 

옹골지지 못해 싱거운 다 익은 홍시

때를 놓쳐 먹을 수 없는 삭은 홍시


는 절대 되지 말아야겠다는 

흔한 홍시 같은 생각



201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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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쓰며 영어로 번역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올려둔다. 그가 한글로 시를 쓰던 때는 일제강점기 말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언어는 물론 정체성까지 말살하려고 하던 때에, 청년 윤동주는 '위험한 언어'로 '위험한 내용'의 시를 썼다. 그 언어의 아름다움과 내용의 깊이와 감동을 다른 나라 언어로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대한 흉내 내어보려고 하였다. 기존의 영어 번역들이 시인의 육필 원고가 아니라 편집자들에 의해 변형된 원고를 대본으로 하여서 아쉬운 점들이 많다. 그래서 품을 들여 다시 옮겼는데, 짧은 실력 탓에 어쩌면 더 못한 것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더 나은 표현이 있다면 제안해 주신다면 고마울 것이다. 


한글 시는 원래 시인이 썼던 언어의 음악적인 맛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육필 원고에 있는 어휘를 그대로 두었다. 다만 띄어쓰기만 현대 맞춤법에 따라 고쳤다. 영어 번역은 영어로는 좀 어색한 표현이 되더라도, 가능한 원래의 의미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 역동적 등가 번역(Dynamic Equivalence Translation)방식이 아닌 문자적 번역 방법을 택했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제2판, 2002)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고, Kyung-nyun Kim Richards와 Steffen F. Richards가 번역한 Sky, Wind, and Stars (Fremont, CA: Asian Humanities Press, 2003)을 참조하였다.


쉽게 씨워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 6. 3.



A Poem Written Easily



Outside the window a night rain whispers 

This six tatami-mats room is others’ country,


Despite knowing the poet is a sad vocation from heaven

Let me write a line of poem,


Having received [from home] my tuition in an envelope

That gives cozily off the smell of sweat and love


I tuck my college notebook under my arm

And go to listen to the lecture of an old professor.


On reflection, having lost 

One, two, and all of my childhood friends


For what

I am only sinking down alone?


People say human life is difficult to live out,

But this poem is being written so easily.

This is shameful.


This six tatami-mats room is others’ country,

Outside the window a night rain whispers,


After driving out the darkness a little by lighting the lamp,

The last I, waiting for the morning that will come like an era,


I offer my small hand to me and have 

The first handshake in tears and consolation.


June 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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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Yun Dong-ju (1917-1045)

Trans. Hyeokil Kwon

주말을 이용해 아내와 영화 〈더 폰〉(연출 : 김봉주)을 보았다. 유난히도 무서운 장면을 싫어하는 아내는 반 이상을 눈을 감고 귀를 막았지만, 나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최근 흥행한 〈베테랑〉(2015)처럼 폭력이 난무하지는 않지만, 〈더 폰〉은 어두운 화면과 긴장감이 가득한 음악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영화의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면, 2014년 5월 16일, 변호사 고동호(손현주 분)의 아내 조연수(엄지원 분)가 살해 당하는데, 그로부터 정확히 일 년 뒤인 2015년 5월 16일, 일 년 전의 아내로부터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2015년의 남편과 2014년의 아내가 함께 살인범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한다. 이와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 영화는 사건 당일과 일 년 후 같은 날 태양 흑점이 폭발하여 통신 전파 교란이 생겼다는 설정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이 이 이야기의 개연성을 높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생각할 점을 제공해 준다.

    

    먼저 이 영화는 우리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영화에서 2014년의 아내가 2015년의 남편과 통화를 통해서 다르게 행동하면 그 결과 일 년 뒤의 세계도 바뀐다. 곧, 오늘 현재의 세계는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인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밖에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심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과거의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생물학적으로 따져 올라가면, 부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그 끝에는 세상의 모든 존재의 원인인 신, 곧 창조자가 있다. (물론 내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과 현재의 나 사이에서 수많은 다른 요인들도 영향을 끼쳐왔다. 즉,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후에도, 타인의 선택, 환경의 영향, 나 자신의 선택들 등의 결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다루면 너무 복잡해지므로 여기까지만 언급하자.) 어쨌든 이 영화를 다시 반추해 보며, 더불어 나의 존재의 근원적인 원인이신 그분 안에서 나의 현재의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다음으로 영화처럼 '현재의 나'가 과거의 사건에 관여하여 현재를 바꿀 수는 없다. 사십 대에 들어선 이후 아주 가끔 '내가 이삼십 대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내 삶이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부질없다. 영화와 달리 현실은 과거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여전히 열려 있다. 오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아주 다르게 펼쳐진다. 영화에서 만약 2014년의 고동호가 한두 가지 '사소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는 완전히 다른 일 년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선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되돌리거나 후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야 한다. 바둑에서의 복기(復棋)와 같은 이치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현재의 선택이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를 최선의 선택들로 채워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도록(로마서 8:28)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좀 생뚱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이제 이 글을 여기서 끝내기로 선택한다. 

2015. 11. 2. 

Images from http://movie.daum.net




그러고 보니 올해는 결혼기념일 사진을 못 찍었다. 태평양을 건너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오는 시기와 겹쳐서 그냥 지나가 버렸다. 대신 결혼기념일 몇 주 전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 중 하나를 골라 놓는다. 이때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는 광야를 지나가던 중이었는데, 귀국 후 지금도 여전히 빛나는 협곡을 걸어 가고 있다. 그래도 이 여인과 함께라 얼마나 기쁘고 힘이 되는지…. 함께 걸어 주고 잘 버텨 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201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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