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그리운 어머니



사람이 그리운 어머니는 

TV와 함께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TV를 켜는 것으로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한다

간혹 일이 생겨 외출할 땐 

TV를 잠시 꺼두었다가

집에 돌아오면 다시 

TV 소리로 집안을 채운다

초저녁에 잠이 쏟아질 때면 

TV가 자장가를 불러주고

한밤중에 잠이 깨면 

TV가 불면을 함께 견뎌준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TV를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하루 정도 퇴원을 미루기도 한다

방음이 잘 된 집에서 적막하게

혼자 TV를 보는 것보다

병원의 다인실에서 사람들과

중요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 나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겐 층간 소음도 정겹고

창밖을 지나가는 자동차도 반갑다

여행을 가면 예쁘고 멋있는 경치보다 

별 볼 것도 없는 사람 구경이 재밌어

사시가 되어버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어머니는 

사람 사는 재미를 아는 분이다



2015.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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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으로 살아간다



매끈한 봉지 속의 막대과자들처럼 

지하철 객차 속에 빽빽히 들어서서

함께 흔들리는 우리는

서로 몸을 부대끼는 너와 나는

서로에게 투명인간이다 

무심한 듯 빈 자리를 다투는 

잠재적 경쟁자들이다


좁은 의자에 줄지어 앉아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서로가 내뱉은 공기를 들이마셔도

이상한 사람들 외에는

눈을 마주치는 것이 금지된

우리는 남남이다


서로의 체취를 외면하려

이어폰으로 귀를 막은 채

갑갑한 지하에서도

휴대폰만 손에 쥐면

짧은 손가락 끝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우리는

사회적 인간인 우리는

남으로 살아간다

우리란 남이다


2015.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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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1915-1968)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The Merton Seasonal 40, no. 1 (Spring 2015): 29-30에 기고한 에세이를 옮겨 놓는다.


 

Reconnection and Reformation:

A Korean Protestant Perspective on the Monastic Wisdom of Thomas Merton

 

 

What does Thomas Merton, an American Catholic monk, has to say to Korean Protestants today? The year of 2017 is the five hundredth anniversary of Martin Luther(1483-1546)’s posting of Ninety-five Theses on the door of the Wittenberg Castle Church, which was a historic event that sparked the Protestant Reformation in the 16th Century. After about five centuries from the Reformation movement, however,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which claims that she is a proud inheritor of the legacy and spirit of the Reformation, is strongly challenged to reform themselves both by their members and neighbor citizens. Then, how can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remain faithful to her identity as a church ever reforming herself. I believe that a crucial way is to reconnect herself to the Christian monastic tradition, from which the first Protestants cut themselves off in their reformation process. Yet, this idea may seem to fundamental Protestants very dangerous even heretical because Martin Luther and John Calvin(1509-1564), the two prominent leader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criticized the considered harmful effects and invalidity of the monasticism. To delve into this topic and to demonstrate the validity of reconnecting Protestant church to the monastic tradition, which has been an invaluable part of Christian spirituality and history, without denying the core spirits of the Reformation need a somewhat long discussion that is not allowed in this short essay. In my view, however, such reconnection is possible especially when we, Korean Protestants, take Thomas Merton as a gate to the deep-rooted monastic tradition.

As known well, Thomas Merton not only was well versed in the monastic tradition from the Desert Fathers and Mothers to the modern monastic movement, but also endeavored to hand down to the world the wisdom that he dipped up from his monastic life and studies. Although Merton usually had monks and nuns in mind as his primary readers or audience when he talked or wrote about the monastic life, he did not think that monastic wisdom was only for those who belonged to a religious order. He asserts that the adaptation of the monastic rule must be made, and the “variations in monastic observances are all good and all necessary, in so far as they make the monastic life accessible to all types of men.”[i] Therefore, I believe that for Korean Protestant, Thomas Merton, who had a deep interest and understanding in the Eastern spirituality, will be a helpful guide or at least an insightful interlocutor in adapting the monastic wisdom to the ordinary Christian life in the world as well as in establishing a Protestant monastic community. Also, Merton immersed himself in the monastic tradition and pursued a renewal of it, so his mature view on monasticism, which is both traditional and reformative, will help Korean Protestants to reform their church by reconnecting themselves not merely to the old monasticism but to the ever renewing monastic tradition. He writes that monastic tradition, “which is always old, is at the same time ever new because it is always reviving—born again in each new generation, to be lived and applied in a new and particular way.”[ii] In addition, I have contended in my unpublished paper that Merton read the Rule of Saint Benedict from the perspective of discipleship, and his understanding of the monastic life as a life of discipleship has valuable implications for Korean Protestant church in which discipleship is strongly recommended to her members as one of core ideals of the Christian life.

Although quite few Korean Protestants wish to live in a monastic community, now a day increasing number of them are attracted to the spiritual life or the contemplative life which is well developed and passed down through the monastic tradition. However, it is true that they have a few resources from which they can learn about the contemplative life. Thomas Merton who can serve as an experienced guide in such a pursuit is well known among Korean Catholics, but when it comes to Korean Protestants, he is far less known. Only one primary work and three secondary works have been published by Protestant publishers until now. Therefore, my wish for his one hundredth birthday is that more Korean Protestants find Thomas Merton as their spiritual friend and reliable guide in reconnecting themselves to the ever renewing monastic tradition.



[i] Thomas Merton, The Silent Life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1957), 61.

[ii] Thomas Merton, No Man Is An Island (San Diego: Harcourt, 1983), 151.



<목회와신학> 2015년 1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 놓는다. 잡지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원고가 축약되어 인쇄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전문을 게재한다. 아래의 글은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에서 연재하는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의 첫 번째 글이다.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연재를 시작하며

 


영성 목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실 영성 목회라는 말은 먹는 음식이라는 말처럼 우스꽝스러운 어구입니다. 원래 음식이란 먹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목회는 영성적(spiritual)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영성 목회라는 말이 종종 사용되는 현상은 먹지 못 할 음식들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처럼, 그만큼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영성적이지 않은 목회가 많음을 반증합니다. 또한, 원래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어떤 분들의 오해처럼 육체에 반대 되거나 세상과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영과 몸, 개인과 공동체, 교회와 세상을 포괄합니다. 기독교 영성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궁극적 진리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 영성 목회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육적인 측면을 배제한 영적인또는 신령한목회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성의 관점에서 본 참된 목회’, ‘본질에 충실한 목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경험을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육성하는 데에 초점을 둔 목회입니다.

 

최근 영성 목회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지만 이에 대한 좋은 자료들을 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영성 목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당장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영성 프로그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필자들은 목회의 기술또는 수단으로서의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사랑받아 왔고, 많은 영향을 끼쳐 왔던 영성 고전들 또는 영성가들의 작품들에 담겨 있는 목회에 관한 지혜를 열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합니다. 물론 영성 훈련 방법들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지만, 농사로 비유한다면 효과적인 영농법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바람직한 농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주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물론 짧은 글 속에 목회의 다양한 면들과 영성 고전에 담긴 풍부한 지혜를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 소개되는 통찰과 지혜들이 목회 현장에서 분투하시는 목회자들께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는 신학교나 교회에서 목회자들 또는 동역자들과 함께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자료로도 사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영성 목회라는 이 부끄러운 단어가 사라지는 날이 오길 희망하며,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일부.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1984)이라는 시는 한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경기도 안양의 한 변두리 동네에 위치한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찬송을 하여 교인들의 종교적 열광을 만족시키는 뜨거운목사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학생회 소년들과 텃밭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기도 하고, 읍내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는 목사 같지 않은사람이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설교는 집사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래서 장마통에 교인이 반으로 줄고, 그의 둘째 아이가 폐렴으로 죽자, 실망한 교인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능력도, 신유의 능력도 없는 그를 내쫒았다.


    이 시는 약 20여 년 전에 지어졌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섬기는 목자라는 전통적인 상식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목사들이 추구하거나 교회의 지도층들이 바라는 목회자상은 교인수와 헌금액수를 높이는 데에 유능한 지도자인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목회자의 궁극적인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 가깝다. 너무나 뼈아프지만 사실이 그렇다. 신제품을 발표하는 스티브 잡스의 쇼맨십을 흉내 내어 설교단에서 복음을 물질적 욕망 충족을 위한 소비재로 변질시켜 온 것이 우리 목회자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유구한 기독교 역사에서 탁월한 목회 지침서로 사랑받아 온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I: 540-604)목회 규칙(Regula Pastoralis)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목회자들에게 도움 될 만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 (목회자의 자질)


    목회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눈에 보기에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는 목회를 하는 이들도 이 주제에 대해서라면 며칠을 밤새워서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도 그의 목회 규칙을 시작하며, 리더가 지고 있는 부담과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어려움은 흔히 이야기 되는 목회 스트레스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거룩한 직함이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교회에서 더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없다. …… 만약 그 죄인이 그 성직에 주어지는 존경을 받는다면, 그의 불법이 예가 되어 멀리까지 미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I.2). 오늘날 목사또는 장로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의 각종 불법으로 인해 한국 교회와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혹독한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그저 좋은 옛날 말로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의 위치가 이처럼 부담이 큰 자리이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요약해서 말하면, 배우고 공부한 것을 말로 가르치면서도 삶으로는 실천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겔 3418-19절을 인용하며, 자신은 맑은 물을 마시면서 양들에게는 자신의 발로 더럽힌 흙탕물을 마시게 하는 목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이 경우 양떼는 그들이 귀로 들은 가르침이 아닌, 그들이 목격한 목자의 오염된 행동을 모방하게 된다(I.2). 그러면 말과 행동또는 앎과 삶사이의 간극은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


    이 책 111장에서는 지도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의 유형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먼저,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자신이 마땅히 가야하는 바른 길을 알고, 또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고결한 삶의 습관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종종 악한 습관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습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규칙이다. 규칙은 습관과 리듬을 만들고, 습관과 리듬은 규칙을 실천하는 사람의 존재를 형성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과 허버트의 시골 목사는 목회자가 바람직한 삶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규칙들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습관은 단순히 행위의 반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위는 내면의 생각과 바람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는 습관을 형성하는 내면의 생각과 동기에 주목한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육체의 음탕함에 지속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 또는 탐욕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정욕과 탐욕이 생각의 영역에서 진압되지 않으면, 외적인 행동에서 주도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탐욕은 다른 악들과 쉽게 결합해 그 사람 전체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뿌리 뽑혀야 한다. 또한 무거운 땅의 염려는 아예 사람의 등을 굽게 만들어 고개를 들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I.11).


    그런데 이 유형들보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선과 악을 바르게 식별하는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I.11). 이것은 바둑판의 흑돌과 백돌처럼 옳고 그름의 구별이 뚜렷한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마주치는 많은 문제들은 그 본질이 미묘한 경우가 많아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그것이 인간의 내면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I.1). 비슷하게 조지 허버트는 시골 목사에서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악덕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탐욕식탐은 그 시작이 불명확하고 속이는 성격이 있어서 자세히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탐욕에 대한 설교를 듣고 탐욕을 정죄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24).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불명확한 악덕들에 대한 정확한 식별 기준을 익히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사가 필요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집을 구입한 교인의 집에 가서, 집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좋은 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집을 축복함으로써 그 사람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1세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 ho Nazianzos: 329-390)의 견해를 받아들여, 영혼을 돌보는 것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능숙함을 필요로 하는 예술 중의 예술이며, 목회자는 마음과 생각의 의사라고 높이 평가한다(I.1).


    목회가 이렇게 높은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교만에 빠질 위험도 매우 높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겸손이 반드시 요청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지혜나 진리에 대한 오만한 추측으로 눈먼 자또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언한다.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보편적 진리로 절대시 하는 이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매우 안타깝게도 실제로 이런 경직된 사고에 갇혀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신성한 관조(contemplation)의 빛에 대해서 무지하여, 곧 우리의 매일의 삶의 경험에 빛을 비춰주는 하나님 경험이 매우 얕거나 없어서, 어둠 속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이다(I.11). 만약 지금까지 언급한 유형들 중에 자신이 속해 있고, 그러한 약점들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면, 그 사람은 목사라는 직함을 내려놓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악한 모델로 다른 사람들까지 타락시키는 것보다는 혼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형벌이 덜할 것이라고 권면한다(I.2).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드러난 자신의 약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이나, 좀 더 영성적인 목회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살펴보자.

 


조화로운 삶, 전인적인 돌봄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으로 지명된 첫 번째 수도자이다. 그는 삼십 대 초반에 시의 집행관이 되었으나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 수도 생활의 이상을 좇아 정치계를 떠났다. 그러나 그의 영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한 이들에 의해 그는 오십 세에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수도자가 된 그에게 교황의 직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적인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마음이 산만해지고, 자기 성찰을 빠뜨려서 죄에 빠질 위험이 높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목회 사역의 가장 큰 부담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관조하는 것과 외적인 활동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매우 노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지도자들은 외적 문제들에 몰두하여 내적 생활에 태만해지거나, 내적 생활에 대한 갈망으로 외적 문제들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내적으로 피폐해지고, 반대로 내적 자아에만 정신을 빼앗기면 이웃들에게 필요한 외적 돌봄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II.7). 구체적으로 그는 어떤 지도자들은 종종 일중독자(workaholic)가 되어 외적인 일들이 끝나면 내적 공허와 무질서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들은 자신들의 삶도 점점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돌보는 영혼들 중에 영적으로 진보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도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 반대로 지나치게 영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들의 설교에는 청중들의 현재적 삶에 필요한 것들이 결여 되어 있는 것과, 그들의 말이 듣는 이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II.7).


    조지 허버트 역시 시골 목사에서 목회자의 외적 활동에 대한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생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목사들은 특히 영적 교만과 마음의 불결함에 빠지기 쉬우므로 밤낮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9). 여기서 마음의 불결함(impurity of heart)”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5세기에 세속 도시를 떠나 마음의 청결함(purity of heart)’을 추구하며 사막으로 나아갔던 수도자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세속화되어 가자,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불모의 땅 사막으로 나아가 그들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고 그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허버트는, 목사는 이와 같은 초기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종종 읽어서 그들이 평안할 때에 어떻게 매일매일 인내하고, 절제하며, 유혹을 이겨내고, 겸손을 훈련했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비록 허버트의 시골 목사나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은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없지만, 사막 수도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모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여러 출판사에서 역간되었으니, 오늘날 영성 목회를 추구하는 목회자들이라면 반드시 가까이에 두고 읽으며 마음의 청결함을 지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나 허버트가 이렇게 내적 생활을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목회자가 자신의 내면의 은밀한 악과 유혹을 분별할 수 있어야 자신이 섬기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허버트에 의하면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사는 여가 시간에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 그는 거기서 양떼를 생각하며 두 종류의 악[탐욕과 식탐][그 악들에 사로잡힌] 두 종류의 악한 사람들을 발견해야 한다.”(24). 허버트가 성찰과 식별을 위해 제시한 공간은 언덕 위이다. 언덕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의 거리가 형성되고 익숙한 것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 낯익은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한다. 허버트가 말한 언덕 위는 이런 창조적인 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며 새롭게 바라보는 공간이다. 또한, 언덕 위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목회자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언덕 위에 서는 이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내면의 생각과 움직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신다. 조지 허버트의 시골 목사에서 말하는 시골 목사17세기 영국 각 지방의 교구를 섬기는 목사들이다. 당시 영국의 지역들은 대부분 전원적인 환경 속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조망을 얻을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각자의 언덕을 찾아야 한다. 여가 시간을 게으르게 보내거나 일시적인 즐거움을 좇는 데에 사용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바쁜 목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언덕위에 올라야 한다. 특히 한 주간의 사역이 끝나는 주일 저녁이나 월요일을 성찰을 위한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허버트는 교구민들의 내적 생활뿐만 아니라 외적 생활, 또는 일상생활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골 목사는 자신의 교구에서 필요하면 법률가와 의사의 역할도 도맡아야 하며, 교구민들의 일상생활에 일어날 법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사전에 숙지하고 대비해야 한다(23).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의사와 법률가가 드물었던 ‘17세기 영국 지방 교구라는 특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오늘날 일반적인 한국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목회자가 세상살이에 대해서 아는 체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목회자의 역할을 교회 안으로 제한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 사역은 시간적으로는 주일’, 공간적으로는 교회에만 한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그레고리우스의 견해를 요약하면 영적인 일들은 성직자가, 세속적인 일들은 평신도들이 담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가 양떼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설교가 청중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설교의 효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에게 있어서 목회또는 목양은 양떼들에 대한 전인적인 돌봄을 의미했다. 이런 맥락에서 목회자는 교인들의 물질적인 삶, 일상적인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평신도들이 많은 오늘날, 목회자가 모든 일들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주변에 그 일을 감당할 전문가들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레고리우스가 목회 규칙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일흔두 가지 종류의 다양한 청중들에게 각각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할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인간 삶의 모든 측면들을 목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허버트는 목회자는 자신의 교인들의 질병뿐만 아니라 시대의 질병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목회 활동의 영역이 필요한 경우에는 교구(교회)의 범위를 넘어서야 함을 시사한다(32).


나의 목회 규칙


목회자의 소명은 종교적 기업가들의 전략에 의해 사업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 내가 속해 있는 문화적 조건들은 예수의 방식 그대로 그분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나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매우 유해한 문화적 오염원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의 회고록 목회자(The Pastor)에서 오늘날 급변하는 미국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목회자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이 의미를 잃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목회자의 소명 자체도 물질주의, 소비주의 문화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많은 면에서 미국 교회를 닮은 한국 교회의 사정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시리즈의 첫 번째를 목회자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글로 시작한 이유는 영성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영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삶으로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야 교인들도 일상 속에서 깊이 있고 풍요로운 영성 생활을 살도록 도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가 각자 자신 만의 목회 규칙을 만들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목회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결심문들을 읽다 보면, 그가 자신의 삶에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지 허버트는 자신의 규칙이 완결된 것이 아니며, 독자들의 첨삭을 통해서 보다 완성된 목회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목회 규칙이 필요한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동역자들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 나의 목회 규칙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사막의 모래보다 뜨거운 하늘
하늘의 노을보다 붉은 심장을 가진
아름다운 벗을, 가족을
기나긴 여행길에 만나고 헤어지다
오늘도 짧은 순간 
노을을 만나고 헤어지다
가슴이 살며시 떨리다


2015. 1. 20. / Yuma, Ariz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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