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대의 마법



자동차 두 대가 시비가 붙어

서로 잘났다고 경음기를 울려댄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더니

씩씩거리며 앞차를 쫓아가는 금발의 여성

‘조금만 참지’ 고개를 흔들며

다시 내 갈 길을 가는데

앞에서 거리의 낙엽을 치우던 

멕시코계 청소부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두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는 말

“미쳤군!”

나도 씨익 웃으며 화답하다가

그 옛날 부산의 어느 복잡한 사거리에서

운전대의 마법에 걸려 이성을 읽고

경음기를 주먹으로 내려쳤던 기억이 

뒤통수를 치며 시끄럽게 떠올라 

바닥의 낙엽처럼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하마터면 청소부의 빗자루에 쓸려갈 뻔했다


2014.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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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와 나



맑은 공기 들이려고 창문 하나 열었는데

눈치 없는 파리 한 마리 쏘옥 들어온다

찝찝한 액체로 손을 더럽히기 싫어

창문을 모두 열고 의자에 앉아

불청객이 나가기를 기다리는데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파리는

내 눈앞만 골라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성가신 녀석을 외면하려고

아예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기는데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금새 날아가고

웬 똥파리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마음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똥을 사랑하는 파리가 이렇게 꼬이는 것은

분명히 내 속에 퍼질러 놓은 똥이 있어

쓰레기 처리장처럼 역겨운 

냄새를 풍기기 때문일 게다


2014.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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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6. 수.


블랙 프라이데이가 코앞에 다가 왔다. 온라인에서는 벌써부터 각종 할인 행사들이 진행 중이다. 이메일은 매일같이 블랙 프라이데이 딜을 알리는 광고 메일로 붐빈다. 그러다 보니 내 속의 욕망도 꿈틀거린다. 평소에 눈여겨 봐왔던 컴퓨터와 악기 등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을 이용하는 해외직구족도 늘었다는데, 미국 현지에 사는 나는 더더욱 이 쇼핑 대열에 참여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느껴진다. 더군다나 이제 얼마 후면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재정이다. 다달이 월세와 학비를 내기에도 빠듯한 형편에 아무리 할인을 많이 한다고 해도 고가의 랩탑이나 악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쉽게 지갑을 열 수가 없다. 그래서 정말 꼭 필요한 것만 사야 하는데,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면, 수명이 다되어 가기는 하지만 지금 랩탑도 여전히 돌아가고 있고, 기타도 좀 낡았지만 나의 연주 실력에 비하면 과분한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새로운 '장비'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을까? 


저녁을 먹고 오늘 새로 배송된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를 읽는데, 저자가 해방 후 한국 현대사를 '자유와 존엄에 대한 열망'과 '물질에 대한 욕망'의 투쟁으로 보는 부분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난 평소 물질에 대한 욕망을 저급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자유나 존엄, 또는 진리에 대한 열망을 희생시키는 것을 비판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아 물질에 대한 욕망에 따라 질주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슬쩍 끼어 들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다른 열망, 곧 가난한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 가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은 블랙 프라이데이의 검은 욕망에 밀려 거의 질식해 가고 있는 상태이다. '오직 주님만이 저의 전부입니다.' '주님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라는 고백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듯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서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는 소비욕은 오직 '소비적인' 욕망일 따름이다. 충족되지 않는 블랙홀과 같다. 밑빠진 장독과 같다. 그분의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부족한 재정 상태가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질적인 결핍 때문에 거룩한 욕망의 결핍을 깨닫게 되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내일 땡스기빙 데이를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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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끈



늦가을의 어느 화창한 날

학교를 떠난 선배가 다시 찾아 왔다.

공부를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 간 그가

휴일을 맞아 고향 같은 동네로 와서

사람들을 모아 밥을 사고 커피를 사고,

여전히 길게 늘어진 가방끈을 맨 채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사는 이들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경험담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봄, 자목련이 예언처럼 피어나던 날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미련도 없이 낯선 곳으로 떠났던 그.

귀밑머리 새치와 눈가 주름은 여전한데

어딘가 모르게 그가 깊어져 가고 있다

어느 깊은 시골 뒷마당 장독 속에서

정좌하고 묵상에 잠긴 된장처럼.


날씨는 더없이 맑고 바람은 시원하고

얘기는 즐거워 웃음이 그치지 않는데

내일은 짙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각자의 시간과 가는 길은 다르지만

모두가 구름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

누구는 가방끈을 놓고, 누구는 쥐고

날마다 눈을 뜨고, 눈을 감지만

보장된 미래도, 부르는 소리도 없어.

어둡고 갑갑한 세상 이야기로

한숨과 한탄이 이따금 새어나오지만

그래도 파도처럼 어깨를 건 

도반들과 함께 창밖의 나무만 봐도

얼굴에 슬며시 번지는 아이 같은 미소.



201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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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3. 추수감사주일.


지난 부활주일과 비슷하게 이번 추수감사주일도 찬양 인도를 준비하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정말 큰 재난을 당하거나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모든 일에 '감사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이다. 대내적으로도 그렇고, 대외적으로도 그렇다. (이전에 어머니께서 신앙 생활을 하지 않으실 때 가까이 지내시던 기독교인들은 항상 '감사'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바울의 명령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것, 그리고 하박국의 고백처럼 결핍 가운데 있을 때에도 감사하는 것은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재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모든 일들에 감사하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는 것조차 억압당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고통에 깊은 공감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감사하라'는 말대신, 그들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 슬픔과 고통의 원인이 제거되어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으로 함께하고 몸으로 행동한다면,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범사에 감사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하고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기준으로 오늘 나의 사역을 돌아 본다면 그리 잘 한 것은 아닌 듯하다. 큰 병에 걸린 가족을 두고 있는 교우의 고통과 슬픔에 몸으로 함께 하지 못했다. 또한 감사에 대한 이런 생각들을 찬양을 인도하며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한 가사의 곡들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멘트를 통해서도 회중들의 생각과 노래를 적절하게 인도하지 못했다. 이십 년 가까이 찬양인도를 해왔는데, 그리고 공식적인 '찬양인도자'라는 타이틀을 내려 놓을 때가 다가 오는데 나는 아직도 너무나 서투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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