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는 많은 정보들이 있지만, 그 중에는 왜곡되거나 잘못된 정보들도 있다. 특히 개신교들이 가톨릭이나 타종교에 대해 편향된 시선으로 잘못된 정보를 생산,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잘못된 정보가 여과 없이 유통되어 다시 편향적인 사고를 낳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아래는 예수회의 창설자이자, 가톨릭 종교개혁의 핵심 인물이었던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관련하여 얼마 전 SNS에서 주고 받았던 질문과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이냐시오가 트렌트 공의회에 참석해서 가톨릭 신학을 확립하고 루터주의자들을 배격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오해에 대해서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와 그에게 영성 지도를 받은 동료들에 의해 1540년에 공식 창설되었습니다. 8명의 창설 멤버들 중 대부분은 파리 대학에서 공부한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이에 교황 바오로 3세는 1545년 트렌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를 소집할 때, 이냐시오에게 연락하여 그의 제자들 중 몇 명을 교황의 신학자로 공의회에 참석케 하였습니다. 그래서 디에고 라이네스(Diego Lainez)를 비롯한 4명의 예수회원들이 신학자의 자격으로 트렌트 공의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때 예수회의 수장인 이냐시오는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참석하는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도록 주장을 분명하게 말하되 말할 때는 상냥하게 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여 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침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냐시오는 차이점이 극명한 신학적인 토론에서도 개신교도인들과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공의회에 참석한다면 연단에서 개신교와와 가톨릭의 차이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습니다여기서 그가 논쟁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차이점들이라는 단어를 쓴 데서 그가 개신교와의 관계에 있어서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그런데 실제 토론에서 열정적이고 격분한 라이네스가 자신들의 수장의 명령을 어기고 적대적인 태도로 상대방(Girolamo Seripando)을 ‘사냥’하였습니다. 세리판도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소속의 수도자로서 의인화에 대한 가톨릭과 루터주의자의 견해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또한 라이네스는 자신보다 20년 연장자인 도미니칸 신학자 Fray Melchor Cano와 격렬한 토론 끝에 욕설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이냐시오의 질책은 통렬했습니다. 그래서 라이네스는 이냐시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을 책벌해 주기를 간청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냐시오는 트렌트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트렌트 공의회는 1545년에서 1563년 사이에 3차에 걸쳐 소집되었는데, 이냐시오는 3차가 열리기 전인 1556년에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라이네스가 1-3차 모두 참석하면서 트렌트 공의회에서 루터의 사상을 배격하고 의인화(justification)와 성례(sacrament)에 관한 가톨릭 신학 체계를 세우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트렌트 공의회의 ‘영웅’이었고 이를 통해 교황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는 루터주의자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와도 많은 논쟁을 하였는데, 이와 같이 개신교 진영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라이네스가 이냐시오의 사후 제2대 예수회 총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이후 예수회가 개신교 진영과의 논쟁에서 가톨릭의 최선봉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냐시오가 개신교도들을 암살했다는 오해에 대해서

     이냐시오가 개신교도들을 암살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으나 위와 같은 일화를 볼 때에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 같습니다. (만약 역사적으로 그런 사실이있다만 정말 알고 싶습니다. 한 한국인의 블로그에서 이냐시오가 1641년 10월과 이듬해인 1642년에 개신교인 4만명 이상을 학살했다는 주장을 읽었는데, 이냐시오는 이미 1556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또는 1641년이 아니라 이냐시오가 살아있던 1541년의 오타라고 간주해도, 그때는 예수회가 갓 설립된 때였기 때문에 그 정도의 학살을 행할 수 있는 힘도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헨리8세의 통치 아래에 있던 아일랜드에서 이냐시오가 그런 대규모의 학살을 감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다만 1572년 프랑스의 여러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성 바돌로매 날의 대학살때에, 한 지방에서 에드몽 오제(Edmond Auger)라는 예수회 사제의 설교가 사람들을 충동하여 학살에 나서게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 1556년에 사망한 이냐시오는 이 대학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오제는 자신이 속했던 예수회 설립자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냐시오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후계자(예수회 총장) 중의 한 명이라고 평가 받는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1907-1991, 제28대 예수회 총장)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인한 대량학살을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아루페는 예수회가 남미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난과 불의에 저항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활동하도록 이끈 인물입니다. 물론 이냐시오는 중세 시대 사람이었고, 그래서 십자군 정벌에 나선 이들을 위해 교황에게 편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가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예수회 소속의 신부들이 개신교와의 관계에서 저지른 잘못들은 그들이 설립자의 정신과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구현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회 모교회에 있는 조각상에 대해서

     로마에 있는 예수회 모교회(mother church)에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내용이 담긴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교회의 승리"라는 조각상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회의 대본당인 로마의 예수교회(Church of the Gesù)에 있는 작품은 루벤스의 “교회의 승리”(http://bit.ly/1lqEjD9)가 아니라 피에르 르 그로(Pierre Le Gros the Younger)의 “Religion Overthrowing Heresy and Hatred”(http://bit.ly/1ddjCsr)라는 작품입니다. 이 조각상에서 한 손엔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엔 벼락을 쥐고 있는 젊은 여인은 종교를 상징하고, 늙은 여자는 ‘증오’를 그리고 아래의 늙은 남자는 ‘이단’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여인의 옆에 서 있는 아이(putto)가 찢고 있는 책은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것이고, 늙은 남자 아래에 깔려 있는 두꺼운 책에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http://bit.ly/1cqfZes). 그런데 이 교회(Church of the Gesù)는 이냐시오가 건축할 뜻을 갖고 있었지만 시행하지 못했고, 그의 사후인 1568년에야 건축이 시작되어, 내부 인테리어는 3-4백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의 조각상은 예수회 화가/건축가인 Andrea Pozzo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그로가 1695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 조각상과 이냐시오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 조각상을 근거로 이냐시오가 개신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다. 다만 위에서 말씀 드린 라이네스의 영향과 예수 교회의 건축과 내부 인테리어가 진행되던 시대의 분위기로 인해서 이러한 조각상이 세워진 듯합니다. (아마 이냐시오의 생전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내부 인테리어가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이 조각상은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냐시오와 가톨릭 종교개혁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이냐시오로 돌아와서, 이냐시오는 뛰어난 신학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깊이 헌신된 영성가였고, 탁월한 조직가였고, 영성지도와 빈민 구제 등에 헌신한 활동가였습니다. 그는 신학적 논쟁이나 개신교 진영의 확장에 맞서서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아있는 이냐시오의 글들에는 개신교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의 관심은 주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교육하고, 선교하는 데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많은 신비 체험을 했지만, 영성 지도를 할 때에 신비적 체험 자체를 추구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영신수련>은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깨달음을 갖고,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수련자를 형성하는 데에 초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냐시오는 중세라는 시간과 스페인이라는 공간에서 형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사람 이냐시오는 오늘날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 몇 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은 종교개혁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확고한 가톨릭 국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종교/문화/사회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 속에서 그의 영성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트렌트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논의된 신학적 논쟁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표명했는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1,2차 트렌트 공의회에서 주장된 가톨릭의 신학적 입장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예수회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가치 중의 하나가  ‘순종’입니다.)

      흔히 이냐시오가 주축이 되었던 가톨릭 개혁운동을 '반종교개혁(反宗敎改革)'이라고 번역해서 부릅니다. 이 용어만 보면 가톨릭종교개혁이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운동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릅니다. 그것은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을 반대하는 운동이라기보다는 프로테스탄트측의 개혁운동에 대응하는 가톨릭측의 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Anti-Reformation'이 아닌 'Counter-Reformation'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 1542-1591),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와 같이 가톨릭 종교개혁 운동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에 대해 일부 개신교인들은 반감을 가지고 그들의 영성을 언급하는 것조차도 거부합니다. 어쩌면 이들의 '방해'로 개신교가 영역을 더 확장하지 못 했다며 아쉬워하거나 분해하는 분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 가톨릭교회 안에 이와 같은 개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가톨릭교회가 문을 닫지 않고, 개혁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봅니다. 그 세 사람은 모두 스페인 사람들이며, 부패한 가톨릭 내부에서 개혁을 진행하면서 개혁을 거부하는 세력들에 의해 많은 핍박 또는 종교재판까지 받았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의 영성 형성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저의 졸고 "어둔 밤을 걸어간 맨발의 수사" (nephesh.tistory.com/4)를 참고하십시오.)

     종교개혁 당시 루터와 칼빈 등의 개신교 개혁자들이 신앙과 교회의 회복을 위해 당시 가톨릭교회 밖으로 (쫒겨) 나와 새로운 분파를 만들 때 미쳐 가지고 나오지 못한 기독교회의 좋은 영적 유산들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위에서 언급한 개혁자들의 헌신과 분투를 통해서 그 영적 유산들을 보존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것이 개신교회가 기독교의 영적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리고, 깊이 있는 영성을 형성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 교회가 모두 문을 닫아서 사라져 버렸다면 지금의 교회는 과거의 영적 전통과 많은 부분 단절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가톨릭과 개신교는 신학과 성경 해석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핑계 삼아 가톨릭이 보존해오고, 발전시키고 있는 좋은 영적 유산들까지 통째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에도 그의 가르침들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예 :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명령하는 부분) 당시의 사회, 문화, 종교적 상황들을 고려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종교개혁시대의 가톨릭 종교개혁가들의 글과 영성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신교의 교리나 현대적 상황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벗겨내고서 가치 있는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적용한다면 우리 개신교 영성을 풍부하게 하는 데에도 큰 유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들을 '가톨릭적'이라는 색안경으로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분별적으로 받아 들여서, 개신교 전통 속에서 우리의 처지와 오늘날의 시대에 맞게 잘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베리아 반도가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스페인의 신비가들이 이슬람 신비주의(수피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제가 '이슬람 신비주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어서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중세 스페인의 신비가/개혁가들의 사상과 비슷한 부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코넬 대학교(Cornell University) 신디아 로빈슨(Cynthia Robinson) 교수는 중세 스페인의 성화들을 분석하고서 이슬람과 유대의 신비주의가 스페인 신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네요(http://bit.ly/1dDgcKX). 그런데 반대로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습니다. 


"그들[수피주의자들]은 점차 기독교, 신플라톤주의, 그노시스 교(신비주의와 결합된 기독교), 불교 등의 교리와 이론을 받아들여 신학이론과 수도방식을 정립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 신비주의 (바그다드, 2005.4.10, ㈜살림출판사) (http://bit.ly/LQSfsW)


     그래서 제 생각에는 유럽에서 종교/사상이 발전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페인 신비가들의 사상에 나타난 특징, 요소들이 기독교 전통에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이라면 이슬람이나 유대교의 영향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미 기독교 전통에 존재해 온 것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여 거부할 필요는 얺을 듯합니다. 이냐시오, 십자가의 요한이나 테레사의 신비주의 같은 경우에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그 뿌리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영성이 성서(해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틈이 날 때마다 성서를 읽었다고 합니다. 이냐시오는 색소니의 루돌프(Ludolph of Saxony: c.1295-1378)의 Vita Christi[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회심하였는데, 이 책은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의 자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이냐시오의 영성에서 아주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잘못된 신비의 관념에 대하여

     다음으로 한국 교회에서 신비에 대해 잘못된 이해가 존재한다는 문제점들은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신비'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면서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 신비일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닮는 '변화/변혁'이 일어 나지 않는 '신비'는 참된 신비가 아니거나 이미 신비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참 신비를 경험한 사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처럼 겸손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참된 신비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떠벌리지 않습니다. 참된 신비 체험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는 순간 신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서 사셨던 것처럼, 신비란 일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일어난 신비한 사건들, '오병이어' 등과 같은 신비들은 일상에서 일어 났습니다. 그러므로 일상과 괴리된, 일상을 벗어난 신비의 추구 또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 안에 널리 퍼진 잘못된 신비의 개념들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한 스페인의 신비가들은 모두 일상/현실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신비 또는 contemplation이란 현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그리스도의 왕국)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조

Ignatius of Loyola. "To the Fathers Attending the Council of Trent" (http://bit.ly/1gihM9z).

Jean Lacouture. Jesuits: A Multibiography. Washington, D.C.: Counterpoint, 1997, 80-82.

Cynthia Robinson. Imagining the Passion in a Multiconfessional Castile: The Virgin, Christ, Devotions, and Images in the Fourteenth and Fifteenth Centuries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13.


2014. 2. 10.

2014. 2. 15. 토.


또 한 분의 아버지께서 '세상을 배리셨다'. 방금 동생이 전화로 큰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한국 시각으로 2월 16일이니까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날과 같은 날이다. 아버님의 형제 분이 이 세상을 떠나시니 아쉬움이 그지없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오셔서 소리 내어 우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형제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이란 참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세상에 남은 이들과의 이별이지만, 먼저 간 이들과의 재회이기도 할 것이다. 약 9개월 전에 먼저 하늘 나라로 가신 아버님께서 큰아버님을 기쁨으로 맞으실 지도 모르겠다.

사도행전 5장


     사도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고 믿는 무리들이 늘어나는 것이 눈에 보이게 되자(12-16절),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그들의 몸을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밤 사이, 하나님의 천사가 경비병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그들을 감옥에서 이끌어 내었다. 다음날 감옥에 있어야 할 제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자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은 매우 당황하였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제자들을 잡아다가 다시 그들의 눈앞에 데려 왔다. 그리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제자들의 몸을 때리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하고는 놓아 주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가말리엘이 예로 들었던 드다나 갈릴리 사람 유다의 경우(36-37절)와는 달리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 받는 것을 기뻐하며, 계속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고 가르쳤다(41-42절). 


     대제사장, 성전경비대, 공의회원들은 '눈에 보이는 제자들의 몸'을 가두고 때림으로서 복음의 확산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것 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눈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없이는 눈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을 막는다고, 복음을 막을 수 없다. 또한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을 웅장하게 짓는다고 해서 복음과 교회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다. 두 가지 다 복음과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접근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행전 5:1-11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부부는 자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자신들의 행위는 물론, 마음속의 욕심까지도 감출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잃게 된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우울해 하거나 우쭐해 하지 말자.


2014. 2. 12.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게,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합시다." (사도행전 4장 16-17절 / 새번역)


죄를 지은 이들은 자꾸만 감추려고 한다. (1)자신들이 지은 죄악을 은밀하게 감추려고 하며, (2)사람들이 진실을 밝히 보지 못하도록 덮고 감추려고 한다. 이것이 악의 전략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고침을 받은 사람과 함께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들이 지혜롭게 말하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진실이 사람들에게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도록 협박하였다. 오늘날 언론을 통제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심리가 아닐까? 그들은 사람들이 진실을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꾸만 진실을 감추려고 한다. 사실을 왜곡, 조작, 은폐하려고 한다. 마치 예수의 부활 이후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낸 이들처럼 말이다(마 28:12-13). 


그러므로 진실을 왜곡, 은폐하는 세력들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을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앎과 깨달음은 죄와 악에 저항하고 승리한다. 종교 지도자들의 협박은 진실을 감출 수도 왜곡할 수도 없었다.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은 더 힘있게 전진해 나갔다(행 4:31, 딤후 2:9 참조). 그러므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는 진실을 알리는 사람들이다. 복음의 핵심은 진실이다. 그 진실은 몇 가지 교리적인 명제들 속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진실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만 국한 되는 '종교적인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이 세상의 역사적, 사회적 진실을 포함한다.


진실은 일시적으로 가려질 수 있어도 끝까지 숨겨질 수 없다. 진실은 결국에는 밝히 나타난다. 그것이 진실이다. 진리이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0장 26절)


201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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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1



사람들의 눈길이 부끄러워

밤에만 피어나는 당신은

보름달 머리에 이고 대문 들어서던

내 젊은 어머니

그리운 얼굴 같이

어둠이 어스름 짙어오는 이 밤

웃음을 머금은 수백 개의 달로 

환하게 피어오릅니다



97. 3. 





목련2


수년 전 

당신의 화사한 은총 아래서 

만났던 그 사람을

오늘 당신의

흔들림 속에서 보았습니다


옛 일기장을 넘겨보는 날

하이얀 당신의 웃음이

보드레한 당신의 속살이

내 마음 빨개지게 합니다



97. 3. 






대학시절 도서관 앞의 하얀 목련이 얼마나 곱고 순결했는지, 공부하다가 잠시 바깥에 나와 그 앞에 설 때면 마음이 설레이곤 하였다. 못생긴 글이지만 오랜만에 이 시들을 읽으니 그 목련이 눈앞에 환히 피어나고, 마음도 설렘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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