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7-18. 금-토.


거제도로 계획에 없던 여행을 왔다.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드리고 허전해 하실 어머니를 위해 삼남매가 함께 뭉쳤다. 마침 동생 내외도 휴가가 며칠 더 남았고, 자형의 배려로 누나도 집안 일로부터 며칠 간 휴가를 얻었다. 그리고 나와 아내, 상속절차를 비롯한 각종 뒷일들을 도맡아 처리하기로 했지만 아버지의 사망신고가 처리되기까지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 갑자기 떠나온 여행이라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마침 공휴일이 낀 연휴라 피서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숙소도 유람선 표도 어렵게 구했다. 길은 막히고 뭔가 딱딱 들어 맞는 것은 없지만,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좋다. 어려운 일을 함께 겪으면서 가족들 사이에 정이 더욱 끈끈해 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관광지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숙소로 가는 길에 한적한 어촌 마을에 들러서 저녁을 먹는다. 섬들이 묵상에 잠겨 떠 있는 바닷가 마을, 나중에 이런 데서 살아도 좋겠다며 아내가 이야기한다. 해가 지는 조그만 항구에 서니 대학 시절 읽은 시가 한 편 생각난다. 


바다에 오는 이유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모두 버리러 왔다


몇점의 가구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인장과

내 나이와 이름을 버리고


나도

물처럼

떠 있고 싶어서 왔다.


- 이생진


우리는 왜 이 바다에 와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할까? 안타까움도, 죄송함도, 분노도, 그리움도, 후회도 이제 버려야 한다. 버려야 흐르는 물처럼 떠 있을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 




2013. 5. 15. 수.


"어서 일어나! 어머니는 벌써 정리를 시작하셨어."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겨우 잠에서 깨었다. 장례를 치르는 지난 3일 동안 거의 자지 못했기 때문에 몸이 매우 무겁다.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가보니 어머니는 벌써 옷장에서 아버지 옷들을 모두 꺼내놓고 정리하고 계신다. 집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빨리 지우고 싶어서 그러신 걸까? 그러나 난 아버지가 남기신 메모지 한 장도 버리는 것이 주저가 된다. 사실 지금까지 난 아버지를 정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유품들 속에는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들이 배어 있다. 그리고 그 모습들 속에 낯익은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오후에는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였다. 내 출생 신고는 아버지께서 하셨는데, 아들인 나는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한다. 부모는 자녀가 이땅에 태어나는 것을 환영하고, 자녀는 부모가 이땅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한다. 나보다 이 땅에 먼저 오신 아버지의 사망확인서와 화장신청서에 서명을 하고, 사망신고를 하는 것도 이렇게 비통한데, 아들이나 딸을 먼저 보내는 참척(慽)의 경험을 하는 이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할 수 없다.  


사실 어제 오후, 장례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예금 상속 절차를 알아보려고 아버지의 통장을 들고 은행에 갔는데 마침 평소 아버지께 친절히 대하던 은행원을 만났다. 그런데 그분의 "힘 내세요."라는 말 한 마디에 눈물이 쏟아져 질문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은행을 나왔다. 아버지의 통장을 넘겨보니 늘 잔고가 많지 않았다. 드물게 목돈이 들어 오는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대부분의 금액이 어머니의 통장이나 내 통장으로 이체되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아버지께 짐이 되어서 그 죄송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전에는 공부가 끝나면 최선을 다해 갚으리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2013. 5. 16. 목.


장사를 지낸 지 세번 째 날을 맞아 다시 추모관으로 갔다. 평소 아버지의 바램은 화장 후 땅에 묻히시는 것이었지만, 부산 인근에는 수목장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아직 없어서 일단 아버지의 유골을 사설 추모관에 모셔 두었다. 사용기간이 15년으로 제한되어 있는 시립 납골당과 달리 이곳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땅에 영구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추모관 안에 재가 되어 놓여 있는 유골들이 이땅엔 영원한 것이 없음을 증언하고 있다. 


유골함만 덩그랗게 놓여 있던 유리장 안에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의 사진과 아버지를 추모하는 몇 가지 물품들을 넣어 두었다. 아버지께서 쓰시던 서예 도구와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께 드리는 작품들이다.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인 동생의 딸이 어젯밤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는 엽서이다. "할아버지께,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요. 할아버지 많이 많이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라며 연필로 꼭꼭 눌러쓰고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하트를 함께 그려넣었다. 그리고 빨간색으로 칠한 하트 위에는 "생명"이라고 적어 두었는데, 비록 육체는 재가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늘에 계신 것을 상징하는 듯하여 흐뭇하다.



장례를 치르면서 놀랍고 감사한 것은 어린 조카들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생각보다 잘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죽는 것이 무섭다던 첫째 조카는 그 새 성장하여 장례 때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고, 혓바늘만 돋아도 걱정이 되어서 인터넷으로 "혓바늘 사망률"을 검색하던 동생의 딸도 장례를 치르며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가는 듯 보인다. 장례를 통해서 어른들도 자신도 마지막에 죽음을 직면하게 될 것임을 기억하게 되지만(전도서 7장 2절), 아이들에게도 슬픔으로 가득 찬 장례가 산 교육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


장식이 끝난 뒤, 간단히 추모 예배를 드린다. 재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육체를 앞에 두고, 영원히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생각하고 소망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따로 메모해 두신 시를 한 편 낭송한다. "그대와 헤어지자마자 나는 다음의 만남을 기대합니다…….원래 삼우(虞)라고도 하는 이날의 방문은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죽은 혼백을 위로하는 제사이지만,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오늘은 오히려 살아 남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아픔을 위로 받는 날이다. 



가슴에만 담아 두고 차마 글로 옮기지 못했던 3주일 전의 일기를 오늘에서야 마무리한다. 그동안 이 일기를 쓰지 못했던 건 시간과 힘이 부족해서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용기가 없어서였다. / 2013년 6월 2일. 주일.





2013. 5. 11. 토.


새벽 6시 복도에서 만난 담당교수가 여전히 출혈이 있지만 아버지께서 많이 안정되셔서 당장 돌아가실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집에 와서 자리에 누웠지만 이따금 울리는 전화로 깊이 잠들지 못했다. 새벽에 들은 "많이 안정되셔서"라는 말이 우리에게 한 가닥의 거미줄보다 가늘고 약하며 잘 보이지 않는 희망을 주었지만, 점심 면회 때에 어제보다 더 부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계신 아버지를 보니 다시 마음이 무너진다. 보안요원이 면회시간 종료를 알려서 눈도 제대로 뜨시지 못하는 아버지의 귀에 제수씨가 "아버님 몇 시간 뒤에 다시 올게요."라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바람이 들어간 고무장갑처럼 퉁퉁 부으신 손으로 제수씨의 손을 잡고 놓아 주시지 않는다. 하루에 이십 분씩 두 번 밖에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 중환자실에 계신 것이 너무나 한스럽다.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서 사투를 벌이시는 아버지의 손만이라도 계속 잡고 있고 싶지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대학 졸업 이후 신학을 공부하고 유학을 하느라 오랫동안 부모님 곁을 떠나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렇게 외롭고 힘든 순간에도 옆에 있어 드릴 수 없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 곁에 있어 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중환자실을 나오는데 한 보호자가 어떤 의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들린다. "솔직히 얼마나 더 사실 수 있습니까?" 또 다시 눈물 바이러스가 우리 가족을 비롯한 중환자실을 드나드는 보호자들을 공격한다. 갈수록 증상이 심하다.


저녁 면회 때 아버지를 뵈니 마지막 호흡을 내쉬실 때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내 입으로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담당 간호사에게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 목이 메여서 말을 잊기가 힘들다. 간신히 눈물을 억제하고 "보호자 중 한두 사람만이라도 계속 옆을 지키면서, 손이라도 잡아 드릴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간호사는 "계속은 어렵지만 정해진 면회 시간 외에 자주 면회시켜 드릴게요."라고 대답한다. 


집에서 가서 저녁을 먹고 밤늦게 다시 병원으로 왔다. 이제는 정말 아버지와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불이 꺼진 보호자 대기실에 아내와 단둘이 앉아 면회를 기다리는데,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다. 아버지의 육체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는데, '보호자'인 나에게는 아버지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아들로서도 나는 아버지께 제대로 해드린 게 없다. 그저 고통 속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는 것 밖에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철저히 무력한 아버지만큼이나 나 또한 철저히 무능력하다. 그렇게 어둠 속에 한참 앉아 있는데 중환자실에서 면회 준비가 되었다며 부른다. 눈을 감고 계시는 아버지는 주무시는 건지, 의식이 없으신 건지, 의식은 있으시나 눈이 너무 퉁퉁 부어 눈을 뜨시지 못하시는 건지 알 수 없다. 아내와 함께 그냥 옆에서 서서 아버지의 차가운 손을 잡아 드린다. 지금까지는 면회를 하며 아버지 앞에서 울지 않고 늘 밝은 목소리로 용기를 드리려고 애썼는데,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 메이는 목소리로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 내가 아직 이뤄 드리지 못한 아버지의 바램들 꼭 이뤄 드리고, 언젠가는 아버지의 호 '청천(淸川, 맑은 시냇물)'을 따서 장학사업도 하겠다고 약속드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귀에 조용히 속삭인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저희가 꼭 풀어 드릴게요."  



2013. 5. 12. 주일. 


오늘은 마침 어버이주일이다. 주일예배를 갔는데, 어버이의 사랑에 대한 평범한 영상물과 설교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누나도 눈물을 훔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데려 가시려면 조금이라도 덜 힘들도록 빨리 데려가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점심 면회를 위해 병원으로 가고 있는데 어머니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중환자실이다. 긴급한 일이 생기면 마음 약한 어머니가 아니라 동생에게 전화해 달라고 여러번 부탁해 두었는데도, 병원 중환자실은 다시 어머니 휴대전화로 긴박한 소식을 전한다.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단다. 곧 이런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연락을 받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다른 가족들은 말이 없어지고, 운전대를 잡은 난 엑셀을 밟는다. 


급히 중환자실로 달려가니 동생 내외와 제수씨의 친정 부모님이 먼저 와 있다. 사돈 어르신들께서 면회를 위해서 멀리서 달려 오신 것이다. 아버지의 병상 주변에 많은 의료진들이 모여 있다. 이미 심장이 또 한 번 멎었고, 심폐소생술과 약으로 간신히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담당의사는 심정지가 계속 되면 다시 심장이 돌아오게 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정리가 되면 가족을 다시 부르겠다는 의료진의 말에 이젠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하시는 아버지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라는 말씀을 드리고 대기실로 나왔다.


그새 점심 면회시간이 되어 다른 보호자들이 중환자실로 우르르 들어갔다가 눈물을 훔치며 하나둘 나왔다. 보호자들도 거의 다 돌아가버린 대기실에 앉아 우리 가족은 호출을 기다린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아버지께서 다시 눈을 뜨시고 우리와 눈을 맞추실 수 있기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이땅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걸까? 누나는 어머니 곁을 지키고, 제수씨는 침통한 얼굴로 앉아 계신 사돈 어른들과 함께 앉아 있다. 동생은 홀로 복도를 서성거리고, 아내는 눈물을 닦으며 기도하고 있다. 난 성경을 찾으며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한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을 때에 중환자실 간호사가 급히 우리를 찾는다. 서둘러 들어가보니 아버지 위에 인턴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올라가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다. 담당 교수는 벌써 여섯 번째 심정지가 왔다며 더 이상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난 불가항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온가족은 무너져 내린다. 수술 전엔 "일주일이면 끝!"이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던 의사는, 이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사망 선고를 내린다. "십삼 시 이십사 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


눈물로 가득 찬 임종예배를 드린다. 아버지께서 하나님 품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이 믿음, 우리가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이 소망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큰 슬픔에 빠진 우리를 건져올리고, 하늘로 가신 아버지와 남아 있는 우리 가족을 하나로 묶어 준다. "아버지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평소 아버지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섬겼던 막내가 흐느끼며 아버지를 안아 드린다. 남편의 차가운 얼굴을 매만지시며 작별 인사를 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손이 너무 외로워 보인다. 언제나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아버지에게 친근하게 대했던 딸이 "아빠, 사랑해요."라며 고백한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자신들을 참 예뻐하셨던 시아버지를 잃은 며느리들의 눈물과 울음소리가 참 애처롭다.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 버렸네

죄중에 다시 방황할 일 전혀 없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찬송가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이 땅에서 맑은 시냇물처럼 살기를 원하시던 사랑하는 아버지

청천(淸川)이시여 이제는 모든 고통이 끝났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서 편안히 쉬소서…….





짧은 임종예배를 마치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뵙고 나온 후, 누나가 아버지께서 평소 지으시던 것과 같은 미소를 짓고 계신 것 같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께서 2009년 수첩에 적어 놓으신 다음과 같은 글귀를 아내가 발견했다.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 혼자만 울고 있었고

당신 주위 모든 사람들은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 혼자만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 고(故) 김수환 추기경(?)






2013. 5. 5. 주일. 어린이 주일.


한국에 돌아 온 지 두 번째 주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도 역시 어머니와 함께 1부 예배를 드렸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라 아이 사무엘에 대한 말씀을 본문으로 자녀 교육에 대한 설교가 전해졌다. 사무엘의 이름 뜻이 하나님께 구하여 얻었다는 뜻이라며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몇 번 강조하신다. 자녀가 없는 나는 설교 내용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도 병원으로 가서 중환자실 문 앞에서 면회시간을 기다린다. 



멀리서 작은 이모님 내외가 면회를 오셨다.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먼저 면회를 들어가고, 나와 아내는 이모님, 이모부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 면회를 마치고 나온 동생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다. "아버지 폐렴이 더 안 좋아졌다네." 어제 조금 나아졌다는 말을 듣고, 오늘은 좀더 진전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오히려 어제보다 훨씬 나빠졌다는 것이다. 순서가 되어 들어가보니 아버지는 호흡을 거칠게 내쉬며 주무시고 계신다. 오랫동안 누워계셔서 그런지 손과 발도 퉁퉁부어 있고, 살이 빠지셔서 헤쳐진 상의 앞자락 사이로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너무 안스럽다. 아내와 함께 아버지 손을 잡아 드리고 시편 18편 말씀을 읽어 드리고, '능력의 이름, 치유의 이름 예수'라는 찬양을 조용히 불러드리고, 기도하고 나왔다. 


어린이날 답게 오늘 날씨가 참 좋다. 면회를 마치고 나와서 어머니는 작은 이모님 내외가 모시고 바람을 쐬러 가셨고, 제수씨는 조카를 데리고 시장에 나갔다. 어린이날을 조촐하게 보내려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수영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렇게 각자 바람을 쐬며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달랬다. 시원한 봄바람 속에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2013. 5. 6. 월.


점심 면회를 미치고 담당 의사와 면담을 하기 위해서 외래진료실에 가서 기다렸다. 중간에 아버지의 지인들이 전화를 주시고 꼬치꼬치 물으시며 병문안을 오시겠다고 하는데, 현재 아버지는 계속 수면 상태에 계시기 때문에 면회를 받으실 상황이 되지 않는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마침내 간호사가 우리를 부른다. 동생과 나이가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는 이것저것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동생은 어젯밤 폐렴과 항생제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했는지 자세하게 물어본다. 감사하게도 오늘은 어제보다는 아버지의 폐렴이 좋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엑스레이 상 하얗게 변해버린 왼쪽 폐도 폐 내부에 물이 찬 것이 아니라 외부의 빈공간을 흉수가 채우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 염려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담당 의사는 앞으로의 치료계획을 대략적으로 말해준다. 그래도 담당 의사가 긍정적으로 설명해 주니 마음에 좀더 희망이 생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근원적인 희망은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오전에 벌려 놓은 도배를 마무리 하였다. 지난 겨우내 아버지께서 주무시는 방과  붓글씨를 쓰시는 방구석에 곰팡이가 피었는데, 아버지께서 봄이 되면 부분도배를 하시려고 벽지를 준비를 해 놓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편찮아지시는 바람에 하지 못하고 병원에 들어 가셨다. 곰팡이는 보기에도 나쁘지만 호흡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도배를 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팔을 걷어 부친다. 곰팡이가 핀 벽지를 칼로 뜯어내고 곰팡이를 닦아 냈다. 곰팡이가 심하게 피었고 벽지도 생각보다 잘 벗겨지지 않아서 조금 애를 먹었지만, 아버지의 폐에 생겨난 염증들도 이 벽지처럼 깨끗하게 제거되기를 기도하며 열심히 벗겨낸다. 그리고 큰 효과는 없겠지만 곰팡이 제거제도 뿌리고 자투리 벽지를 잘라서 붙여 놓으니 깔끔하다. 아내가 도와주고, 중간에 집에 놀러 오신 어머님 친구께서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셔서 기대보다도 더 괜찮다. 깨끗하게 발라진 벽지를 보시고, 어머니는 마음이 시원해지셨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도 얼른 퇴원하셔서 쾌적한 환경에서 환경에서 지내실 수 있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눕는다.



2013. 5. 7. 화.


오늘은 아버지가 달고 있는 체외순환기 제거 여부를 결정하는 날이다. 아버지께서 기계의 도움 없이도 호흡하실 수 있으시면 그만큼 회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대와 염려가 섞인 마음으로 점심 면회를 갔는데 간절히 바라던 변화가 없다. 아버지께서 테스트를 견디지 못하셔서 체외순환기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소식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던 변화가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서 아버지의 손발이 퉁퉁부어 오르고,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검붉게 변해있다. 혀도 마찬가지고, 거기다 황달까지 와서 눈과 몸이 짙은 노란색으로 변해 있다. 아버지께서 회복되시는 것이 아니라 점차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병원 원무과에서는 중간정산을 독촉하는 문자메시지가 날라온다.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가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눈치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실 거면 오래 고통하시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다물고 있는 때가 많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이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하게 다투셨던 때.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 이었던 우리 삼 남매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골방에서 셋이서 함께 손을 잡고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고, 이후에도 몇 번의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우리 가정을 지켜주셨다. 그때를 생각하며 다시 간절히 하나님께로 향한다.  지금도 우리 삼 남매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고, 한국과 미국에서 지인들이  기도에 동참해 주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 가정에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운전을 하면서도 TV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을 계속해서 부른다.  



2013. 5. 8. 수. 어버이날.


어버이날에도 불쌍하신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누워계신다. 오늘이 몇일인지도 모른 채. 그 사이 매번 면회 시간 중환자실 앞에서 보이는 보호자들의 얼굴들도 많이 바뀌었다. 환자들이 중환자실을 나가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회복되어 일반 병실로 가거나 숨을 거두고 시신이 되어 나가는 경우이다. 아버지는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안 좋아지시고 있는 듯하다. 아들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는데, 아버지의 중한 병환에 비해 내 기도는 너무 약하다. 




2013. 5. 9. 목.


아버지는 나날이 나빠지고 계시다. 원래 폐 외에 다른 장기들은 모두 건강하셨는데, 이젠 심장과 콩팥 등 다른 장기들도 급속히 파괴되고 있다. 급성 신부전증이 왔으며, 심장에도 물이 차고, 수술을 하지 않은 오른 쪽 폐에도 출혈이 생겼다. 담당 교수가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와서 체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긴박한 상황인가보다. 전공의는 체외순환기를 뗄 수 있도록 폐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이 자꾸 생겨서 안타깝다고 말한다. 오후에 중환자실에서 동생에게 전화가 몇 차례 와서 신장 투석기를 돌리며, 심장에서 물을 빼는 시술도 할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리고 밤에는 출혈을 막기 위해서 혈관조영술을 시도할 것인데 성공률은 낮다고 말한다. 이 전화를 받고 동생이 직장에서 일하다 말고 집으로 달려와서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막 시술을 받기 위해 영상시술실로 내려가셨다고 한다. 초조히 기다리며 말씀을 읽었다.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12-14


아버지께서 결국에서 "산 자들의 땅" 천국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뵙게 될 것임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병상에서 내려와 걸어서 병원을 나오시게 될 지는 알 수 없다. 시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새는 혈관을 막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얼마가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침내 환자용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아버지의 침대가 중환자실로 향하는 복도로 각종 기계들을 달고 돌아오고 있다. 지친 얼굴로 함께 오는 담당 교수는 일단 출혈이 의심이 되는 혈관을 막기는 했는데 결과는 두고 봐야 한다고 했다. 중환자실로 들어간 아버지의 침상과 기계들이 다시 정리 되기를 한 참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잠깐 뵈러 들어갔다. 저녁 면회 때보다도 더 심해서 이젠 얼굴까지 퉁퉁 부어 있으시다. 차마 뵙기가 힘들 정도이다. 시술 결과가 성공적이길 간절히 바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2013. 5. 10. 금.


어젯밤 혈관조영술이 실패로 돌아간 것 갔다. 아침에 중환자실에 전화를 해보니 아버지의 폐의 출혈은 계속되고 있고, 소변도 조금씩 밖에 나오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렇게 가느다란 기대가 큰 낙심으로 바뀌는 일에 아직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침을 먹고 어머니와 장례식에 관해서 논의하고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자연장을 하고 싶은데 부산에는 아직 자연장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다. 


낮에 찾아 뵈니 신장투석도 큰 효과가 없는지 온몸의 부종도 별로 빠지지 않았다. 점심 면회 때에 큰집 식구들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가 큰 슬픔과 분노 속에서 돌아갔고, 저녁에는 누나가 서울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내려왔다. 점심 때 아버지를 담당하는 전공의는 완전히 포기할 단계는 아니라고 했지만, 저녁 면회 때 담당 교수는 이제 기적을 바라는 것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께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을 불러 드렸는데, 목이 메여 제대로 부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내가 함께 불러 주고, 아내가 목이 메일 때는 내가 불러서 찬송이 끊기지는 않았다. 중환자실에는 악성 눈물 바이러스가 떠돌아 다니는 것 같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눈물 없이 나올 수가 없다. 


저녁 8시 40분경 전주에 계신 아내의 외삼촌과 외숙모님이 오셔서 동생과 함께 담당 교수를 만났다. 동생은 메이는 목으로 담당 교수에게 수술 전 상담할 때에 수술 후 있을 위험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렇다. 마흔도 되어 보이지 않는 담당 교수는 수술 후 얼마나 입원해야 하나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일주일이면 끝! 항암도 필요없고."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평생 자신에게 관리를 받으며 사셔야한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의사에게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었다. 의사는 자신이 "리스크가 크다"고 말했을 거라고 했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동생은 전혀 듣지 못했다고 했다. 만약 그때 교수가 위험이 있다고 살짝 '언급'하기만 했더라도 동생은 아버지를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시거나 수술 없이 치료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교수는 수술동의서를 받을 때에 전공의가 수술 위험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우리 가족 중에는 아무도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한 적이 없다. 간호사가 찾아 놓은 서류를 보니 아버지 본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수술을 하기 하루 전 날에 입원하셨는데, 그날 밤에 전공의가 찾아가서 설명하고 사인을 받아 간 듯히다. 간호대학 교수이신 외숙모님은 수술 후 사망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따르는 큰 수술을 하면서 수술 전날 밤에야 위험을 설명한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하셨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가 수술 후 하루만에 MRSA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신 것은 병원의 관리 소홀이며 폐렴에 대한 대처가 너무 늦은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였다. 아버지가 수술 후 폐렴에 감염된 것은 4월 23일인데, 며칠 전 한 간호사가 폐렴균 규명을 위한 객담 검사와 균배양이 4월 29일과 5월 4일에서야 두 번 실시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의사는 그 균은 중환자실에 많기 때문에, 중환자실에 있으면 MRSA에 감염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환자실에서 '당연히' MRSA에 감염될 것을 예상하면서 왜 원래 폐기종을 앓고 계시던 고위험군 환자인 아버지를 수술하고 아무런 격리 없이 중환자실에 보내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담당 교수도 얼굴이 빨개지며 우리들의 논리를 반박하며 자신도 사흘 동안 집에 가지 못하고 있으며 보호자 다음으로 가슴 아픈 것은 자신이라고 말하였지만, 그 무엇도 원통한 우리를 납득시키거나 3주째 병상에서 사지가 묶이고 기관지가 뚫린 채 고통 받으시는 아버지를 회복시킬수 없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담당 교수가 나를 부르더니 아버지의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서, 몇 시간을 못버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집에서 병원까지의 거리가 얼마냐 묻더니 위급하실 때  중환자실에서 전화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혹시나 아버지의 임종을 놓칠까봐 우리 가족은 모두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서 밤을 새운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를 보내 드릴 마음의 준비가 많이 되었다. 동생이 전화로 장례식장을 알아본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크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마가복음 9:26


면회를 온 많은 사람들이 이제 아버지는 가망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며 편하게 보내드리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직 기적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새벽이 깊어 간다. 아니 밤이 깊어 가는 건지 새벽이 깊어 가는 건지 알지 못하겠다.

2013. 4. 27. 토.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셀폰을 임대해서 동생에게 전화했다. 이제 '강제 무소식'의 시기가 끝났다. 수화기에 귀를 대고 규칙적으로 울리는 발신음을 들으며, 어떤 소식이든지 담담하게 받아들이리라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동생이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이전보다 조금 밝은 것 같다. 드디어 아버지께서 의식이 돌아오셨고 사람을 다 알아 보신단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사하다. 국내선으로 갈아 타기 위해 인천에서 김포로 가는 공항철도를 탔는데, 마침 영종도의 바다 저편으로 해가 넘어간다. 석양을 바라보는데 주님과 시선이 마주친 듯 하다. 긴장된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장모님과 처형이 마중 나와 있다. 힘이 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힘이 되는 사람들은 역시 가족이다. 처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공항을 떠나 시내로 들어갔다. 3개월만에 다시 보는 부산. 이렇게 돌아오게 될 지는 몰랐다. 중환자실 면회시간이 제한 되어 있어서 집으로 바로 갔다. 아버지와 학교 시험을 앞둔 조카 한 명을 제외하고 온 식구가 모여 있다. 누나도 주말을 이용해 서울에서 내려와 있다. 부산과 서울 그리고 버클리, 각각 따로 떨어져서 걱정하다가 이렇게 함께 모이니 그래도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 동생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자세하게 말해 주었는데,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온 것을 이야기할 때 눈에 눈물이 고인다. 부모님께서 검사 받으실 때부터 지금까지 옆에서 혼자 모시면서 마음에 안고 있었던 부담을 가늠케 한다. 



2013. 4. 28. 주일.


병원 면회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1부예배에 갔다. 애굽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확신시켜주시는 본문이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출애굽기 4:17)는 말씀이 눈에 들어 온다. 내가 가진 지팡이, '기도'로 아버지께서 회복되시고 일어나시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병원으로 갔다. 


면회 시간이 되니 많은 사람들이 중환자실 앞에 모여 면회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가족도 그렇지만 모두 딱한 사람들이다. 드디어 중환자실이 열리고 가족 중 제일 먼저 아내와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들어갔다. '아! 아버지!' 당신은 너무나 애처로운 모습으로 침상에 누워 계신다. 아버지의 몸에는 알지 못하는 각종 기계들과 튜브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사지는 침상에 묶여져 있다. 아버지는 우리를 알아 보시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신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우리의 가슴이 뭉개진다. 중환자실에 계셔서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시편 23편을 읽어 드렸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리고 '이적'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기도 드렸다. "태초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이 되게 하신 주님, 오늘 아버지의 코에 산소를 불어 넣어주셔서 아버지의 폐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바람, 성령께서 아버지의 가슴에 늘 계셔 주시옵소서."


오늘은 외가식구들이 여러분이 오셔서, 면회를 마치고 인근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당 벽에 걸린 홍보물에서는 환하게 웃고 있는 여주인이 일손이 없다며 서빙도 늦고 불친절해서 아내와 제수씨가 직원처럼 직접 물과 음식들을 날라야 했지만, 의식을 찾으신 아버지로 인해 식탁에는 기쁨이 있었다.

 


2013. 4. 29. 월.


아침에 부모님께서 출석하시는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면회를 오시겠다고 전화가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렇게 자꾸 사람들이 찾아 오는 것도 부담스러우신 가 보다. 이것을 계기로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점심 면회 시간에 맞추어 병원으로 가자 목사님 부부와 아버지께서 속하신 남전도회 소속 장로님들께서 와 계셨다. 목사님 부부께서 면회를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버지께서 깨어 계셔서 미소로 맞으셨다고 한다. 목사님께서 기도를 해주셨다. 그리고 함께 들어가지 않아서 알지는 못하지만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신 장로님들은 아버지께 용기가 되는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우리 가족들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저녁 면회를 기다리며 중환자실 앞에 서 있는데, 아버지는 아직 면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미 두 번의 위기를 경험하신 어머니는 혹시 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지 조금 불안해 하신다.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리려고 아마 체외순환기를 교체하는 것일 거라며 말씀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뒤에 들어가보니 담당 의사가 기계를 교체하였다고 말해준다. 아버지의 폐가 적응하실 수 있도록 단계를 낮추어 기계 연결 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막 시술을 끝내신 후라 아버지의 호흡이 가쁘고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안정되신 것으로 생각했던 어머니는 이 모습을 보시고 또 불안해 하신다. 어머니의 마음이 생각보다도 더 약해지신 것 같아 지켜보는 마음이 아린다. 



2013. 4. 30. 화.


어머니께서 염려와 불안으로 밤에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모양이다. 함께 아침을 먹는데, 음식도 제대로 넘기시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신 모습이 너무 애처롭다. 아침을 드신 어머니는 가까운 병원에 가서 영양제라도 맞고 와야겠다며 나가신다. 어머니도 나름 고통과 불안을 이겨내고 기운을 차리시려고 노력하고 계신다. 이러다가는 어머니도 병이 들겠다 싶어 친구 두철이가 하는 한의원에 전화를 해서 예약을 했다. 그리고 점심 면회와 저녁 면회 사이 시간에 어머니를 모시고 한의원에 다녀왔다. 착한 친구 두철이가 친절하게 상담하고 이것저것 조언을 해준다. 특히 어머니에게 집에만 계시지 말고 외출과 활동을 자주하셔야 활기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아버지께서 퇴원하시고 집에 계시면 정말 어머니가 외출을 하실 수 있을까?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래도 오늘은 아버지께서 어제보다 많이 안정되어 보이시고, 각종 수치도 좋아서 어머니의 마음이 좀 회복되시는 듯하다. 아버지께서 자꾸 무언가를 말씀하시고 싶어 해서 손에 펜을 쥐어 드리고 글자를 쓰시게 해는데 알아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저녁에는 아버지께서 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입력하시는 방법을 아시는 것을 기억하고, 일종의 글자판을 만들어서 아버지랑 의사소통을 시도했으나 그것도 잘 되지 않는다. 아직은 무리인 것 같다. 저녁 면회를 마치고 누나는 아이들 때문에 밤에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누나는 더 부모님 옆에 있고 싶어 했는데 서울에 두고 온 첫째와 둘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막내가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울어서 고생했다고 한다. 누나와 자형도 고생이 많다.



2013. 5. 1. 수. 노동절.


며칠 전 체외순환기의 연결 방식을 변경한 이후에 큰 변화 없이 시간이 흘러 가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하시는 듯하다. 계속 입을 움직이시면 무엇인가 의사를 표현하시고 하신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수술 후 일주일에서 열흘이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수술대에 누우셨는데, 열흘이 다 되도록 중환자실에 계시니 매우 혼란스러우실 것이다. 아버지는 이전에 치과 진료를 받으실 때에도 항상 모든 치료과정을 상세히 아시고 싶어하셨다. 아버지께 최대한 긍정적으로 진행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안심시켜드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에 가족들의 생각이 모였다. 


저녁 면회를 마치고 나오다가 아버지를 담당하는 레지던트 의사를 복도에서 만나서 경과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젊은 의사는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가족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한다. 내가 체외순환기를 언제 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잠깐 뜸을 들이더니 "며칠 내에……"라는 막연한 대답을 준다. 그래도 그 대답에 희망을 가져 보려고 애쓴다. 



2013. 5. 2. 목.


병원에 가기 전 오전시간을 활용해, 자동차 정비소에 갔다. 아버지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부품교환과 가스충전을 통해서 간단하게 수리가 되었다. 아버지도 이렇게 간단한 수술인 줄 알고 길어도 열흘이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에 걸어 들어가셨는데, 열흘 째인 오늘도 생사의 기로에서 사투를 벌이고 계신다. 생각보다 자동차 수리비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병원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병원비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나온다. 수술하고 입원해 계신지 열흘 정도의 병원비 중에 본인부담금이 천 만원을 훌쩍 넘었다. 암환자는 본인부담금이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의료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 항목이 많은 듯하다. 동생과 누나는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자신들이 알아서 할 테니 병원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마라고 한다. 걱정은 안 하지만 빠듯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동생과 누나에 대해 미안한 마음과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국에서도 아주 가난한 계층인 나는 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병원 원무과에서는 수술 전 담당 교수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아직도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시고 계시는 아버지의 휴대폰으로 병원비 중간 정산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저녁 면회 때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동생이, 최근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서 수술 직후와 달리 아버지의 왼쪽 폐가 모두 흰색으로 변해 있다며 이상하게 여긴다. 난 괜찮겠지라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늘 점심엔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분의 부인이, 그리고 저녁에는 사돈 어르신 내외분께서 면회 오셨다. 다들 우리에게 밥을 사주시겠다고 해서 식당에 갔지만, 신세지기 싫어하는 동생이 모두 계산을 선수쳐 버렸다. 그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 나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한국에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아버지가 글자를 좀더 알아 볼 수 있게 쓰셨다. 그런데 상황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셔서, 아버지가 꿈과 현실을 잘 구분 못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했다. 수면유도제를 계속 맞고 있어서 그러실 것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2013. 5. 3. 금.


오늘도 담당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마침 체외순환기 담당 기사가 옆에 있어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동생의 말처럼 중환자실에 다시 들어가신 후부터 며칠 사이에 아버지의 왼쪽 폐가 아랫부분부터 점차 흰색으로 변해 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지금은 왼쪽 폐가 완전히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기사에게 왜 그런지 질문했더니, 담당 교수에게 말해 놓을 테니 설명은 내일 교수에게 직접 들으라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아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왼쪽 폐가 흉수로 가득 찬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아주 사소한 근거들을 모두 모아서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정작 내 마음속에는 염려가 점차 차 오른다. 최근 며칠 동안 병세가 아주 조금이지만 회복하고 계신 것 같아서 살짝 안도하고 있었는데, 폐렴이 심하게 악화된 것이 아닌가 하여 다시 걱정 모드로 돌아섰다. 


오늘 저녁에는 부산 반대편에 사시는 한 친척께서 멀리서 버스를 타고 병문안을 보셨다. 그런데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보시고 그만 눈물을 흘리시자, 옆에 있던 직원이 수술이 잘 되어서 회복되고 있는데 환자 불안하게 왜 그러냐며 제지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꼭 면회를 하시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미리 주의를 드려야 겠다. 어머니는 당신은 편히 지내는데, 아버지는 침대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것이 안 되셨는지 저녁 내내 표정이 좋지 않다. 



2013. 5. 4. 토.


한국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큰 변화 없이 여전히 중환자실에서 고생하고 계신다. 오전에 중환자실 문 앞에서 아버지를 담당하는 전공의를 만났다. 붙잡고 물어보니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데, 아무래도 폐렴을 극복하는 것이 회복의 관건인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의 폐렴이 전날에 비해 조금 좋아졌다는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런데 저녁 면회 때는 아버지에게 미열이 오르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 지신 것이 폐렴이 도지는 게 않을까 걱정이 된다. 


저녁 면회 후 처가에 가서 처가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요즘 마음이 약해지신 어머니 곁을 지키느라 처가에는 이제서야 인사를 드린다. 장모님께서 손수 면을 뽑아 만드신 맛있는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아버지의 수척하신 얼굴이 눈 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동서와 처남이 위로를 전한다. 저녁을 먹고 얼마 되지 않아 어서 돌아가라는 장모님의 재촉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