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가을의 독서

 

 

 

기도의 계절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물론 1년 365일, 사시사철이 모두 기도의 날이지만 특히 가을이 되면,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고 고요히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언젠가 교과서나 엽서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구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 김현승, 〈가을의 기도〉 1연.

 

그렇다면 왜 하필 가을일까요? 이 시에서 말하는 가을은 산이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철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나뭇잎이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다 덧없이 떨어지는 늦가을입니다. 이때를 시인은 침묵 속에 기다리다가, 낙엽이 떨어지면 드디어 언어로 기도하고자 합니다.

 

낙엽이 떨어지면 썩고 흙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새 순으로 돋아나는 자연의 법칙을 시인이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겨울의 문턱에 들서는 늦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는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히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직감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참된 기도란 바로 이러한 인생의 유한함과 고독함이 머릿속과 가슴속에서 동시에 전율처럼 울릴 때 절대자 앞에서 “겸허한 모국어”로 발화됩니다.

 

 

기도의 언어

김현승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태어나 말을 배웠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처음 듣고, 처음 한 말은 조선어였지만, 그가 자라 글을 배우던 시기의 국어(國語)는 일본어였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말인 1937년부터는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1940년부터는 신문과 잡지 등 한글로 된 인쇄물들이 거의 다 강제 폐간당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있어서 “모국어”란 갓난아이와 같은 그의 가장 순수한 존재와 결합된 원초적인 언어, 그리고 자신의 정서와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진실한 언어였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아름답게 꾸며낸 말이 아닌, 또는 형식에 맞춘 공적인 말도 아닌, 그리고 외부로부터 강제로 부여된 말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가장 진실하고 본능적인 언어인 “모국어”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언어는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은 사람이 발화하는 “겸허한 모국어”입니다.

 

그런데 시인에 의하면, 이 “겸허한 모국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언어입니다. 외국어를 습득하듯 자신의 지혜와 노력으로 배우고 연습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시어를 다듬듯 조탁하여 만든 언어도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자, 기도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언어입니다. 이 진정한 기도의 언어를 얻기 위해 시인이 하는 일은 낙엽이 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많은 기도의 말들을 섣불리 쏟아 내거나 중언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겸허하고 진실한 기도의 말을 주실 때까지 침묵 속에 고요히 기다립니다.

 

침묵은 순수하고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입니다. 물론 침묵 가운데 기도할 때 실은 그 침묵 속에서 많은 말과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침묵기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잡념 또는 분심(分心)과 싸우다가 지쳐서 침묵기도는 나와 맞지 않는다며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분심이 일어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은 어지러운 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기도 중에 다른 생각들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생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연결된 감정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원인이 파악이 되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흘려보낸(letting go) 뒤 다시 앞서 샛길로 빠진 지점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마음은 정화되고 침묵 속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기도의 언어로 서서히 채워집니다. 그리고 기도가 매우 깊은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기도의 말이 다름 아닌 말씀(logos)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현존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침묵을 훈련하는 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마틴 레어드의 『침묵수업』(한국 샬렘)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합니다.

 

 

가을의 독서와 기도

가을은 또한 독서의 계절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 식상한 말이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종이책 대신 티브이나 유투브 같은 영상물만 보거나 스마트 폰으로 짧은 글들만 읽는 오늘날에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매우 절박한 호소가 되었습니다. 빠르게 전환되는 화려한 영상을 수동적으로 시청하는 것과는 달리, 독서에는 보다 능동적인 참여가 요구됩니다. 글이 말하는 바를 파악하는 이해력과 글자들이 묘사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상상력은 물론, 말해지지 않은 행간의 의미까지도 탐구하는 추리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책은, 종이와 글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의 세계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 들여 경험하게 합니다.

 

가을에 읽을 만한 좋은 책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도의 좋은 자료입니다. 지난 상반기 ‘기도대각성’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교회에서 펴낸 〈말씀의 샘에서 솟아나는 기도〉의 기획의도가 바로 독자가 말씀을 읽고, 그 독서 경험에서 솟아나는 기도를 드리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책을 아직 다 활용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번 가을에 못다 한 부분을 읽고, 기도를 실천해 나가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미 묵상지를 통해서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를 맛보신 분들에게는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두란노)이라는 책을 권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영성 지도》(Spiritual Direction)인데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비워 두고, 말씀을 읽고, 글을 쓰고, 기도하는 훈련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책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과 하나님과 이웃을 보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혼자 읽는 것도 좋지만, 그룹으로 함께 읽고, 나누고, 훈련하면 더욱 좋습니다. 또한 영락수련원에서는 이번 가을에 ‘거룩한 독서 수련’ 2차(9월 26-28일)와 3차(11월 21-23일)가 예정되어 있으니, 오셔서 말씀으로 기도하며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누리시길 초대합니다.

 

선선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의 배경은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이지만, 지금부터 침묵 가운데 그때를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겸허한 모국어”를, 진실한 기도의 말을, 무엇보다 말씀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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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 “성령님은 누구시며, 내게 어떻게 나타나시나요?”

 

Answer : 일반적으로 우리 안에 궁금증이 생기는 이유는 머릿속에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 이전에 그 질문이 생겨나게 된 원인이 되는 욕구가 그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옷가게의 쇼윈도우에서 마네킹에게 입혀진 어떤 옷을 보았는데, 그 상품이 얼마인지 궁금해진다면, 그것은 곧 그 옷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하고 싶은 욕구가 그 마음에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비슷하게 질문자께서 성령님에 대한 위와 같은 질문을 하신 이유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님을 알고, 보고, 만나고 싶은 갈망이 그 마음속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는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본성적인 그리움이 심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로 인해 하나님 지식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갈망을 음식이나 옷 등과 같이 창조된 다른 것들을 즐기거나 소유함으로써 채우려고 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일시적인 만족과 기쁨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하나님 이외 그 무엇으로도 온전히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을 일깨워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신학적으로 말씀 드리면,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십니다(마28:19). 성령님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으며(창1:2), 구약시대 때도 예언자들에게 임하셔서 활동하셨고(대하15:1), 신약시대 때는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마1:18, 3:16, 4:1, 12:28).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는 예수님의 요청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셔서 믿는 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요14:16-17).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고전3:16),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셔서(롬5:5),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구주가 되심을 깨닫고, 믿고, 시인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고전12:3). 또한, 성령님은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며(고전6:11), 우리 안에서 친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며(롬8:26),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엡3:16).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며(갈5:22-23),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행1:8), 그 사명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롬15:19). 공동체적으로도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지만(고전12:11),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엡4:3).

 

이러한 성령님은 사람들의 눈에 ‘바람’같이 나타나시기도 하고(행2:2), ‘불’같이 임하시기도 하며(행2:3), ‘물’과 같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시기도 합니다(요7:37-39).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는 하늘에서부터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막1:10). 여기서 성령에 대한 묘사가 모두 ‘같이’라는 조사를 사용한 비유로 되어 있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형상이 없는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나타나심은 비유로 밖에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물이나 불처럼 상반된 이미지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성령님은 어떤 특정한 개념이나 이미지에 제한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현요한 교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성령님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바람’, ‘불’, ‘물’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불이나 바람처럼 매우 강렬하게 경험되기도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경험되기도 합니다(롬14:17).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을 알고 만나고자 할 때 성령님을 자신의 지식이나 선입관이라는 안경을 쓰고 볼 것이 아니라 맨 눈으로, 곧 제한되지 않은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님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즉 하나님의 숨이신 성령을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령’, 곧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2:7). 그러므로 성령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없는 새로운 무언가를 갖추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감각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훈련을 통해서 계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 훈련(spiritual discipline)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경험하고 싶으시다면, 가장 먼저 회개를 통해서 죄를 벗어 버리고, 또한 예배와 성경공부와 독서를 통해서 무지를 벗어 버리며, 나아가 말씀 묵상과 기도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훈련하시기를 권합니다.

 

「남문밖 기쁜소식」 309 (2019년 7-8월), 40-43쪽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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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제 방학을 맞이하게 되면,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부터 시작해서 각종 수련회가 이 여름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위해 일상의 자리를 떠나 수련회에 참석하고, 또 수련회를 통해 받은 은혜에 힘입어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갈 것이다. 은혜, 은혜, 은혜, 이 단어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것이다. 아마도 ‘은혜’라는 말은 굳이 수련회라는 환경이 아니더라도 ‘십자가’나 ‘구원’과 같은 단어와 더불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다음으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단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전적으로 은혜(χάρις)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을 의미한다. 영어사전 《메리암-웹스터》(Merriam-Webster)에서는 은혜(grace)를 “인간의 갱생(regeneration)과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도움”이라고 정의한다. 넓은 의미에서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은혜’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매우 고귀한 선물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다. 성경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이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알려 준다(출20:6, 시86:15, 사30:18).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특별한 선물을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선물’이란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을 찾는다면, 그것은 ‘당연히’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받는 선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선물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만약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 선물을 당연히 받을 만한 어떤 일을 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보상’이다. 선물은 아무런 공로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주는 사람의 호의나 자비로 인해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캐럴송에서 “울면 안 되, 울면 안 되,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라고 노래하는 것은 선물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원래 마음씨 좋은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은 착한 아이들이나 나쁜 아이들이나 차별 없이 모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어떤 특별한 공로가 없는 무익한 존재인 나, 심지어 때때로 죄를 짓고 그 속에서 뒹굴기까지 하는 악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시고,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선물을 주신다는 역설적인 진리다(마5:45, 롬5:8). 곧, 나는 그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죄인’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무엇일까? 야고보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모두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한다(약1:17). 다시 말해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매일 아침 창을 넘어와 우리를 깨우는 아침 햇살, 한낮의 나무그늘과 시원한 산들바람, 고단한 마음과 육체를 쉬게 하는 밤, 매 끼니마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가족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 이 모든 것들이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선물의 절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과 마찬가지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선물로 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이러한 진리의 발견, 곧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수반한다. 선물을 받게 되면, 마음에 기쁨과 감사와 감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를 받게 되면 마음이 기쁨과 감사와 경이로 벅차오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슬픔과 혼란 속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길에서 만난 주님이 성경을 풀어 주시는 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게 되자 그들의 속에서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을 체험하였다(눅24:32). 

 

이처럼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뒤따라오는 것이 감정적 반응인데,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하는 것보다 그 선물에 따라오는 감정적인 느낌을 더 추구한다. 그래서 찬양을 빠른 비트에 맞추어 열광적으로 부르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은혜를 받은 느낌’을 얻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빠른 찬양과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 의하면 정서(affection)가 하나님의 은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 감정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게 되면 정서적인 반응이 당연히 일어나지만, 깨달음 없이 감정적 뜨거움이나 만족만을 추구하다보면, 쉽게 김이 빠지는 공허한 열광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내면의 변화 없이 ‘종교적 신경안정제’나 ‘종교적 마약’을 흡입하는 것과 같아서 감정이 식은 뒤에는 더욱 강렬한 감정적 자극이 아니면 만족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리를 깨닫게 될까? 이에 대해서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영성훈련을 여러 가지 소개할 수도 있지만,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성경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불린 한 여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다. 복음서에 의하면,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가 이렇게 인사하였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 이 인사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부른 가장 본질적 이유는 바로 주께서 그녀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은혜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무리 중의 한 여인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외치며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눅11:27-28). 그러므로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아서 기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마리아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심의 결과였다. 그녀는 가브리엘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처녀인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순종할 수 있었다. 즉,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복된 자였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난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핵심적인 영성훈련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슬픔과 절망으로 눈이 가리워서 동행하시는 이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에게 깨달음이 일어나고 마음이 붙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났고, 그래서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평신도들도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를 보아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도 사경회(査經會)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날 때 일어났다. 그래서 필자가 섬기는 남한산성의 ‘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영성훈련 프로그램들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말씀묵상수련인데, 이것은 영성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에서 말씀과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봉사자들을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힘을 쏟아야 한다.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칠 때에는 자기 생각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때에 지식을 습득을 위해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개방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이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말씀이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에 마리아처럼 단순히 순종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 여름에 무엇보다 말씀과 만나는 기회를 만들자. 수련회는 물론 휴가를 떠날 때도 말씀을 손에 들고 가자. 참된 쉼과 회복은 말씀과 만나고, 그 안에 거할 때 일어날 것이다.

 

「남문밖 기쁜소식」 309 (2019년 7-8월), 10-13쪽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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