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귐

 

가을을 맞아 이번주(91)부터 청년부 조가 새롭게 편성되었다. 이번 조편성은 여름을 지나면서 흐트러진 소그룹을 재정비하여 활성화하고, 연령에 맞는 교육과 교제를 해나가는 데에 그 주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새롭게 11기 류안나 자매와 박지현 자매가 조장으로 헌신하였으며, 모두 6개의 조가 새롭게 편성되었다. 특별히 이번 조편성에서는 25살 이하의 지체들과 26살 이상의 지체들을 나누어서 각각 4개조와 2개조로 편성하였다. 그래서 이전에 20대 초반의 젊은 기수와 30대의 고기수들이 함께 조모임을 함으로써 나타났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청년부 조편성에 많은 의의를 두고, 여러 가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청년부에 있어서 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조모임을 통해 성경을 공부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 외에도 한 조 안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를 영적 여정의 동반자로 초청하며 함께 걸어 갈 수 있다.

30여년을 살아오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올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주 안에서 만난 교회 친구와 선·후배들이다. 그것은 그들과 성격과 취향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결코 나눌 수 없는 신앙에 대해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새롭게 한 조에서 만나는 지체들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함께 나누고, 하나님께로 가는 영적 여정의 동반자로서 관계를 맺기에 충분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잠깐 옷깃을 스쳐지나가는 사람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충실한 동반자가 되도록 노력하자. 우리의 시간을 사용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연락하는 것과 또한 재정을 투자하여 선물을 사주고, 먹을 것을 사주는 것들은 서로에게 충실한 동반자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들은 우리의 관계를 막아서는 커다란 장애물들이다. 서로에게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또한 수용하는 관계로 까지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청년부 공동체의 모든 조가 당장에 이런 수준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때로 우린 조모임을 하면서 서로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우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가 온 뒤에 땅은 굳어지는 법이며, 우리의 모든 모임과 교제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일서 1:4)”

 

이번에 조편성을 하며,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우리에게는 장기결석자라는 이름의 많은 지체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그들을 조에 편성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름을 지워버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금도 그들을 기다리시고 찾으시는 주님 때문이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주님께 다시 돌아오도록 돕는 것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책임이다. 이들도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동반자이다.

올가을 편성된 조는 다음해 1월 중순까지 계속 유지되다가 내년에 새롭게 올라오는 새내기(지금의 고3)들과 함께 다시 편성될 것이다. 그리고 중간에라도 인원이 많이 늘어 나게 되면 분가(?)를 해서 한 조를 둘로 나눌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5,6개월 뒤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서로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떠난 자들이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더 많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우리의 사귐이 주님과 함께 하고, 서로에게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갈 때 가능해질 것이다.

 

2002. 8. 30.

화평교회 청년부 주보 '이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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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순결하게

 


지난 여름 수련회를 통해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너무나 좋으신 주님과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했던 그 23일의 일정을 추억해 보노라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나도 모르게 입은 반달처럼 웃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와 살아야 하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사탄은 우리의 빈틈을 노려, 넘어뜨리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또한 잠깐 쉼을 누렸던 우리에게 다시 많은 일들과 욕심이 우리를 쉬지못하게 하려고 달려오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10:16a)라고 말씀하셨다.

 

계속해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b). 뱀은 성경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아주 지혜로운 동물로, 그리고 비둘기는 아주 순결한 동물로 표상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아는 지혜와 세상의 뜻과 방법을 아는 지혜를 가져야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평안과 구원과 영생이지만, 세상의 뜻은 불안과 파멸과 영원한 죽음이다. 보통 이러한 뜻은 직접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것들은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 삶에서 요구되어지는 크고 작은 선택의 문제에서부터 세상의 문화와 여러 가지 사회현상들도 성경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지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할 때 주어질 것이다(1:7)

 

또한, 우리는 더욱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주님은 작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므로, 작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 사도바울을 통해 강하게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 쯤이야'라는 안일하고 타협적인 마음을 버리고,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매일 손발을 씻듯이 매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손발을 씻을 때의 상쾌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이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리보다 더 강한 사자나 호랑이 등을 통해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되신 주님을 의지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양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이 땅을 정복하고 변화시켜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지혜롭고 순결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도바울도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권면을 하면서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드려야할 '영적 예배'라 하였다. 다음의 말씀을 암송하며, 마음 속 깊이 새기자.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자. 그러할 때 주님이 우리를 이리들에게 지켜 주시고, 더욱 지혜롭고 순결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정복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나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2002. 8. 21.

화평교회 청년부 주보 '이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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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지금 장상 국무총리 서리의 인사청문회가 한창 열리고 있다. 장상 국무총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총리이자, 이화여대에서 기독교교육학을 가르치던 신학자였기 때문에 많은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어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다든가? 부동산 투기 의혹과 아들의 국적문제 등 여러 가지 의혹으로 인해 장총리 서리가 아주 곤혹을 치르고 있다.

 

이러한 때에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식민지라는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갈망했던 민족시인 윤동주이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민족과 자연을 사랑한 휴머니스트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의미가 특별한 사람이다. 오늘과 같은 때에 그가 더욱 간절히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 번의 실수도, 한 번의 잘못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만, 갈수록 작은 흠에 대해서는 뻔뻔해져 가는 것 같다. ‘이 정도 쯤이야..’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고 넘어간다. 새 구두를 사서 신고 다니면, 작은 흠집이 나도 신경쓰이고 속이 상하지만, 갈수록 웬만한 흠집은 눈에도 안 보이는 것과도 같은 이치일까?

 

그러나 우리는 얼마 신다가 버리는 구두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아름다운 생명이며,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거룩함에 나아가야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일순간 완벽한 사람이 될 순 없지만, 하루 하루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성화(聖化)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영광의 주님을 만나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갈망하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던 윤동주 시인과 같이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작은 잘못이라도 크게 부끄러워하며 고치기를 애써야 한다. ‘이 정도야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현실과 자신의 욕심과 타협해 간다면, 우리가 이루어야할 거룩함은 점점 멀어지고 만다.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예배자 중의 한 사람 다윗은 내가 나의 온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26:1-2)“라고 기도했다. 나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다윗이 부러웠다. 이러한 다윗의 간구가 우리 모두의 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매일밤 피로에 지친 몸을 그냥 이불 위로 던지기 전에 잠잠히 주님 앞에 무릎꿇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자.

"주님 나를 살피시고, 정결케 하사 주님 닮아가게 하소서. 나를 거룩함으로 온전케 하소서"


2002년 7월 29일

화평교회 청년부 주보 '이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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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속에 누워 -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이렇게 사람이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것을 보면 인생이 참 허무한 것 같아요"

"그래도 이런 생각도 그 때 뿐이라니까. 또 동네에 들어가서 며칠 생활하다 보면 금방 잊어버려~."

 

지난 화요일 아침, 고 김진환 원로목사님의 시신 화장을 지켜보기 위하여 벽제 화장터에 함께 갔던 사람들 중 몇 분이 나눈 이야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아침도 화장터에는 여섯 명이 함께 들 정도로 무거운 관이 줄이어 소각로로 들어갔다가 수십분 후에는 모두 어김없이 작은 상자 속의 재로 변해 한 사람의 손에 가볍게 들려 나오고 있었다. 오열하는 유족들의 통곡을 뒤에 이끌고 말이다.

 

그래서, 구약의 전도서에서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7:2),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7:4)라고 가르치고 있나 보다.

때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관 속에 눕혀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나도 좁은 관 속으로 들어가 한 줌의 재로 변하게 될 텐데 그때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기억할 것인가?’ 관 속에 누운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조문 온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상상력을 동원해 귀를 기울여 보라. 그리고 죽음 후에 주님을 만났을 때 그분께서 나를 보시면 무엇이라 말씀하실지 가만히 귀기울여 보라.

 

고 김진환 원로목사님은 자유게시판에 올린 고석경 장로님의 추모사에도 잘 나타나듯이 분골쇄신하여 주님과 성도들을 섬기신, 참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런지 목사님의 장례식에는 특히나 많은 분들이 참여해서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의 삶은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부끄러움 삶이라는 결론 밖에 내릴 수가 없다. 이것은 결코 겸손이나 자기비하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우리의 인생은 아직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아직 주님은 우리에게서 숨을 거두어 가시지 않고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때가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전도서 기자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12:1)

 

이 말씀은 올해 우리 청년부 주제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젊은 날 꼭 마음에 품어야할 말씀이기도 하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만드신 아버지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우리의 인생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우리 인생의 설계자이신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함은 당연한 진리이다.

 

나를 포함한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오늘도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모두다 무엇을 심고 있는가? 혹시 뜨거운 불 속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할 것들을 위해 헛되이 애쓰고 수고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 다시 무언가를 심기 위해 허리를 굽히기 전에 잠깐 숨을 돌리며, 내가 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자. 그리하여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인해 트랙터로 밭을 뒤엎고 있는 농부처럼, 잘못된 씨와 생산물로 인해 애통해하며 인생의 밭을 뒤엎는 안타까운 농부가 되지 않도록 하자. 이를 위해 창조주 주님과의 보다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시간을 심자, 열정을 심자. 나의 삶을 향한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성령을 위하여 심자! 더 늦기 전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2002년 7월 21일

화평교회 청년부 주보 '이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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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가 아닌 종으로

As Servants, Not As Conquerors

 

 

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겁던 지난 613, 경기도 양주군의 한 지방 도로에서 친구 생일 잔치에 가던 여중생 2명이 주한미군의 궤도차량에 치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치 마른 장작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인 것과 같이, 이 사건으로 인해 지난 동계올림픽 이후 전국민적으로 넓게 확산되어 있던 반미감정이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나, 국민을 분노케 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며, 거만하고 불성실하게 조사에 임하는 주한미군의 태도이다. 이러한 비극과 미군의 책임회피는 비단 이번 일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미군이 발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발생되어 왔던 일이다.

 

명목상 주한미군은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해서 파견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음으로 인해 갖게 되는 전쟁억제력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문제들의 핵심에 있는 가장 큰 원인을 이야기한다면, 바로 주한미군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섬기는 입장에서 한국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복자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미국이 우리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생각하기보다 실은 자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정복자가 아닌 섬기는 자가 더욱 필요한데도 말이다.

 

이러한 진리는 선교나, 사회봉사,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구소련의 한 크리스천 리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에 들어오는 크리스천 사역자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복자로 들어오는 부류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목적으로 이미 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갖고 들어 옵니다. 많은 돈을 가져와서 바로 큰 사업 계획들을 시작하고 싶어하죠.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그들 자신이 속한 기관의 영광을 반영하는 큰 교회 건물, 큰 신학교들과 다른 건축물을 세우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느끼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만을 만족시키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사역만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종으로 들어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배우러 옵니다. 우리를 알고 싶어하고, 우리가 정말로 어떤 사람들인지 보기를 원하죠. 그들은 우리의 고통 가운데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무엇을 행하시고자 하는지 묻습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부류를 선호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더 이상 정복자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종이 되어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선교지와 고아, 무의탁노인 등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약한 자들은 정복자가 아닌 섬기는 종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자존심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밑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위에 있거나 최소한 동등한 입장에 있기를 원한다. 나 역시 그러하여 부끄럽게도 상대방에게 고개를 숙이다가도, 좀 마음에 안 들면 번번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종은, 비록 상대방이 객관적으로 나보다 모든 조건이 열악하게 여겨진다 할 지라도 겸손히 그들의 밑으로 들어가서 섬기는 존재이다. 만약 그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비난하는 주한미군과 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나는 주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해왔다. 주님은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종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지극히 작은 자들의 종이 되어 섬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의 삶이다.

 

*는 오대원, "두려움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예수전도단), 57쪽에서 인용함

 

2002. 7. 11.

화평교회 청년부 주보 '이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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