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손님이 한 분 찾아왔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참여하고 있는 큐티 모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같은 한인 교회에 다니고 있는 권사님들과 함께 하는 모임인데, 그곳에는 매시간 ‘깨달음’이 넘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 교회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 많은’ 그 권사님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많은 ‘깨달음’으로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하였고, 견디다 못한 목사님이 하루 아침에 사직서를 내고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깨달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였다. 좋은 말들은 가득하나 좋은 행실은 찾아 보기 힘든 것이 문제였다.
국어사전에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of Syracuse: BC 287년경–약 BC 212년경)가 목욕을 하려고 욕조에 들어갔다가 “유레카!”라고 외치며 벌거벗은 채로 뛰쳐나와 거리를 달려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것은 그가 금덩어리가 순금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골똘히 궁리하다가 욕조에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골똘한 생각이나 궁리 뒤에 따라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깨달음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내가 열심히 연구하여 발견하고 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번뜩하고 내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복잡한 생각들과 마음을 뒤흔드는 갖가지 감정들을 비우거나 고요하게 가라 앉혀야 한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깨달음 그 자체를 목표로 삼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된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준비이다.
그러한 사례를 사막의 수도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4세기 전후에 사막에 거주하며 기도와 노동과 금욕의 삶을 산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을 사막의 수도자로, 그들의 지도자들을 사막 교부와 교모(desert fathers and mothers)로 부른다. 그 스승들은 남자는 통상 ‘압바’(abba, ‘아버지’라는 뜻)로 여자는 ‘암마’(amma, ‘어머니’라는 뜻)로 불리었다. 이러한 사막의 수도자들은 3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처음 출현하여, 4세기와 5세기를 거치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로 확산되었는데, 그들을 목격한 아타나시우스가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떠나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사막이 도시가 되었다.”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로 사막으로 몰려 들었다.[1] 그들은 사막에 있는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지혜의 말씀을 들려 주기를 청하였다.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의 가르침과 일화를 모은 책인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한 형제가 스케티스에 있는 압바 모세의 집을 찾아와 한 말씀 청했다.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떠나라. 그대의 수실에 머물라. 그리하면 그대의 수실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2]
물론 『금언집』에 담긴 교훈들은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특정한 인물들에게 주어진 말들이어서 독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화하여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막의 영적 스승으로부터 손쉽게 교훈을 얻어 자신의 머릿속을 채우려 했던 한 사람은 세속을 떠나 자신의 수도실로 들어가 그곳에 머물러 앉아 있으라는 권면을 받는다. 그러면 수실에서 고독 가운에 앉아 기도하는 동안 그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헛된 욕망과 어지러운 생각이 비워지고, 하나님으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움과 채움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내 가운데 검질기게 나아가는 훈련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어야 이르게 되는 영적 성숙의 고지이다.
수도자들이 기거하던 ‘사막’(desert)은 우리말에서 ‘사막’(沙漠)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모래 사막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황야(wilderness)를 포함한다. 이러한 장소는 고대 수도자들에게 마귀와 악마들이 거주하며 활동하는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먼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곳이 광야(desert/wilderness)였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생존조차 위태로운 극한 환경인 사막에서는 사람의 육체적 한계만이 아니라 내면의 약함도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 악마의 유혹과 시험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은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투가 맹렬하게 일어나는 전장이다. 사막의 은둔수도자들의 효시로 여겨지는 인물인 안토니우스(Antonius the Great: 251-356)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압바 안토니오스가 말했다. “사막에 머물며 내적 고요 안에 사는 자는 세 가지 싸움에서 자유롭게 되는데, 그것은 청각과 떠벌리는 것과 시각에 대한 싸움이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싸움만이 남는 바, 곧 마음과의 싸움이다.”[3]
사막의 자기 수도실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외부 세계의 방해, 곧 눈으로 보는 장면들과 귀로 듣는 말들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요일 2:16). 또한, 혼자 침묵 가운데 있기 때문에 혀를 제어하는 승산이 매우 낮은 싸움에 임할 필요도 없다(약 3:8). 그러나 자신의 마음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다. 사실 유혹이나 죄악의 본질적인 원인은 사람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 있으며(마 15:1-20), 사람이 유혹에 빠지고 넘어지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이 그릇된 욕망에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막에서의 악한 영들과의 전투란 바로 자신의 마음속의 육체적, 세속적 욕망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악마들은 때로는 과거 그들이 보았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유혹하기도 하고, 황금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그들을 속이고 욕망을 충동하기도 한다. 아니면,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채 협박하기도 하며, 가공할 만한 힘으로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금식과 절식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탐식에 직면하고, 금욕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성적 욕망과 싸운다. 또한, 무소유를 통해서 소유욕과 탐욕과 싸우며, 기도와 노동을 통해서 나태 또는 무기력(akedia)과 싸우고, 세상의 지위나 영광을 멀리함으로써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허영과 교만과 싸운다.
원로가 말했다. “‘기다려라’ 하고 말하면서 탐식의 마귀를 뛰어넘어라. 그대가 굶주려 죽지는 않을 것이므로, 오히려 절제하며 먹어라. 마귀가 그대를 재촉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 규칙적으로 먹어라. 마귀는 언제나 먹으라고 재촉하기 때문이다.”[4]
마치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강을 헤엄쳐 가듯이 마귀의 유혹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것이 사막의 수도자들이 영적 전투를 싸우는 방법이다. 이러한 전투에 임하는 수도자들의 무기는 고독과 침묵, 그리고 금욕과 겸손이며, 무엇보다 철저히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끊임없는 기도이다. 수도자들의 금욕적, 수덕적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는 수단일 뿐,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를 통해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 사막의 원로들은 열정이 과도한 젊은 수도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실을 늘 염두에 두게 하였고, 과도한 금욕으로 스스로의 몸을 해치고 영적 교만에 빠지는 것을 경계시켰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고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편안함을 뒤로하고 온갖 수고를 마다 하지 않으며, 쉬지 않는 기도 가운데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유도 예수를 얻기 위해서였다.
한 형제가 원로에게 물었다. “사부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얻게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원로가 말했다. “수고와 겸손과 끊임없는 기도로 예수를 얻는다네. 거룩한 자들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세 가지 방법으로 구원받았다네. 그러나 휴식과 자기 의지와 의로운 체하는 태도는 수도자의 구원에 방해가 된다네.”[5]
‘예수를 얻는다.’는 것은 자신이 청원하는 어떤 사항에 대한 특정한 ‘응답’을 얻는 것이나, 기도를 통해서 어떤 기이한 환상이나 황홀경의 체험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막의 교부들은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거나, 어떤 대상을 얻고 소유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릇된 모든 것들을 비우고, 순전한 마음으로 순전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수도자의 기도는 기도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할 때까지는 완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온전히 자신을 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현존 가운데 거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한 기도의 목표였으며, 예수를 얻는 것이었다. 자신의 각종 헛된 욕망과 번잡한 생각을 비우고 단순히 그 마음에 예수의 이름을 담는 이들에게는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은총이 주어졌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처럼 말이다(마 5:8). 그들이 받은 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가득 찬 역설적 비움이었다.
그런데 사막으로 나아간 모든 이들이 그러한 은총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킨 가운데 ‘영웅적인’ 고행을 하다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보다 환상이나 황홀경 같은 어떤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다가 넘어지기도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세금이나 군역과 같은 도시 생활의 짐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막으로 왔다가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래서 암마 신클레티케(Synkletikḗ: ?~373)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산 위에 있는 많은 자들이 도시 사람들처럼 행세하다가 망했다. 도시에 있는 많은 자들은 사막의 행업을 이루므로 구원받는다. 많은 사람과 함께 하면서도 마음으로 홀로 살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살아가면서도 생각을 통해 무리와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6]
사막이라는 물리적 장소 그 자체가 수도자의 영적 성장이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20세기의 수도자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인류가 자신들의 자본과 기술로 사막에 “환상의 도시들”을 건설하는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막’이 어디로든지 옮겨 가서 모든 곳이 사막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곧,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를 “인간이 속죄하고 악마와 싸우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고독의 터전”으로 만들 수 있다.[7] 이런 의미에서 많은 현대인들이 삭막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도시는 ‘시멘트와 아스팔트의 사막’이며, 우리는 굳이 이집트의 사막이나 팔레스타인의 광야로 나아가지 않아도 이 도시에서 일종의 수도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그릇된 욕망이나 생각을 비우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손쉽게 얻는 이러저러한 ‘깨달음’들까지 모두 내려놓고, 깨끗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공허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현존을 선물로 받아 그 가운데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를 복된 ‘사막’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빛과소금」 2024년 11월호 게재글.
[1]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년경-373년)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활동하다가 아리우스주의자들과의 이단 논쟁으로 박해를 받아 여러 번 추방되었다. 그 중 한 번은 사막으로 도피하였고, 이 기간(356-362) 동안 그는 사막 수도자들의 삶과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들었다. Athanasius, Athanasius: The Life of Antony and the Letter to Marcellinus (Mahwah, NJ: Paulist, 1980), 94.
[2] 남성현 옮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46.
[3] 위의 책, 41.
[4] 위의 책, 77.
[5] 위의 책, 202-203.
[6] 위의 책, 47.
[7] Thomas Merton, Thoughts in Solitude (New York: Noonday Press, 199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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