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스승, 유해룡 교수님의 정년 퇴임을 기념하여 후학들이 함께 문집을 펴냈다. '영성지도'를 주제로 국내 스물다섯 명의 영성학자들과 영성지도자들이 글을 모았다. 일 년 반 동안 준비한 것인데, 편집자로서 아쉬움과 부끄러움도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출판 되어서 감사도 크다. 책임편집자로 홀로 이름이 나왔지만, 편집 과정에서 참 많은 분들이 힘을 보태시고, 도와주셨습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 책이 하나님께, 그리고 유해룡 교수님을 사랑하는 분들께 기쁨이 되고, 또한 유해룡 교수님께서 그동안 영성지도 분야에서 뿌리신 씨앗들을 가꾸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책에 쓴 편집자 서문을 옮겨 놓는다.



영혼의 친구: 유해룡 교수 퇴임 기념 문집

579쪽 | 하드커버 | 2만2천원 | 키아츠 | 2018년


편집자 서문


유해룡 교수께서 걸어온 길이 매우 독특하듯이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시도다. 보통 교수의 퇴임을 기념할 때 후학들이 논문집의 형태로 책을 내는 것이 관례지만, 이 책은 영성학자들의 학술적인 논문들뿐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활동하는 목회자와 영성지도자들의 에세이와 실제적인 제안들도 함께 담은 문집이다. 어떻게 보면 책의 성격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글모음집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이 책의 기획 단계부터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유해룡 교수께서 지난 이십육 년 동안 대전신학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와 목사와 영성지도자로서 맺으신 열매들이 단지 학문적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와 목회 현장에서 제기되는 필요와 요청들이 그의 연구를 추동하는 원인이었고, 그래서 그의 학문적 추구는 늘 프락시스(Praxis), 곧 실천을 지향하였다. 또한 그는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와 실천가로서도 소속된 학교 안팎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직간접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유해룡 교수님의 정년퇴임을 보다 온전하게 기념하고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논문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글도 포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매우 단순하게 말하면, 이 책은 ‘유해룡’과 ‘영성지도’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에 글을 기고한 필자들은 모두 유해룡 교수님의 동역자거나 제자며, 또한 대부분 영성지도자들이다.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모두 영성지도에 대한, 또는 영성지도와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글들이다. 유해룡 교수께서 한국의 영성학 분야와 신학교육, 그리고 한국 교회에 남긴 공헌들 중 매우 중요한 것이 기독교 전통의 영성지도를 소개하고, 실천하고, 영성지도자들을 양성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에도 영성지도를 배우거나 실천하려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학자들만이 아니라 영성지도 또는 영성 훈련이나 영성 목회에 관심 있는 독자들도 읽을 수 있고, 또 실제적으로 유익이 되도록 논문집이 아니라 문집의 형태로 책을 엮었다. 이것은 학술 활동과 저술에 있어서도 항상 교회 현장을 생각하고 실천을 지향했던 유해룡 교수님의 원칙, 또는 삶의 자세와도 부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모두 5부로 구성되었다. 먼저 <1부 유해룡 교수의 삶과 길과 글>에는 유해룡 교수님에 대한, 또는 유해룡 교수께서 쓴 글들이 담겨 있다. 먼저 주선영의 “유해룡 교수의 영적 여정”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걸어온 유해룡 교수님의 영적 여정의 윤곽을 간략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권혁일, 김경은, 박세훈이 공동 집필한 “유해룡 교수의 공헌”은 유해룡 교수께서 지금까지 한국의 신학 교육과 기독교 영성학 연구에 남긴 공헌을 매우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다. 이 글의 필자들은 유해룡 교수님의 학문적, 실천적 공헌을 결코 완벽하게 정리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보다 다양한 평가가 이뤄지는 데에 마중물의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또한 유해룡 교수께서 쓰신 글들 중 영성지도에 대한 글 두 편을 선별하여 실었다. 먼저 “기독교 영성지도의 고유한 특성과 과정”은 목회 상담과 심리치료와의 비교를 통해서 기독교 영성지도가 갖는 고유성을 밝힌 학술논문이다. 그리고 “영성지도란 무엇인가?”는 가장 최근인 2018년 5월 12일 한국영성상담학회 포럼에서 발제한 주제강연 원고다. 독자가 직접 학습할 수 있도록 사례 연구case study도 포함하고 있다.


다음으로 <2부 영성지도의 기초>는 영성지도를 처음 배우는 이들에게 영성지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제공하기 위한 글들로 구성되었다. 먼저 이강학의 “영성지도의 정의”는 영성지도의 다양한 정의들과 영성지도와 함께 사용되는 다양한 용어들을 통해서 영성지도를 입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김경은의 “영성지도의 역사”는 사막 교부와 교모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영성사에 나타나는 영성지도의 다양한 전통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상학의 “영성지도의 신학: 영성지도를 둘러싼 인간 문제와 구원의 이해에 대한 단상”은 에이레네 영성지도자 전문과정의 강의 원고를 정리한 것으로써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영성지도의 신학적 기초를 설명한 좋은 글이다.


이어서 <3부 영성지도의 다양성>에는 영성지도자의 형성에 대한 글과 성경과 기독교 영성사에 나타나는 영성지도의 다양한 모델들을 소개하는 학술적인 글들을 묶어 놓은 것이다. 그중 권혁일의 “영성지도자의 탄생과 성장을 위한 모판 만들기”는 유해룡 교수님을 중심으로 몇 명의 영성학자와 영성지도자가 모인 모임에서 영성지도자 형성 과정에 대해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인데, 필자가 살을 붙이긴 했지만, 그 뼈대는 대부분 유해룡 교수님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이경희의 “디모데서에 나타난 바울의 디모데 영성지도”는 디트리히 본회퍼와 바울의 편지를 통한 영성지도를 소개하고 있으며, 김병호의 “이블린 언더힐의 영성 모델에 따른 영성지도”는 언더힐의 영성을 자각과 회심-정화-조명-어두운 밤-일치의 다섯 단계로 분석하고, 이것을 모델로 삼아 영성지도를 실시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조한상의 “영성지도자로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드워즈를 영성지도자로 묘사하며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영성지도 사례를 발굴하고 있으며, 오방식의 “토머스 머튼의 영성지도”는 양심 표명의 관점에서 머튼의 영성지도를 소개하고 있다.


<4부 영성지도와 영성 훈련>은 영성지도를 직접적으로 다룬 글은 아니지만, 영성지도와 관련된 주요 주제들에 대한 학술논문들이다. 최승기의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의 영적 식별”과 이주형의 “한국인의 마음과 영적 분별”, 그리고 이경용의 “영식별로서의 감정 성찰과 영성지도”는 영성지도의 주요 내용들 중의 하나인 영적 분별(식별)에 대한 학술 논문들이다. 또한 백상훈의 “그림 묵상의 영성학적 이해와 영성지도”는 영성지도에서 종종 활용되는 그림 묵상에 대한 교회사적, 영성학적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다음으로 유재경(영남신학대학교)의 “하일러(Friedrich Heiler)의 신비적 기도와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의 관상 기도에 대한 탐구”와 양정호의 “노르위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의 기도의 신학”은 영성지도의 소재가 되는 기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제공하는 학술논문들이다. 그리고 최광선의 “생태적 영성 훈련을 위한 『영신수련』”과 최봉규의 “영적 성숙을 돕는 영성지도를 위한 신학적 성찰(theological reflection)”은 영성지도가 동반된 또는 영성지도에 도움이 되는 영성 훈련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5부 영성지도의 현장>에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영성지도자들의 경험이나 사례나 제안을 담은 에세이들로 구성되었다. 박신향의 “영성지도, 거룩하고 안전한 공간: 한 중년 여성의 위기와 영성지도 이야기”, 이정희의 “사마리아 여인의 발견: 진정한 삶을 위한 자기 초월”은 영성지도자로서, 그리고 영성지도자를 돕는 수퍼바이저로서의 경험을 진솔하게 고백한 에세이들인데, 영성지도자에 대한 이론적인 글보다 영성지도자의 정체성과 삶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이어서 유재경(영락교회)의 “영성지도: 영적 우정을 통한 영적 성장의 길”, 박순희의 “교회 기도학교 개설을 위한 제안: ‘감람산기도학교’를 중심으로”, 이귀옥의 “생애기도를 통한 하나님 만남과 영성지도”, 정재상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통한 장년부 영성 훈련과 영성지도”는 영성지도를 활용하여 교회나 리트릿센터에서 실시한 실제적인 영성지도 프로그램의 사례나 제안을 담은 유용한 글들이다.


앞서 이 책은 처음부터 영성지도에 관한 학술적인 논문들과 실제적인 에세이들을 모은 문집의 형태로 기획된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였다.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의 결과물은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편집자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흠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모두 편집을 맡은 본인의 부족함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삶 속에서도 기쁨으로 원고를 보내주신 필자들의 참여와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섬김으로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고 발간이 가능하게 되었다. 누구보다 오방식, 김경은 교수께서 책의 기획 단계부터 필자 섭외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앞서서 섬겨주셨다. 이강학 교수께서도 기획안을 검토해 주시고, 부록의 영성지도 참고도서 목록을 정리해 주셨다. 주선영 목사께서는 유해룡 교수님과 인터뷰 후 생애와 연보를 정리해 주셨고, 박세훈 목사께서는 음동성 목사님과 인터뷰 후 서문을 대필해 주셨다. 이보슬 전도사께서는 유해룡 교수님의 저작 목록 정리에 도움을 주셨고, 심정구 목사께서 유해룡 교수님의 사진을 촬영해 주셨다. 무엇보다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김재현 원장님과 숙련된 편집팀 류명균, 박송화, 김지원, 최선화, 이주영 님은 짧은 시간 안에 훌륭하게 책을 만들어 주셨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감사를 드린다.


책임편집자 권혁


교보문고   알라딘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he seek me diligently and found me).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May the Lord grant to him to be finding mercy from the Lord)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디모데후서 1:16-18)


긍휼의 특징은 발견하는 것이다. 긍휼의 사람은 긍휼이 필요한 자를 발견한다. 하나님의 긍휼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을 발견한다. 긍휼은 부지런하다.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중독 때문이 아니라, 긍휼이 필요한 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부지런다. 긍휼은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 나와는 참 다르구나!


2018. 7. 6.

「묵상과 설교」(2018년 7-8월)에 게재된 글을 옮겨 놓는다. 이 글은 몇 년 전 산책길 기독교영성학당에 게재했던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슬퍼하는 자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윤동주의 팔복그리고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

 


성경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기도 하고, 또한 많은 문학작품을 낳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영적 통찰과 교훈과 체험을 담고 있다(딤후 3:16). 그래서 성경은 열린 마음과 진지한 자세로 말씀을 읽는 독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독서를 통한 새로운 영적 체험이나 통찰로 인도한다. 같은 구절이라 하여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른 해석과 적용을 낳는다. 또한 같은 구절을 같은 사람이 읽어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항상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읽는 시기에 따라 다른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언제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예리한 칼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찔러 쪼갠다(4:12).


이 글에서는 마태복음 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을 읽고 각각 다른 체험을 한 두 사람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는 성경 메시지와 에세이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등으로 유명한 목회자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시다. 피터슨은 주로 산문으로 된 책을 써왔지만, 2013년에는 거룩한 행운(The Holy Luck)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가 번역한 메시지가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피터슨이 시집을 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진 피터슨의 시집 거룩한 행운은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우러난 여덟 편의 시들의 모음이다. 그리고 2바스락거리는 풀”(The Rustling Grass)에는 창조세계 속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시들이, 3부드러운 돌들”(Smooth Stones)에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1부의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행운의 슬픈 자(The Lucky Sad). 그런데 제목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슬픈 사람불행한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시인은 이 시의 제목에서부터 그 통념을 뒤집고 있다. 이것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슬픈 자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지 이제 그의 시를 직접 읽어 보자. 먼저 영어 원문으로 인용하고, 그 다음에는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한국어로 옮겨서 소개한다.

 


The Lucky Sad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lash floods of tears, torrents of them,

Erode cruel canyons, exposing

Long forgotten strata of life

Laid down in the peaceful decades:

A badlands beauty. The same sun

That decorates each day with colors

From arroyos and mesas, also shows

Every old scar and cut of lament.

Weeping washes the wounds clean

And leaves them to heal, which always

Takes an age or two. No pain

Is ugly in past tense. Under

The Mercy every hurt is a fossil

Link in the great chain of becoming.

Pick and shovel prayers often

Turn them up in valleys of death.[각주:1]

 

 

행운의 슬픈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눈부신 눈물의 홍수, 그것들의 급류가

잔인한 협곡들을 침식시켜 오래 잊혀진

인생의 지층을 노출시킨다

평화로운 세월들 속에 눕혀진

악지(惡地)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를

황야의 작은 협곡과 평평한 언덕의

색깔들로 칠하는 바로 그 태양이 또한

비탄의 모든 오랜 상흔과 상처를 보여준다.

울음은 상처들을 깨끗이 씻어서

치료하기 위해 놓아두는데 치유엔 항상

한두 세대가 걸린다. 과거 시제로는

어떤 고통도 흉하지 않다. 신의 자비

아래에서 모든 상처는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연결고리가 되는 화석이다.

기도는 종종 죽음의 계속에서

그것들을 찾아내는 곡갱이와 삽이다.

 

- 유진 피터슨.

 

혹시 이 시를 읽을 때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이 있는가? 필자는 여행 중에 본 북미의 붉은 협곡과 사막이 눈앞에 떠올랐다.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이다. 이런 협곡들의 옆면은 마치 칼로 잘려진 것과 같은데, 거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지층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화가의 팔레트의 한 부분 같은 다채로운 붉은 색깔들을 띠고 는데, 특히 해질녘 석양이 비칠 때면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난다. 아마도 유진 피터슨은 팔복의 한 구절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협곡들 그리고 황야의 붉은 언덕들이 가지고 있는 지층과 그 속에 오래 간직된 화석들에서 이 시의 영감을 얻은 듯하다.


EASTMAN KODAK COMPANY | KODAK EASYSHARE M550 Digital Camera | Normal program | Pattern | 1/100sec | F/3.5 | 0.00 EV | 5.0mm | ISO-64 | Off Compulsory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화석에 과거의 상처를 비유하고 있다. 물론 이 상처는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고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다. 협곡을 침식시킬 만큼 거대한 급류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비추는 빛 속에서, 곧 오늘의 일상 속에서 빛에 의해 그 상처가 조명되고 있다. 이때의 빛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신의 자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자비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Mercy) 아래에서 그 상처는 과거의 화석이 된다. 그리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연결고리가 된다. , 하나님의 자비로 상처가 치유될 때, 그 아픔과 슬픔을 통과하여 보다 온전한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슬픈 자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이다. 눈물을 통해서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어 온전하게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를 죽음의 계곡에서의 발굴 작업을 위한 곡괭이와 삽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에는 빛이시며,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읽을 시는 그렇지 않다. 비록 같은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앞의 시가 희망으로 빛나고 있다면, 뒤의 시는 절망으로 매우 어둡게 그늘 지워져 있다. 그 시는 윤동주의 팔복이다.

 


팔복 (八福)

- 마태복음 5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각주:2]

 

- 윤동주

 

이 작품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다. 제목은 팔복, 곧 여덟 가지의 복인데, 시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중에 두 번째 복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다. , 슬픔이 다른 일곱 가지 복을 모두 잡아먹어 버렸다. 그것도 원래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시인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 특히 이 시의 자필 원고를 보면, 원래 시인은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라고 썼다가, “오래라는 말에 가운뎃줄을 긋고 영원히라는 말로 고쳐 써넣었다. “오래영원히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래 슬픈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그 슬픔이 사라질 여지가 남아 있지만, 영원히 슬픈 사람에게는 그 여지마저도 없다. 시인은 그만큼 끝이 없는 절망에 빠져 있다.


Apple | iPhone 6 | Normal program | Pattern | 1/40sec | F/2.2 | 0.00 EV | 4.2mm | ISO-32 | Off Compulsory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때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012월 무렵이었다. 이 사실은 시인이 왜 이렇게 거대한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신에 대한 불신과 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일까? 이러한 관점으로 이 시를 해석한 연구자들이 있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이 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문자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 의미보다 더 깊은 사고와 정서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이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히브리 문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한나 크론펠트(Chana Kronfeld)에 의하면 억압당하고 한정된 인간이 권위 있는 텍스트를 급진적으로 고쳐 쓰는 것은 때때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방식이다.” 비슷하게 힘없는 식민지 청년이었던 시인 윤동주는 위로에 대한 성서의 말들을 급진적으로 개정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자신과 독자들의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을 하나님께 표현하였다. 그가 진정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믿었다기보다는 성경에서 약속된 위로의 복을 영속적인 슬픔에 대한 기대로 바꿈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처한 심각하게 슬픈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비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시는 절망 가운데 부르는 비탄의 노래다. 비록 기도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절박한 기도다. 거대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역설적인 간구다.


이것은 윤동주가 비슷한 시기에 쓴 위로라는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병원 뜰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한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젊은이는 거기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보게 되는데, 그 나비는 거미줄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린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가 다가와 나비를 줄로 칭칭 감아 버리자, 이 사나이는 한숨을 내쉰다. 이에 시적 화자는 이 젊은이를 가엽게 여기고, 위로하고자 한다.

 

[]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윤동주, 위로3.

 

재미있는 것은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라고 했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만큼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강력한 구원과 위로의 행동이 없다. 거미줄을 헝클어뜨림으로써 화자는 나비를 구원한다. 비록 화자가 직접 젊은이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한숨을 쉬며 체념하던 젊은이는 나비가 놓임을 얻는 것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동주가 팔복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성경의 메시지를 뒤집어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표현한 것은, 위로에서 시적 화자가 거미줄을 뒤헝큰 것과 비슷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은 슬픈 자기 민족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구원할 수는 없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처럼 성경의 텍스트를 급진적으로 고쳐 쓰는 시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팔복은 동족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의 시이자 역설적인 위로의 시.


그렇다면, 같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행운의 슬픈 자팔복은 왜 이렇게 다를까? 그것은 시인의 위치 때문이다. 행운의 슬픈 자에서 슬픔은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처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그 상처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팔복의 시적 화자는 그 상처, 아니 상처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그 절망과 슬픔의 한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한 가운데에서는 지금의 아픔이 나중에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라는 식의 해석에는 위로를 얻지 못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나아가 해야 하는 일은 우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맹목적인 긍정의 옷, 또는 이론적인 희망의 옷을 입히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개념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때에, 그 기존의 개념을 헝클어뜨리는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할 때에 그 기존의 개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설적인 믿음의 행동이다. 현실을 믿음으로해석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경한자신을 책망하시기보다 긍휼히 여기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이다.


  1. Eugene Peterson, Holy Luck (Grandrapids, MI: Eedermans, 2013), 4. [본문으로]
  2. 왕신영 외 편집,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1999), 17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