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설교」(2018년 7-8월)에 게재된 글을 옮겨 놓는다. 이 글은 몇 년 전 산책길 기독교영성학당에 게재했던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슬퍼하는 자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윤동주의 팔복그리고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

 


성경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기도 하고, 또한 많은 문학작품을 낳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영적 통찰과 교훈과 체험을 담고 있다(딤후 3:16). 그래서 성경은 열린 마음과 진지한 자세로 말씀을 읽는 독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독서를 통한 새로운 영적 체험이나 통찰로 인도한다. 같은 구절이라 하여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른 해석과 적용을 낳는다. 또한 같은 구절을 같은 사람이 읽어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항상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읽는 시기에 따라 다른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언제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예리한 칼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찔러 쪼갠다(4:12).


이 글에서는 마태복음 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을 읽고 각각 다른 체험을 한 두 사람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는 성경 메시지와 에세이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등으로 유명한 목회자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시다. 피터슨은 주로 산문으로 된 책을 써왔지만, 2013년에는 거룩한 행운(The Holy Luck)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가 번역한 메시지가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피터슨이 시집을 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진 피터슨의 시집 거룩한 행운은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우러난 여덟 편의 시들의 모음이다. 그리고 2바스락거리는 풀”(The Rustling Grass)에는 창조세계 속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시들이, 3부드러운 돌들”(Smooth Stones)에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1부의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행운의 슬픈 자(The Lucky Sad). 그런데 제목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슬픈 사람불행한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시인은 이 시의 제목에서부터 그 통념을 뒤집고 있다. 이것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슬픈 자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지 이제 그의 시를 직접 읽어 보자. 먼저 영어 원문으로 인용하고, 그 다음에는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한국어로 옮겨서 소개한다.

 


The Lucky Sad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lash floods of tears, torrents of them,

Erode cruel canyons, exposing

Long forgotten strata of life

Laid down in the peaceful decades:

A badlands beauty. The same sun

That decorates each day with colors

From arroyos and mesas, also shows

Every old scar and cut of lament.

Weeping washes the wounds clean

And leaves them to heal, which always

Takes an age or two. No pain

Is ugly in past tense. Under

The Mercy every hurt is a fossil

Link in the great chain of becoming.

Pick and shovel prayers often

Turn them up in valleys of death.[각주:1]

 

 

행운의 슬픈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눈부신 눈물의 홍수, 그것들의 급류가

잔인한 협곡들을 침식시켜 오래 잊혀진

인생의 지층을 노출시킨다

평화로운 세월들 속에 눕혀진

악지(惡地)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를

황야의 작은 협곡과 평평한 언덕의

색깔들로 칠하는 바로 그 태양이 또한

비탄의 모든 오랜 상흔과 상처를 보여준다.

울음은 상처들을 깨끗이 씻어서

치료하기 위해 놓아두는데 치유엔 항상

한두 세대가 걸린다. 과거 시제로는

어떤 고통도 흉하지 않다. 신의 자비

아래에서 모든 상처는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연결고리가 되는 화석이다.

기도는 종종 죽음의 계속에서

그것들을 찾아내는 곡갱이와 삽이다.

 

- 유진 피터슨.

 

혹시 이 시를 읽을 때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이 있는가? 필자는 여행 중에 본 북미의 붉은 협곡과 사막이 눈앞에 떠올랐다.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이다. 이런 협곡들의 옆면은 마치 칼로 잘려진 것과 같은데, 거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지층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화가의 팔레트의 한 부분 같은 다채로운 붉은 색깔들을 띠고 는데, 특히 해질녘 석양이 비칠 때면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난다. 아마도 유진 피터슨은 팔복의 한 구절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협곡들 그리고 황야의 붉은 언덕들이 가지고 있는 지층과 그 속에 오래 간직된 화석들에서 이 시의 영감을 얻은 듯하다.


EASTMAN KODAK COMPANY | KODAK EASYSHARE M550 Digital Camera | Normal program | Pattern | 1/100sec | F/3.5 | 0.00 EV | 5.0mm | ISO-64 | Off Compulsory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화석에 과거의 상처를 비유하고 있다. 물론 이 상처는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고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다. 협곡을 침식시킬 만큼 거대한 급류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비추는 빛 속에서, 곧 오늘의 일상 속에서 빛에 의해 그 상처가 조명되고 있다. 이때의 빛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신의 자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자비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Mercy) 아래에서 그 상처는 과거의 화석이 된다. 그리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연결고리가 된다. , 하나님의 자비로 상처가 치유될 때, 그 아픔과 슬픔을 통과하여 보다 온전한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슬픈 자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이다. 눈물을 통해서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어 온전하게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를 죽음의 계곡에서의 발굴 작업을 위한 곡괭이와 삽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에는 빛이시며,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읽을 시는 그렇지 않다. 비록 같은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앞의 시가 희망으로 빛나고 있다면, 뒤의 시는 절망으로 매우 어둡게 그늘 지워져 있다. 그 시는 윤동주의 팔복이다.

 


팔복 (八福)

- 마태복음 5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각주:2]

 

- 윤동주

 

이 작품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다. 제목은 팔복, 곧 여덟 가지의 복인데, 시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중에 두 번째 복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다. , 슬픔이 다른 일곱 가지 복을 모두 잡아먹어 버렸다. 그것도 원래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시인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 특히 이 시의 자필 원고를 보면, 원래 시인은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라고 썼다가, “오래라는 말에 가운뎃줄을 긋고 영원히라는 말로 고쳐 써넣었다. “오래영원히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래 슬픈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그 슬픔이 사라질 여지가 남아 있지만, 영원히 슬픈 사람에게는 그 여지마저도 없다. 시인은 그만큼 끝이 없는 절망에 빠져 있다.


Apple | iPhone 6 | Normal program | Pattern | 1/40sec | F/2.2 | 0.00 EV | 4.2mm | ISO-32 | Off Compulsory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때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012월 무렵이었다. 이 사실은 시인이 왜 이렇게 거대한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신에 대한 불신과 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일까? 이러한 관점으로 이 시를 해석한 연구자들이 있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이 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문자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 의미보다 더 깊은 사고와 정서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이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히브리 문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한나 크론펠트(Chana Kronfeld)에 의하면 억압당하고 한정된 인간이 권위 있는 텍스트를 급진적으로 고쳐 쓰는 것은 때때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방식이다.” 비슷하게 힘없는 식민지 청년이었던 시인 윤동주는 위로에 대한 성서의 말들을 급진적으로 개정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자신과 독자들의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을 하나님께 표현하였다. 그가 진정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믿었다기보다는 성경에서 약속된 위로의 복을 영속적인 슬픔에 대한 기대로 바꿈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처한 심각하게 슬픈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비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시는 절망 가운데 부르는 비탄의 노래다. 비록 기도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절박한 기도다. 거대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역설적인 간구다.


이것은 윤동주가 비슷한 시기에 쓴 위로라는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병원 뜰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한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젊은이는 거기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보게 되는데, 그 나비는 거미줄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린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가 다가와 나비를 줄로 칭칭 감아 버리자, 이 사나이는 한숨을 내쉰다. 이에 시적 화자는 이 젊은이를 가엽게 여기고, 위로하고자 한다.

 

[]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윤동주, 위로3.

 

재미있는 것은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라고 했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만큼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강력한 구원과 위로의 행동이 없다. 거미줄을 헝클어뜨림으로써 화자는 나비를 구원한다. 비록 화자가 직접 젊은이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한숨을 쉬며 체념하던 젊은이는 나비가 놓임을 얻는 것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동주가 팔복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성경의 메시지를 뒤집어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표현한 것은, 위로에서 시적 화자가 거미줄을 뒤헝큰 것과 비슷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은 슬픈 자기 민족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구원할 수는 없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처럼 성경의 텍스트를 급진적으로 고쳐 쓰는 시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팔복은 동족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의 시이자 역설적인 위로의 시.


그렇다면, 같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행운의 슬픈 자팔복은 왜 이렇게 다를까? 그것은 시인의 위치 때문이다. 행운의 슬픈 자에서 슬픔은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처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그 상처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팔복의 시적 화자는 그 상처, 아니 상처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그 절망과 슬픔의 한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한 가운데에서는 지금의 아픔이 나중에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라는 식의 해석에는 위로를 얻지 못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나아가 해야 하는 일은 우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맹목적인 긍정의 옷, 또는 이론적인 희망의 옷을 입히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개념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때에, 그 기존의 개념을 헝클어뜨리는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할 때에 그 기존의 개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설적인 믿음의 행동이다. 현실을 믿음으로해석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경한자신을 책망하시기보다 긍휼히 여기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이다.


  1. Eugene Peterson, Holy Luck (Grandrapids, MI: Eedermans, 2013), 4. [본문으로]
  2. 왕신영 외 편집,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1999), 170. [본문으로]

「순교신학과 목회」(2018)에 게재된 글을 옮겨 놓는다.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일부를 번역하고 확대한 것이다.



숨은 신의 시대와 순교적 삶

 

권혁일

기계 장치의 신 vs 숨은 신

인간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그 고통을 가장 극심하게 그리고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신의 침묵, 또는 신의 부재일 것이다. 종교를 막론하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 가운데 있는 인간은 신, 또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도움을 호소한다. 그러나 신이 나타나 도와주기는커녕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침묵할 때, 심지어 신이 부재할 때, 곧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 있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인간은 현재 겪고 있는 역경보다 더 고통스러운 절망 속으로 빠지게 된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히틀러가 전쟁과 학살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몰아넣던 때에 불의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처형당한 인물이다. 본회퍼는 감옥에서 쓴 한 편지에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계 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의 역할로 국한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때 기계 장치의 신이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무대 위의 상황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을 때에 갑자기 신이 기계 장치를 타고 나타나 문제를 해결한 데서 유래한 개념이다. , “기계 장치의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거나, 자신의 실패를 극복할 능력을 얻기 위해 무대 위로 불러내는신을 말한다.[각주:1] 오늘날 영화에서 슈퍼맨이나 어벤져스와 같은 영웅들이 극적인 상황에서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다.

이러한 비판은 비단 본회퍼 시대의 독일 그리스도인들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 또는 이민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진지하게 생각할 점들을 던져준다. 특히 20세기 후반 한국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였고, 또 성도들은 그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문제는 하나님 그분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랑하기보다는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주인공인 삶의 무대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다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슈퍼맨을 부르듯이 하나님을 찾고 불렀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도 그런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기에 그들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주시기도 하셨다. 마치 사사시대에 자신들의 뜻과 방법대로 살던 히브리인들이 고난을 만나 그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주께서 사사들을 통해 그들을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계 장치의 신마저 잘 보이지 않는 시대다. 본회퍼가 살았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히틀러에 의해서 학살당했다.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나타나 그들을 구해주시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도 마찬가지다.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몰아갈 때, 그 비행기에 탄 많은 승객들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었을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확신을 가지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히지 않고 안전하게 착륙하는 그런 영화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20144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 역시 마찬가지다.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배가 서서히 바닷속으로 침몰해 가는 광경을 TV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보던 많은 이들이 주님 제발 저 아이들을 건져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결국 초기에 배를 탈출한 사람들 외에는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고, 희생자의 가족들은 하나님 왜 모른 체 하셨나요?”[각주:2]라며 주님께 울부짖었다. 이것들뿐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과 전쟁은 물론, 고통 가운데 있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침묵, 또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기계 장치의 신의 시대라기보다는 숨은 신(deus absconditus)”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뤼시앵 골드만(Luicien Goldmann: 1913-1970)에 따르면, 숨은 신은 항상 부재하기도 하고, 동시에 항상 존재하는 신이다. , 숨은 신은 항상 존재하지만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숨은 신을 경험하는 사람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비극적 인물(tragic man)”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방관자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시다고 생각한다. , 사람들의 필사적인 호출에 응답하여 인간의 비극이라는 무대 위로 등장하는 기계 장치의 신과는 대조적으로 숨은 신은 침묵하며 무대 뒤에 또는 무대 밖에 존재한다.[각주:3]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기계 장치의 신으로 여기며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숨은 신을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은 믿지만,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주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고, 심지어 주님의 임재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교회에 나오는 이들도 혼란과 절망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오늘날 우리의 미래는 너무나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오늘날의 세상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밝은 미래와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왜곡된 사회 구조와 체계로 인해, 젊은이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꿈을 잃어 가고 있다. 중년 세대들은 급증하는 가계 부채로 인해 점점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있으며, 노년 세대들은 열악한 사회보장제도로 인해 병든 몸을 이끌고 폐지를 주우러 다니거나, 빈곤층으로 전락하여 간신히 연명하고 사는 경우도 많다. 곳곳에 위험이 널려 있고,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당장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경험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일까?

 

신정론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다는 경험은 비단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숨은 신의 개념은 성경 속의 이야기들과 인간 역사에 걸쳐 오랫동안 존재해 왔으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숨음에 대한 첫 번째 직접적인 언급은 신명기에서 발견된다. 신명기 31:16-18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할 것과 당신께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진노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각주:4]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신들을 섬김으로 인해 그들로부터 얼굴을 숨기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통에서는 역경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숨으시는 것은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되어졌다. 이런 배경 속에서 시편 89편의 화자는 다음과 같이 탄원한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각주:5] 시인은 하나님께 종들에게 화내기를 그치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숨음을 징벌로 이해하는 것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감춤을 모두 다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다른 시편들에서 화자들이 악한 죄인들이 아니라 순수한 희생자들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시편 55편은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각주:6]라는 긴급한 청원으로 시작하는데, 이 시는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의 호소가 아니라 가까운 친구로부터 배반당한 사람의 탄원시다.

또한 다른 경우를 살펴보면, 비록 사람들이 원수들의 압제 아래에 놓인 이유가 그들의 죄 때문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숨음이 화난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구원자의 성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담긴 이사야 4515절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외친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사야 45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시지만, 인간의 육체적 눈에 보이는 무능한 우상들과는 대조적으로 당신을 숨기시는 분으로 역설적으로 계시된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는 가장 혹독한 비극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를 숨기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성적 합리화가 사람들의 고통을 손쉽게 경감시켜 주거나 비극으로부터의 탈출구를 활짝 열어 주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숨은 신은 오늘날에도 재난과 고통의 한 가운데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 속에 존재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이자 예수회 사제인 존 소브리노는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Where Is God?)라는 그의 책에서 2001년 엘살바도르 지진, 뉴욕에서 일어난 9·11 테러, 그리고 10·7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공습과 같은 최근의 비극적인 재난들을 숙고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지진 가운데 숨어 계시며, 침묵 속에서 희생자들과 함께 고통하고 계시다.’ 그러나 희망은 죽지 않았고, 하나님은 희망 가운데 신비하게 현존하고 계신다.”[각주:7] ,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들은 숨은 신, 즉 실존하지만 쉽게 발견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비록 소브리노는 하나님께서 희생자들과 함께 고통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지만, 그러한 믿음으로 희생자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소브리노는 종교적 광신자들이 자신들의 악이나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용하는 경향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행동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좋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각주:8]을 거부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생명에 배치되고, 후자는 희생자들을 그들의 심각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브리노는 재난 속에서 하나님을 숨겨진 채로 그리고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 두기를 선호하는 듯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신정론, 곧 실재하는 악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합리화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내가 믿기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은 신정론이 이론적으로 풀리지 않은 채로 사는 것이다. 고통의 역사를 통과하는 오솔길을 계속해서 열어가는 실천을 행하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옆에서 걸으시는 하나님과 함께 말이다.”[각주:9]

숨은 신은 사람들이 비극적인 사건들 가운데서 경험하는 역사적 그리고 실존적 실재다.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실재를 직면해야 한다. 비극적 사건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던지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또는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신정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숨은 신의 때를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긴급한 문제다. 이러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숨은 신이라는 주제에서 경험의 문제가 맨 앞에 대두된다.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접근을 강조한 인물로는 스페인 영성가이자 가톨릭 개혁가인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 1542-1591)을 말할 수 있다. 그는 영적 찬송(The Spiritual Canticle)에서 인간의 지식과 감정이 얼마나 깊고 고상한지에 상관없이, 그것들로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것들로부터 숨어 계시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혼이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 말씀이시여, 나의 신랑이시여, 당신께서 숨어 계신 곳을 제게 보여 주소서.” 영혼은 신의 본질을 계시해 주기를 요청한다. 왜냐하면 성 요한에 따르며 하나님의 아들이 숨어 있는 곳이 아버지의 품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품이 바로 모든 인간적 시각을 초월하는 신의 본질이다. 이 본질은 이사야가 하나님께 진실로 주는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의 이해로부터 숨겨져 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운다. 그분의 임재에 대한 느낌과 소통은 그것들이 얼마나 위대하든지 간에, 그리고 영혼이 이생에서 갖게 되는 하나님 지식이 얼마나 지고하고 심오하든지 간에,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다. 또한 그것들은 그분과 어떤 유사점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전히 영혼으로부터 숨어 계신 것이 정확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든 위엄들 한가운데서 항상 그분을 숨어 계신 것으로 간주하며, 그분께서 숨은 곳에서 주님,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라고 말하며 그분을 추구하는 것이 적절하다.[각주:10]

 

십자가의 요한은 물론 무념적 전통(apophatic tradition)에 속해 있는 다른 신비가들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숨어 계신 것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하나님 부재 경험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혼으로부터 실제로 멀리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가장 가까이 계신 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것으로 간주하고, “주님,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으며 그분께서 숨은 곳에서 그분을 추구하라고 권한다. 이러한 외침이 바로 그의 시 영혼과 신랑 사이의 노래의 첫 구절이다. 이 시는 주로 하나님 부재 경험과 임재 경험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시뿐만이 아니라 시에 대한 그의 주석서들은 그 자신의 신비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숨은 신의 문제는 이론적인 측면에서보다는 경험적인 측면에서 접근되고 감상될 필요가 있다.

 

세속화 시대의 숨은 신

십자가의 요한에게 있어서 숨어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소위 영적인또는 내적인세계로만 국한 되지 않는다. 하나님 부재의 경험은 실제적인 삶의 경험, 또는 현실 생활의 경험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십자가의 요한이 하나님 부재, 또는 하나님의 숨어계심을 가장 깊이 경험한 때는 아마도 그가 수도회 개혁에 저항하는 수사들에 의해 납치되어 톨레도(Toledo)의 좁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던 약 9개월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곳에서 그는 스페인 문학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영적 찬송어둔 밤”(The Dark Night)과 같은 서정시들을 썼다. 특히 어둔 밤은 하나님 부재의 경혐을 여러 가지 상징들과 아름다운 표현들을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숨은 신의 주제를 다룰 때에는 하나님 부재 경험으로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비록 시편 기자들, 이사야 선지자, 그리고 십자가의 요한이 살았던 세계들과 오늘날의 세계 사이에 비슷한 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시대와 그들의 시대는 매우 다른 것 또한 사실이다. 제인 코퍼스(Jane Kopas)에 따르면, “오늘날 많은 요소들이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욱 숨어 계신 것으로 보이는 교차로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고 있다. 이 요소들 중 한 가지는 과거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지원해주던 종교적, 신학적, 문화적 세계가 더 이상 이전에 하던 것과 똑같이 우리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다.”[각주:11]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post-Christian era)를 살고 있다. 이 시대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들, 관점들, 그리고 생활 방식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히 상실된 시기이며, 그래서 그것들이 더 이상 사회적 기준으로 간주되지 않는 때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반세기 전에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우리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이미 후기 그리스도교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 이 세상은 기독교적 이상과 태도가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에게로 쫓겨 가는 곳이다.”[각주:12]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디아스포라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머튼은 그의 에세이 디아스포라 속의 그리스도인”(The Christian in the Diaspora)에서 저명한 독일 신학자 카를 라너(Karl Rahner)의 의견, 20세기의 교회는 더 이상 중세의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이 아닌 디아스포라 상황속에 있다는 견해에 동의를 표시한다. 머튼의 설명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상황은 교회가 세상에게 걸림돌, 곧 모순의 표시가 되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항상 위협받는다.”[각주:13] 따라서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디아스포라 상황은 숨은 신의 시대의 또 다른 표현들로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은 서구의 나라들은 머튼의 시대보다 훨씬 더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 또는 디아스포라 상황 속에 처해 있다. 자비에르 대학교(Xavier University) 신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프래무크(Christopher Pramuk)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의 세대는 머튼의 세대로부터 그렇게 멀지않다. 제도 종교에 환멸을 느끼고 있고, 기술의 최면에 걸려있다. 유흥을 탐닉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산만함에 빠져 있다. 테러리즘과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총기 폭력에 홀려 있다. 전쟁으로 불구가 되었고, 경제적 편차와 인종적, 성적 불평등으로 파편화되었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에서 경험이 되는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있는가?”[각주:14] 또한 유럽에서도, 전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2014년에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의 문화적 기억과 문화적 현존은 어떤 면에서 여전히 꽤 강하게 그리스도교적이지만, 그것의 관습적인 실천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영국의 사회는 후기 그리스도교적이다.”[각주:15]

이러한 사회, 문화, 종교적 변화들은 종종 세속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저명한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근대 서구 사회의 세속화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사회에서 그것이 다른 여러 가지 선택들 중의 하나로, 종종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은 선택으로 이해되는 사회로의 이동으로 요약한다.[각주:16] 이와 같은 세속 사회또는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자기만족적이거나 배타적인 휴머니즘, 즉 사람들이 초월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던져버리고 삶의 충만함을 인간 생활 속에서 추구하는 사상이 폭넓게 수용되는 선택이 된다.[각주:17] 그래서 영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경험과 추구가 일어나는 조건이 크게 변화되었으며, 몇몇 이른바 문명화된사람들은 하나님의 죽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아시아의 국가들의 경우에는, 비록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관습이 사회, 문화적 틀을 구성하는 기독교국이 된 적은 없지만, 점점 증가하는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후기 그리스도교 세상에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자비로우셔서 믿음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가르침들이 자신들의 매일의 삶 속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기 그리스도교적 시대, 또는 디아스포라 상황 속에서 고통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숨은 신을 보다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숨음은 인간들의 경험 속에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뉴욕의 911 테러, 엘살바도르 지진, 한국의 세월호 사건과 같은 어떤 비극적 사건으로 인한 가슴을 찢는 고통 속에서 숨은 신과 씨름한다. 다른 이들은 후기 그리스도교적 사회 속의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인간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한계로 인해 감정적으로는 덜 강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침묵 또는 부재를 경험한다. 이 두 가지의 경우에서 공통되는 점은 하나님의 숨음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믿음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기는 동시에 영적 성장을 위한 매우 가치 있는 기회이기도 한다. 제인 코퍼스가 단언하듯이 거대한 하나님의 숨음은 믿음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새로운 영적 전망 속에서 그분의 현존과 부재의 의미를 숙고하라는 초대다.”[각주:18] 그렇다면 사람들의 믿음의 눈을 가려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진리의 불확실성과 불가해성에 대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숨은 신의 시대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일까?

 

Apple | iPhone 6 | Normal program | Spot | 1/391sec | F/2.2 | +0.87 EV | 4.2mm | ISO-32 | Off Compulsory


견디고, 기다려라, 붙잡으라!

버나드 맥긴(Bernard McGinn)은 숨은 신에 관한 그의 글에서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또한 하나님의 숨은 뜻과 본성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방편으로 경험을 강조하였음을 지적하였다.[각주:19] 루터에게 있어서 이사야 4515절의 숨은 신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이성과 이해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오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신자들을 지성을 통해 얻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knowledge about God)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얻는 하나님 지식(knowledge of God)으로 이끌어 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는 자신의 창세기주석에서 독자들을 이렇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나쁜 악마의 형태 아래로 자신을 숨기신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자비, 능력은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경험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저 견디고 주님을 기다려라. 굳게 붙잡으라.”[각주:20]

 

그저 견디고, 주님을 기다려라. 굳게 붙잡으라.”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를 외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고통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조언이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견딘다는 것,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굳게 붙잡으라고 했는데, 오늘날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기다릴 수 있을까?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으로 성탄절을 약 한 달 앞둔 기간을 대강절, 또는 대림절(Advent)로 정하여 지키고 있다. 이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다. 2000여 년 전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미래의 날을 기다리고, 또한 현재적으로 악과 고통이 가득한 지금 여기에 주님의 구원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절기다. 이 대림절에 부르는 찬양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찬송가 104곧 오소서 임마누엘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 개신교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 이사야 458절을 가사로 하는 로라테 첼리(Rorate Caeli)”라는 라틴어 찬양도 대림절에 부르는 대표적인 노래 중의 하나다. 이 노래는 모두 네 절로 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은 이사야 488절 전반부가 후렴구마다 반복되고 있다.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산문이라기보다는 시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비유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은 땅에서 움트는 새싹에 비유되었다. , 하나님은 비와 새싹과 같은 자연 현상에 빗대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비와 새싹 같은 자연 현상에다 비유했을까? 그저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서였을까?

선지자가 이 말씀을 예언한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로 추정된다. 그것은 이사야 451절 이하를 살펴보면, 주님께서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 예언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그들은 매우 고달픈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민족이 암울하고 희망이 없는 일제강점기를 겪었듯이,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고통과 절망이 극심한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때가 되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하시고 있다.

만약 우리가 유대인들의 입장이 되어 이러한 희망과 위로의 예언을 듣는다면 어떠할까? 당장 우리 마음에서 슬픔과 절망이 사라지고, 위로와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될까? 아마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예언을 그대로 믿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그 말씀을 믿기에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암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예언의 근거가 무엇인지 선지자에게 따져 물으며, 그 말은 근거 없는 장밋빛 희망, 또는 지나친 낙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정의와 구원을 자연 현상에다 빗대고 계신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과 같은 자연의 변화는 진리다. 아무리 밤이 어둡고 길어도, 아무리 겨울이 춥고 길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결국 아침이 밝아 오고, 새 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가뭄이 오래 되어 땅이 갈라지고 황폐화되는 때도 있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거짓말처럼 단비가 내려 땅을 적시고 만물을 회복시킨다. 그러므로 이사야 458절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는, 지금은 가물고 황폐하여도 언젠가는 비가 오고 땅에서 새싹이 돋듯이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고, 구원은 반드시 임할 것이라는 진리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사야 45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하나님은 자을 하늘과 땅을 만든 창조주로,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 하고, 땅에서 새싹이 돋게 하시는 세상의 주관자로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이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시며, 땅에서 움트는 새싹과 같이 주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당장 보이는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과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세계는 그분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그분의 구원은 아침같이 도래할 것임을 날마다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숨은 신의 시대를 사는 방법 중의 하나는 이처럼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매일 보는 자연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날마다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비록 당장 우리의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 중에 함께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도 우리는 매일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아침을 맞아들이면서 루터의 권면처럼 그저 견디고 기다릴 수 있다. 겨울이 다 지나가지도 않았는데도 나뭇가지의 껍질을 뚫고 나오는 새순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자연을 보며 절망의 시기를 살아내었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 중의 한 사람이 윤동주 시인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해방 6개월 전인 19452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자연 현상을 보면서 숨어계시는 하나님과 씨름했고, 내적 자아가 깨어나고 성숙했으며, 새 희망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내적 투쟁과 삶의 추구를 자신의 시편들 속에 담아 두었다. 지면의 한계로 그것들을 다 다룰 수가 없어서, 여기에서는 그 중에 흐르는 거리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은 시인이 일본 도쿄에서 유학을 하던 때에 쓴 시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흐르는 거리

 

으스름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 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이여! 그리고 김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보세몇 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트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 휘장에 금단추를 삐였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림(來臨),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1942. 5. 12.[각주:21]

 

이 시의 배경은 어두운 밤이다. 시인은 길거리 모퉁이에 서 있는데, 흐릿한 안개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안개뿐만 아니라 거리 전체가 흘러가고 있다. 이것은 그 만큼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둡고, 불투명하고,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윤동주가 이 시를 쓴 19425월은 일제강점기였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일본 본토도 긴장과 불안에 휩싸여 있는 때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때에 시인을 지탱시켜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거리 모퉁이의 붉은 우체통이다. 시인은 흐르는 거리에서 우체통을 붙잡고 있다. 우체통은 그가 흐르는 거리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의지가 되어 줄 뿐만이 아니라, 당시 타국, “남의 나라”(쉽게 씨여진 시) 일본에서 외롭게 살고 있던 시인을 사랑하는 벗들과 가족들과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우체통을 통해서 오고가는 서신들이었다. , 어둡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시인이 넘어지거나 절망하지 않고 견딜 수 있도록 그 손을 잡아준 존재가 바로 그의 벗들과 가족들이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연락조차 닿지 않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벗들에 대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공유하는 희망은 그를 지탱시켜 주었다.

그리고 또 주목할 내용은 가로등이 꺼지지 않고 어렴풋이나마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거리는 안개로 가득 차 있지만, 가스등이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는 장면은 비록 세상이 어둡고 불투명하지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사소한 것 같고, 미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시인은 꺼지지 않는 가로등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는 동무들에게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보세.”라고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는다. 이렇게 그는 새로운 날,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단추와 금휘장을 단 배달부가 아침과 함께 찬란하게 올 것이라는 희망이다. 여기서 옷과 모자에 금단추와 금휘장을 단 배달부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한다(2:13, 14:14). , 시인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지금은 밤과 같이 매우 어두운 시기지만, 언젠가는 아침과 같은 구원의 때가 올 것이라는 소망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헨리 나우웬은 기다림의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우리가 잘 기다리기 위해서는 함께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권면한다. 그에 의하면,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는 것은 홀로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함께 기다리는 것은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신적인 것이다.”[각주:22]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있으면, 서로가 기다림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 붙잡아 주고 격려한다. 이런 점에서 윤동주 시인이 그의 벗들과 함께 새날, 새 아침을 기다린 것은 매우 잘 한 것이다. 요약하면, 윤동주는 비록 일제강점기라는 숨은 신의 시대를 살았지만, 밤이 지나면 새로운 날의 아침이 온다는 자연의 진리를 붙잡고, 희미한 가로등을 보면서도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벗들과 함께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견디었다.

나아가 윤동주는 숨은 신의 시기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순교적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신은 비록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어떤 명백한 부름이나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는 하나님의 부재의 시기를 살고 있었지만,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점점 더 어두워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겠다는 의지를 단호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했다.

 

십자가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였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가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이 흘리겠읍니다.

 

1941. 5. 31.[각주:23]

 

이러한 순교적인 죽음에 대한 의지는 그저 어느 날 밤에 일어난 감상적인 충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윤동주가 서시에서 표현한 것과 같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의지의 다른 표현이며, 실제로 그의 삶에서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시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실천되었다(쉽게 씨여진 시).

숨의 신의 시대에 순교적 삶을 산 예는 앞서 언급한 디트리히 본회퍼에게서도 발견된다. 본회퍼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21세기의 순교자로 간주되는데, 그의 삶과 죽음은 존 소브리노(Jon Sobrino)의 다음과 같은 순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순교자는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가난하고 억압된 이들을 방어하다가 죽은 사람이다.”[각주:24] 본회퍼는 자신의 시대에 순교가 필요함을 인식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자신이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렸다. 그는 1932년에 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교회들에게 순교자들의 피가 요청되는 때가 돌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놀라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피는 처음의 증인들의 피처럼 아주 순수하거나 깨끗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그 피를 흘릴 용기와 충성심이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의 피 위에는 우리가 무익한 종이라는 거대한 죄책감이 놓여질 것입니다.”[각주:25]

어떤 면에서 숨은 신의 시대는 순교자들의 피가 요청되는 때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피는 박해의 시대 때에 순교자들이 흘린 것과 같은 실제의 피일 수도 있고,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삶, 또는 순교적 삶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으로 느껴지지는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나아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위해 피를 흘리는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진실된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다.[각주:26] 그것은 윤동주와 같이 일제강점기라는 극도로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이들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숨은 신의 시기를 겪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런 때를 만난다면 마르틴 루터의 조언을, 그리고 윤동주와 본회퍼와 같은 신앙의 선배들을 모범을 기억함으로써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로라테 첼리(Rorate Caeli)”라는 대림절 찬양의 3절과 4절의 가사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3. , 주님! 당신의 백성이 겪는 고통을 보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그를 보내어 주소서. 땅의 통치자, 어린 양을 보내소서. 사막의 바위로부터 시온의 딸의 산으로 보내소서. 그래서 그가 포로된 우리의 멍에를 벗기게 하소서.

 

4. 위로를 받으라, 위로를 받으라, 나의 백성아. 너의 구원이 속히 임할 것인데, 왜 슬픔 속에서 쇠약해지겠느냐? 왜 슬픔이 너를 사로잡았느냐? 내가 너를 구원할 것이다.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내가 너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너의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1. Dietrich Bonhoeffer, Letters & Papers from Prison, ed. Eberhard Bethge (New York: Touchstone, 1997), 283-84. [본문으로]
  2. 이사라, “하나님, 답을 듣고 싶어요. 왜 모른 척하셨나요”, 〈뉴스앤조이〉, 2014년 9월 18일,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7551 (2014년 9월 20일 접속). [본문으로]
  3. Lucien Goldmann, The Hidden God: A Study of Tragic Vision in the Pensées of Pascal and the Tragedies of Racine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4), 36-37. [본문으로]
  4. 신명기 31:16-18 (개역개정). [본문으로]
  5. 시편 89:46 (개역개정). [본문으로]
  6. 시편 55:1 (개역개정). [본문으로]
  7. Jon Sobrino, Where Is God?: Earthquake, Terrorism, Barbarity, and Hope, trans. Margaret Wilde (Maryknoll, NY: Orbis Books, 2004), 137. [본문으로]
  8. Ibid., 143. [본문으로]
  9. Ibid., 142. [본문으로]
  10. 『영적 찬송』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자신의 시 “영혼과 신랑 사이의 노래”(Stanzas between the Soul and the Bridegroom)에 대한 주석이다. 이 시는 “아가, 곧 솔로몬의 노래를 간추려서 풀어서 쓴 것이다. 아가는 하나님에게 매혹된 영혼의 신비적 고통과 열망을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심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John of the Cross, A Spiritual Canticle of the Soul and the Bridegroom Christ, trans. David Lewis (Grand Rapids, M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1995), 2, 21. [본문으로]
  11. Jane Kopas, Seeking the Hidden God (Maryknoll, NY: Orbis Books, 2005), 4. [본문으로]
  12. 또한 머튼은 그의 다른 글에서 “진실로 우리는 매우 거세게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패트리샤 버튼(Patricia A. Burton)은 “후기 그리스도교”(post-Christian)라는 말의 어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날 ‘후기 그리스도교’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머튼이 이 말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비교적 새로운 용어였다. 그는 이 용어의 기원을 C. S. 루이스(Lewis)에게 돌리는데, 루이스는 그의 1954년 캠브리지 대학교 취임 기념 강연에서 이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Thomas Merton, 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 (Maryknoll, NY: Orbis Books, 2004), 72; Thomas Merton, Passion for Peace: The Social Essays, ed. William H. Shannon (New York: Crossroad Publishing, 1995), 12; Patricia A. Burton, introduction to 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 by Thomas Merton (Maryknoll, NY: Orbis Books, 2004), xxviii. [본문으로]
  13. Thomas Merton, Seeds of Destruction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1964), 196. [본문으로]
  14. Christopher Pramuk, At Play in Creation: Merton’s Awakening to the Feminine Divine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2015), xi. [본문으로]
  15. Andrew Sparrow, “Britain is now ‘post-Christian’, says ex-archbishop Rowan Williams,” The Guardian, April 27, 2014, http://www.theguardian.com/uk-news/2014/apr/27/britain-post-christian-says-rowan-williams (accessed September 21, 2015). [본문으로]
  16. Charles Taylor, A Secular Ag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2007), 1-3. [본문으로]
  17. Ibid., 19. [본문으로]
  18. Kopas, Seeking the Hidden God, 7. [본문으로]
  19. Bernard McGinn, “Vere Tu Es Deus Absconditus: The Hidden God in Luther and Some Mystics,” in Silence and the Word: Negative Theology and Incarnation, ed. Oliver Davies and Denys Turn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2002), 94-95. [본문으로]
  20.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ume 7: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38-44, ed. Jaroslav Pelikan (St. Louis, MO: Concordia, 1965), 175. [본문으로]
  21. 왕신영, 심원섭, 오오무라 마스오, 윤인석 엮음,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2002), 179-180. [본문으로]
  22. 헨리 나우웬, 『영성에의 길』(서울: IVP, 2002), 79. [본문으로]
  23. 왕신영 외 엮음,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155-156. [본문으로]
  24. Jon Sobrino, Where Is God?, xxxii. [본문으로]
  25. Eberhart Bethge, Dietrich Bonhoeffer: Theologian, Christian, Man for His Times; a Biography, rev. ed., ed. Victoria J. Barnett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236-37. [본문으로]
  26. Blaise Pascal, Pensees, VIII, 585. [본문으로]

137차 한국교회사학회 | 2018. 6. 2. 감리교신학대학교

 

지형은의 말씀과 삶이 어우러질 때에 대한 논찬

 


 

지형은 박사의 말씀과 삶이 어우러질 때는 신학과 성서와 목회에 대한 발표자의 학문적 통찰과 현장 목회 경험이 잘 어우러진 글이다. 먼저 발표자는 켄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4-1109)의 유명한 명제 “Cur Deus homo”를 인용하며, 신학(神學)이란 왜 신이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한 탐구라고 주장한다. 그는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말씀이 육신이 된 사실을 언급하며,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몸과 물체적인 일상성을 거룩하게하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나 물질을 속된 것으로 여기는 이원론적 사고를 거부한다. 나아가 물질성과 일상성을 거룩하게 여기는 관점을 도약대로 삼아 기독교 신학은 유물론과 유신론 사이의 낡은 갈등과 분리를 뛰어 넘는다. 발표자에 의하면 물질의 세계를 창조하신 영이신 하나님이 그 세계를 당신의 품에 끌어안으심으로써 유물론과 유신론 너머의 세계가 열린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을 영이신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당신의 품에 끌어안으신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몰론 이 말에는 발표자의 해석뿐만이 아니라 논찬자의 해석도 포함되어 있다. 성육신(incarnation)이 하나님의 영이 물질세계와 만나는 유일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상징적 사건이라 묘사하였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1:2), 때때로 선지자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충만하게 하셨으며, 예수의 부활 이후 그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 거하셨다(2:1-5, 16-18; 고전3:16).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능력과 신성이 창세로부터 온 천지 만물 속에 분명히 빛나고 계신다고 증언한다(1:20).

발표자가 말하는 유물론과 유신론 너머의 세계는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으로 보인다. 지형은 박사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각각 십계명과 주기도문이다. 그는 십계명이란 사람이 삶으로 살아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며, 주기도문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사람 사는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이 핵심이라고 요약한다. 이렇게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두 중심점으로 구성된 타원형이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며, 이 다스림의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실현하려고 살고, 또 가르치셨던 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말씀,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논증한다.

다른 말로,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삶이 되는 길을 걸으셨다.” 그러므로 그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가 걸었던 길, 곧 말씀이 삶이 어우러지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지형은 박사는 그것이 말씀을 온 삶으로 순명(殉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따라죽을 ()’을 사용하여, “순명(殉命)”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자신이 죽는(고전15:31; 2:20) 대가를 치러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발표자는 하늘 아버지의 말씀에 내 삶과 죽음을 조금치도 남김없이 옹글게 바쳐 올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길이라 단언한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아서 말씀과 삶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병들고 약해지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 발표자의 진단이다. 이 진단에 따르면 교회 회복을 위한 처방은 이 발표의 제목처럼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내가 죽음으로써 말씀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이 발표자가 목회하는 성락성결교회의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리더십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계를 변화시킨다!”라는 목적 선언문에 담겨져 있다. 이처럼 지형은 박사는 발표를 신학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했지만, 논지를 사변적적 논의가 아니라 말씀과 삶의 어우러짐이라는 실천적 관점에서 풀어 나가며, “신학적 작업에 연관된 사람들의 삶에서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신학은 교회를 망친다.”라는 기독교 역사의 경험에서 우러난 경고로 발표를 마친다.

 

기독교 영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말씀과 삶의 어우러짐을 추구하는 발표자의 주장은 제자도(discipleship)’ 영성의 특징을 보인다. 필립 쉘드레이크(Philip Sheldrake)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사의 근본적이고 성서적인 이미지는 제자도. 그는 그의 책 간단한 영성사(A Brief History of Spirituality)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분의 삶을 본받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참된 기독교적 삶의 본질적인 이상과 표지가 되어 왔음을 논증한다. 나아가 그는 제자도의 개념에는 회심”(conversion)예수의 길을 따름”(following the way of Jesus)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 둘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응답과 참여라고 말한다.[각주:1] 지형은 박사도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것이 회개, “기독교 신앙의 길은 예수의 길이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고 살고 가르치셨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지형은 박사가 추구하는 말씀과 삶의 어우러짐은 제자도의 다른 표현이다.

또한 말씀과 삶의 어우러짐을 신화’(神化, deification) 또는 하나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학(Theology)이 사람이 되신 신에 대한 탐구라면, 영성학(Spirituality)은 신과 하나 되려는 사람의 추구에 대한 학문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기독교 영성의 최고 이상인데, 사람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다. 이 때 하나님과의 연합, 또는 신화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를 말한다. 요한 사도가 말하는 바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상태이며(15:4),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벧후1:4).

기독교 영성사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은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고, 그래서 또한 다양하게 추구되고 경험되어 왔다. 그 중에서 예수회의 창시자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는 그의 영성훈련 매뉴얼인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에서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역하며, 군사들을 부르고 있는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예수회의 영성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할 때 경험되어진다. 이러한 예수회의 영성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Finding God in All Things)라는 모토로 요약되는데, 이것은 이른바 종교적인 사건들과 현장에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상과 자연 세계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형은 박사가 추구하는 일상 속에서의 말씀과 삶의 어우러짐은, 비록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 속에서 말씀을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사람이 되신 말씀(1:1)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만약 이것이 논찬자의 과대 해석이라면, 그렇게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더 좋지 않을까 제안해 본다.

이제 논찬을 마무리하며, 토론을 위해 질문을 한 가지 하려고 한다. 사실 발표자가 신학적, 성서적 통찰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기는 했지만, 말씀과 삶의 어우러짐은 오늘날 교회의 설교단과 여러 경건 서적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그렇다면, 저자는 그러한 이상과 목표를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해 나가고 있는가? 다른 말로, 추상적인 선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말씀과 삶의 괴리가 심각한 한국 교회를 위해 학자이자 목회자인 발표자가 주는 실천적인 제언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짧지만 밀도가 높은 글을 읽고, 한국 교회의 회복과 성숙을 위한 좋은 논의에 동참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


  1. Philip Sheldrake, A Brief History of Spirituality (Malden, MA: Blackwell, 2007), 14-1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