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8. 목.


아침에 선배 목사님들을 만나러 오랜만에 '카페 로마'로 갔다. 요즘 감기로 고생하는 몸을 생각해서 드립 커피 대신, 4불을 주고 따뜻한 카페 라떼를 사서 마셨다. 대화도 커피도 모두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저녁에는 운동 겸 과일을 사러 비교적 저렴한 마트인 세이프웨이에 갔다. 3.99불 하는 유기농 블랙베리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다가 비싸다는 생각에 그냥 왔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생각해보니, 커피를 위해서는 4불을 주저 않고 쓸 수 있었는데, 몸에 좋은 유기농 과일에는 그러지 못했다. 제 정신이 아니다.



2014. 9. 19. 금.


이번 일주일은 거의 감기 기운, 약 기운, 카페인 기운으로 지내는 듯하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아프고, 코가 막히고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도 마찬가지였다. 부엌일과 빨래까지 하고 나서 기진하여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시 뒤 아내로부터 걸려온 전화벨 소리에 놀라서 일어났는데, 도무지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가방을 들고 까페로 가서 커피를 들고 앉았는데, 여전히 정신이 없어서 커피도 좀 쏟았다. 작년 12월부터 며칠 간격으로 밤에 항히스타민제를 먹으면 그 다음날은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일이 많긴 했지만, 이번 주일은 특히 맑은 정신으로 있는 때가 거의 없는 것 같다. 견디는 것 말고는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2014. 9. 20. 토.


어제 저녁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밤중에 잠이 깨었다. 몸도 마음도 불편해서 한 시간 정도 뒤척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요즘은 몸의 균형도, 생활의 리듬도 무너진 것 같다. 아내는 내가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싫어하기에 이렇게 한밤중에 일어났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비밀이다. 솔직히 나도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싶은데 요즘은 더욱 잘 안 된다. 내 몸도, 생활도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약해진 것 같다. 심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것 같은데, 나름 그것을 풀려고 끙끙거리며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 되니 더 힘이 빠지고 괴롭다. 돌아보면, 작년 봄에 아버지를 잃은 이후로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아졌고, 몸에 이상도 생겼다. 그리고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 생활도 정리되지 않는 책장처럼 헝클어진 느낌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모든 것이 바로 잡힐까?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실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수신(修身)도 제대로 되지 않는데, 아이를 낳은들 어떻게 가정을 다스릴 수 있을까?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들 어떻게 교회와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몸을 닦는 공부에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아니, 주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도록 더욱 온전하게 나를 드려야겠다. 

'날적이 > 유학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먼지 닦기  (0) 2014.10.06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0) 2014.04.17
매일 걸어야하는 길  (0) 2014.04.12

2014년 9월 '즐거운 독서(Joyful Reading)' 모임을 위한 책소개와 토론 질문.




공부는

영성훈

이다


이원석. 《공부란 무엇인가?: 우리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 서울: 한솔수북, 2014.




 

   정말 좋은 질문은 지식의 확대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회의 변화와 성숙을 이끌어 냅니다. 이 책의 저자 이원석은 “공부란 무엇인가?”가 바로 그런 질문 중의 하나라고 확신하는 듯합니다.


나는 이 질문이 미시적으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하고, 우리가 삶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고 생각한다.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삶을 변혁하고 사회의 미래를 재구성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15)


이렇듯 저자는 공부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개인과 사회, 현재와 과거를 포괄하는 통합적인 차원에서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공부 또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기존의 자기계발서들과는 제목에서부터 확연히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이자 머리말의 제목은 “우리 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공부의 초상이 일그러진 이유는 공부의 목표가 ‘지식을 축적’하여 ‘성공이라는 실리’를 얻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곡된 욕망의 실현을 공부를 통해 주도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실상이다. 우리의 사회적 위계는 우리의 학업적 위계에 연동되어 있다. …… 우리의 현세적 욕망이 공부의 목적이 되고, 공부가 현세적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부를 통해 들여다보는 우리 사회는 이토록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다.(165)


저자에 의하면 참된 공부란 욕망 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수양의 방법입니다. 이원석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를 동아시아와 고대 그리스, 그리고 중세 가톨릭에서의 공부의 개념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파악해 보겠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공부란 무엇인가’(공부의 정의), 2부에서는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공부법)라는 질문들을 각각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제1장 “동아시아의 공부”에서 저자는 ‘공부(工夫)’라는 한자어가 ‘쿵푸’와 같은 단어라는 점을 들어 공부란 지적 노동과 몸의 수련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유학에서도 배운 것(學)을 몸에 새기는 것(習)을 ‘학습(學習)’, 곧 공부라고 말합니다. 지식을 담기 위해서 먼저 육체와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앎을 얻게 되면 그것을 삶으로 통합해야 합니다. 이렇듯 동아시아에서의 공부, 특히 유교 전통에서의 공부는 인격을 닦는 실천적 수양입니다.


    다음으로 제2장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 공부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철학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philosophia’는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며, 철학자란 무지와 앎 사이에서 지혜를 사랑하여 추구하는 사람, 나아가 진실/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실천적인 용기(parrésia)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지식의 훈련 이상의 ‘영성 수련(spiritual practice)’이었다는 내용입니다(69).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학당들은 ‘생활 방식(a way of life)’으로서의 철학을 가르치는 학습, 생활 공동체, 즉 일종의 수도원이었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합니다. 


    이어지는 제3장에서는 중세 가톨릭 수도원에서의 공부가 다루어집니다. 저자는 수도원에서 성서나 교부들의 글을 읽고 묵상하는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예로 들며, 중세 수도원의 공부는 자아의 변혁, 특히 욕망의 변혁을 목표로 하였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실천도 렉티오 디비나의 회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간략하게 종합하면, 1부에서 저자가 고전적인 공부 개념에 근거해서 말하는 참된 공부란 진리를 깨우치는 것을 통해 자아의 변혁과 실천을 추구하는 인격 수양이자 영성 훈련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참된 공부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제 2부로 넘어 가겠습니다.


    먼저 제4장에서 저자는 독서, 특히 낭독의 반복을 통해 고전의 핵심 문장들을 암송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낭독과 암송이 우리의 “요동하는 정념을 진정시켜” 주고, 우리를 “거대한 전통의 질서와 공동체 안에” 자리매김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113).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는 글을 인용하면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사유는 묵상을 통해서 자신 안에서 숙성되어야 하며, 나아가 그 결과로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6장에서 제안하는 공부법은 ‘대화’입니다. 이 때의 대화란 정보나 감정 전달 이상입니다. ‘나와 너’ 사이, 곧 서로를 향해 열려진 주체와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지평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깊은 차원의 대화입니다. 2부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고, 이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 보겠습니다.


    “왜곡된 욕망 너머 공부의 길”이라는 제목이 달린 맺음말에서 저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바르게 공부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찬란한 빛을 되찾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밝은 광명을 비추어 줄 것이다. 단언컨대 자기 자신과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공부의 의미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회복은 바로 욕망의 변혁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를 통해 행복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행복은 공부 순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행복의 목표를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내면의 자유와 인격적 성숙으로 재설정하고, 공부의 목적을 우리의 마음을 세우고 나아가 몸을 바로 잡는 데 둔다면, 이는 결국 고전적 공부 방식의 통찰로 돌아가자는 촉구에 다름 아니다.(170-71)


이 책의 저자 이원석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희망의 길은 공부에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바르게 공부하는 데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공부의 바른 의미를 되찾고 실천할 때,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말한 “나만의 북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립니다(173). “이 사회가 짜놓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180).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181). 나아가 이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구성하는 사회가 진정 자유롭고 밝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제2부에서 저자가 말한 공부법들, 곧 독서(낭독)와 암송, 사유와 묵상, 대화들이 모두 영성 훈련인 렉티오 디비나에서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렉티오 디비나는 (소리 내어) 읽기와 묵상, 그리고 관조(또는 관상, contemplation)가 모두 유기적으로 결합된 훈련입니다. 또한 수도원에서 렉티오 디비나는 흔히 지도자와의 대화, 곧 영성 지도(spiritual direction)와 병행됩니다. 그리고 바른 공부의 결과인 ‘자유’ 역시 영성 훈련의 결과입니다. 특히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가 고안한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은 렉티오 디비나에 바탕한 ‘복음관상’을 주요한 훈련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영신수련의 열매는 ‘영적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매우 요약해서 말한다면, ‘공부란 영성훈련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듯합니다.


    동서양과 고금을 걸친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저자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확실히 이 책은 그가 공부의 방법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인용한 문구처럼 “다문다독다상량(多聞多讀多商量)”의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133). 그래서 작가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많은 지식으로 인해,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내용들로 ‘빠져서’ 결론으로 돌아서 간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 제6장에서는 우정과 사랑에 대한 내용은 줄이거나 보론으로 다루고, 보론에 있는 “위대한 스승과 교육으로서의 대화”를 본론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었으면 주제가 더 강화되고 글의 일관성도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하는 이들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부의 의미와 방법을 어떻게 적용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이 독자의 숙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아쉬운 점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 공부


1. 그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공부의 의미와 방법과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의 의미와 방법을 비교해 봅시다. 어떤 비슷한 점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이 책을 읽은 후에 공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2. 저자는 동아시아의 전통과 기독교 수도원 전통에서 공부는 몸의 훈련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 몸을 사용하여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공부가 몸의 훈련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3. 저자가 제안하는 공부법을 우리의 실제 공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수학이나 과학 등을 공부할 때에도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4. 실리를 추구하는 공부에서 자기 변화를 추구하는 공부로의 ‘방향 전환’이 있기 위해서는 공부의 바른 정의와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런 방향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두 번째 이야기 : 렉티오 디비나


1. 저자는 QT(Quiet Time)를 인스턴트 묵상으로 분류하며, 한 본문을 일주일 동안 묵상하는 형태의 묵상을 제안합니다(127-28). 이에 대한 여러분의 견해는 어떠십니까? 다음의 글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습니다. 정성들인 기도는 관상을 얻게 해주며, 기도 없는 관상의 선물은 드물고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귀고 2세(Guigo II: ?-1188), <관상 생활에 대해 쓴 편지>, 엔조 비앙키 지음, 이연학 옮김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왜관: 분도, 2010), 154-55.




귀고 2세가 쓴 <관상 생활에 대해 쓴 편지(The Letter on the Contemplative Life)>는 우리에게 <수도승의 사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조 큐티(QT)라고 할 수 있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유명한 영성 고전이다. 귀고 2세는 렉시오 디비나를 네 단계, 즉 독서, 묵상, 기도, 관상으로 설명한다. 렉시오 디비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각각의 단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각각의 단계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독서와 묵상이, 묵상과 기도가, 그리고 기도와 관상이 어떻게 체험적으로 흘러가는지를 알면 영성 생활에서 어느 한 요소도 소외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빨리빨리 읽기만 하고 묵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은 읽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묵상은 하지 않고 기도부터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묵상만 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기도를 마음을 다해 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해치우듯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기도의 체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관상의 경험을 자신의 영적 경험에서 아예 배제시켜버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영성 생활에서 이런 병증을 습관화시킨 사람들은 기도에 결코 맛들일 수 없다. 성경을 읽다가 기도로 흘러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훈련의 기본이다. 위에 인용한 귀고 2세의 말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영성 훈련에 병증은 없는지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 이강학

출처 :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spirituality.co.kr/318



2. 아래의 ‘오늘의 말씀’으로 렉티오 디비나를 함께 실습해 봅시다.

Lectio (읽기)

Meditatio (묵상)

Oratio (기도)

Contemplatio (관상/관조)






오늘의 말씀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사도행전 17:10-13 / 개역개정)

2014. 9. 5. 금.


아버지를 여의고 맞는 두 번째 추석이다. 살아계실 때 아버지는 명절이면 어김없이 온 식구를 이끌고 고향을 찾으셨다. 어린 시절 우리 식구는 명절이면 비둘기호나 통일호를 타고 몇 시간을 달린 후에, 다시 안내원이 '출발'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차벽을 두드리는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를 타고 비포장 시골 길을 한참을 달렸다. 그래야 아버지의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 내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께서 친구분으로부터 폐차 직전의 중고차 '포니'를 얻으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고행길'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명절이면 고집스럽게 고향으로 찾아가서, 우리 형제를 데리고 동네 어르신들 댁을 찾아 다니며 인사를 시키시곤 했다. 이제는 시골의 그 어르신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추석을 앞두고 이 글 속에 이분들을 모셔다 놓고 잠깐 회상에 잠긴다. 언젠가 우리 모두의 본향인 그 나라에서 오손도손 모일 것을 희망하며 말이다.

저희 가정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자료를 공유합니다. 추도 예식을 겸한 가정예배용으로 만들었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파일을 내려 받아 각 가정의 필요에 맞게 수정하여 사용하십시오.

추석 가정 예배 자료 2.hwp       추석 가정 예배 자료 2.pdf



한가위 추도 예식



1. 예배로의 부름 – 로마서 14장 17절 / 인도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사랑의 하나님! 한가위를 맞이하여 하나님 품에 있는 고인을 추모하며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해주시며, 이 자리에 있는 저희들과 멀리 있는 식구들도 한 마음으로 묶어 주시옵소서. 물질적인 풍요로움 이상의 의와 평강과 기쁨이 저희 맘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모두 함께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않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3. 찬송 –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1, 2절) / 모두 함께


1절.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농사하지 않으며

곡식 모아 곳간 안에 들인 것이 없어도

세상 주관하는 주님 새를 먹여 주시니

너희 먹을 것을 위해 근심할 것 무어냐


2절. 들의 백합화를 보라 길쌈 수고 안 해도

솔로몬의 입은 옷도 이 꽃만 못하였네

아궁 속에 던질 풀도 귀히 입히시거든

사랑하는 자녀들을 입히시지 않으랴


4. 대표기도 – 맡은 이


5. 성경봉독 – 출애굽기 16:2-3, 11-12 / 맡은 이



2-3.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11-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6. 말씀 나눔 – “주님의 식탁에서 먹을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지 약 사십오 일 정도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쯤 되자 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가지고 나온 식량이 거의 동난 듯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악한 말로 원망하였습니다. 이집트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는데, 당신들 때문에 괜히 광야로 나와서 주리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차라리 이집트에서 배불리 먹고 종살이하는 것이 더 나았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단순히 배고픔에서 나오는 투정으로 보기에는 이 원망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방향성과 정체성을 부인하는 심각한 원망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사는 것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집트의 노예’로 사는 훨씬 더 좋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불평은 직접적으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쏟아 놓은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어 주셔서, 그들이 그토록 소원하던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게 해주셨습니다. (‘만나’는 떡/과자의 재료이고 ‘메추라기’는 꿩과의 새입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사정을 들여다보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동시에 주신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11장에서는 메추라기와 관련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나를 ‘배불리’ 먹고 있는 지 1년 정도가 지나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원망이 싹텄습니다. 그들은 만나만 먹다 보니 기력이 쇠했다며 고기를 달라고 모세에게 아우성쳤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울면서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백성들을 고생시키는 몰인정하고 가혹한 신이라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그들이 하나님께 겸손히 ‘간청’한 것이 아니라 악한 말로 ‘원망’하고 ‘불평’한 데에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들의 원망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왕과 주인이사라는 것을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의 신(神)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빌3:19), 곧 탐욕이었습니다. 그들은 탐욕에 지배당하고, 탐욕을 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 중에서도 특히 악한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바랐던 고기가 목구멍을 넘어가기도 전에 징벌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민수기 11:33-34)


여기서 ‘기브롯 핫다아’란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탐욕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도전하고 원망하던 이들은 스스로를 탐욕의 무덤에 파묻고 말았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나 청소년들에게 꿈이나 장래희망을 물으면 그저 ‘돈 많이 버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 올 때가 많다고 합니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나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 없이, 그저 많은 돈을 가지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비단 아이들만 그럴까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많은 어른들도 ‘배불리 먹고 사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사랑’, ‘정의’, ‘평화’, ‘안전’보다 ‘경제’가 더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경기가 위축되고 장사가 예전과 같이 않으니 이제 그만 ‘세월호’는 잊고 경기 회복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도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부정과 불법을 서슴지 않는 이들도 너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고기를 달라고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당장 굶어 죽을 형편이 아닌데도, 기름진 음식을 마음껏 배불리 먹고 싶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헌신짝처럼 내던졌던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탐욕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한가위는 앞에 즐겨 붙는 수식어는 ‘풍성한’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물론 추수한 것이 많아서 명절 식탁이 풍성하다면 정말 감사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풍성한 한가위’를 맞는 것이 우리 한 해의, 나아가 인생의 최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묘지에 있는 무덤과 유골함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배부르게 먹어도 결국 우리의 육체는 재가 되거나 썩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기 호남의 성자라고 불리우던 이세종 선생님은 음식을 배불리 잘 먹는 것은 화장실에 한 번 더 가게 할 뿐이므로, 썩을 음식으로 영혼을 썩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한 신학생 시절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학비에 이같이 묶여서 어려움을 당하고, 집안에 아버지와 아내와 자식이 굶주려도, 하나님의 진리를 어기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살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잘 먹고 잘 입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초인 하나님의 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 한가위를 맞으면서, 고인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추구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대접받기보다 섬기고자 한다면, 그래서 주님을 본받아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주님 나라에서, 주님의 상에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고귀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눅22:27-30).

 


7. 나눔과 기도 / 모두 함께


한가위와 관련된 고인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서로의 감사와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명절에도 슬픔과 절망과 외로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합시다.



8. 찬송 –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3, 4절) / 모두 함께


3. 너희들은 세상에서 무엇 먹고 마시며

    무슨 옷을 입고 살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는 이방 사람들이 간구하는 것이요

    너희 하늘 아버지는 너희 쓸 것 아신다


4. 너는 먼저 주의 나라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

    내일 일을 위하여서 아무 염려 말지니

    내일 염려하지 말라 오늘 고생 족하다



9. 주기도 / 모두 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설교문 > 가정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날 추도 예식 자료 2  (0) 2015.02.18
추도 예식 자료 3  (0) 2014.05.19
설날 추도 예식 자료 1  (0) 2014.01.30



로즈가든에 올라 베이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을 보거나 사진으로 담을 때,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나무들이 항상 눈에 거슬렸다. 저 큰 나무 몇 그루만 없어도 훨씬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며 아쉬워하곤 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면 나무들을 피해서 구도를 잡느라 애를 썼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이 나무들을 피사체로 삼고 싶어서 사진의 프레임 속에 넣어 보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풍경이 잡혔다. 그들이 장애물이 아니라, 그들을 알아 보지 못하는 내 눈 속에 장애물이 있었던 것이다. 하늘을 덮고 있던 짙은 회색 구름이 어느 순간 밝은 푸른 빛을 띠더니, 이내 짙은 남색으로 바뀌며 베이가 어둠에 잠겼다. 장엄한 신비로 가득찬 거룩한 일몰이었다.


2014. 9. 3. 수.

'날적이 > 그림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도처럼 어깨를 결은  (0) 2014.10.14
노을 비타민  (0) 2014.08.24
아내 부재 연습  (1) 2014.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