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때 교회에서 쓸 수 있는 영성 수련 프로그램 하나 잘 만들어 와~.”

 

유학 시절 잠시 귀국하였을 때 만난 신대원 동기 형은 내게 밥을 사주며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그 말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형의 애정 어린 조언은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그 말이 잊혀지지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당시 내가 공부하고 있던 박사 과정 프로그램은 기독교 영성학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학문적 훈련을 하는 과정이어서 구체적인 영성 수련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말에 웃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영성 수련은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프로그램의 작동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성이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영성 수련()’라는 용어도 한국 교회 안에서 매우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제목은 영성 수련()’인데 실제 내용은, 간단히 경건회를 드린 후 세미나나 야유회, 레크리에이션 등의 다른 활동들로 대부분의 시간을 채우는 경우도 많다. 또는 참가자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한 이벤트성이 짙은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참가자들 모르게 가족들로부터 영상 편지나 손 편지를 받아서 보여 주거나, 아름다운 장식들과 수많은 초로 만든 하트 속에 서게 하거나, 관을 준비해서 관 속에 들어가 누워 죽음의 상황을 경험해 보게 하는 식이다. 그래서 이런 수련회는 비밀 유지가 관건이다. 내용이 알려지게 되면 김이 새어버려감동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각종 인위적인 기술들영업 비밀들로 진행되는 영성 수련회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나 일시적인 감동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그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흔히 기도는 능동적 기도수동적 기도가 있다고 말한다. 능동적 기도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 추론, 상상 등과 같은 이성적 기능을 사용해서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이다. 언어를 사용하여 드리는 일반적인 청원기도나 말씀묵상기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수동적 기도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노력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순전한 은혜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추구하는 기도이다. 보통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능동성과 수동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기도가 깊어질수록 능동성이 줄어들고 수동성이 늘어난다.

 

비슷하게 영성 수련에도 이러한 능동성과 수동성이 존재한다. 영성 수련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단연 기도이다. 강의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는 하나님에 대해 들음으로써 간접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지만, 기도를 통해서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 수련 중의 강의는 기도를 안내하고, 돕기 위해서 제공된다. 또한, 소그룹 나눔이나 일대일 영성 지도 역시 수련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기도 체험을 잘 분별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갖기 위해 실시한다.

 

그래서 필자가 섬기는 영락수련원에서 진행하는 영성 수련은 하루 세 번의 기도회를 그 기본 골격으로 한다. 강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수련을 시작할 때 기도에 대한 강의를 단 한 번만 하는데, 주로 말씀으로 기도를 드리는 방법인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복음서 묵상’(Gospel Contemplation)을 소개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아침과 점심과 저녁에는 모든 수련자들이 함께 모여 인도자의 안내에 따라 기도하고, 그 사이에는 각자가 정해진 말씀을 읽고 개인적으로 기도한다. 그렇게 하면, 하루에 다섯 차례 이상 기도하게 되는데, 기도가 계속될수록 하나님과의 만남도 점점 깊어진다. 또한, 기도의 연장으로서 단순한 노동을 하기도 하고, 여백의 시간에는 자연 묵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영성 지도자를 만나 기도 체험을 이야기하고 지도를 받는데, 이 시간을 통해서 수련자는 영성 지도자와 함께 자신의 지난 기도를 되돌아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고 누리게 되며, 다음 기도를 위한 실제적인 안내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성 수련에서는 영성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영성 지도자는 수련자들에게 적절한 성서 본문을 선택하고, 그 본문으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잘 안내하며, 기도를 한 후에는 수련자들을 만나 기도 체험을 듣고, 그들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일어나고 관계가 더욱 발전하도록 적절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영성 지도는 성경 지식이 많거나, 자신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두 가지도 필요하지만, 영성 지도자는 수련자의 기도 체험을 다루어야 하는 만큼 기독교 영성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영성 지도 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소개한 영성 수련의 요소들, 곧 기도회와 개인 기도, 그리고 기도를 돕기 위한 강의와 영성 지도, 또한 기도의 연장으로서의 노동과 자연 묵상 등의 프로그램들과 영성지도자라는 인적 요소는 수련자들이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것을 돕기 위한 요소일 뿐이다. 수련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이러한 활동들을 하는 것은 능동적인 노력이지만 기도가 깊어질수록 점점 자신의 노력들을 넘어서는 수동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난 호에서도 테네브레를 소개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것은 인간의 능동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산출되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주체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 수련을 기획하고 진행할 때는 인간적인 기술과 방법으로 고안한 프로그램들이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앞서지 않도록 절제할 필요가 있다. 참가자들이 은혜받은 느낌을 갖게 하려는 조급함이나 강박으로 인해 사람의 감정을 손쉽게 움직이려는 이벤트적인 요소는 지양하는 것이 좋다. 그것보다는 성령께서 수련자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세밀하게 활동하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수련 전반에 걸쳐 침묵의 분위를 조성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영락수련원의 영성 수련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기도회나 예배 때 찬양을 하거나, 영성 지도자와 만나 대화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수련자들은 수련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침묵 가운데 지낸다. 식사도 침묵 가운데 홀로 하고, 잠도 독방에서 고독 가운데 혼자 잔다. 휴대폰도 꺼두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한다.

 

그러므로 영성 수련은 원료를 투입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적인 공정(工程)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개방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면에서 행하시는 활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받아들임은 수련을 마무리짓는 예배의 성찬식을 통해서 정점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고 명령하신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라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받아서 먹고 마심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그리고 함께 수련에 참여한 형제자매들과의 하나됨을 체험하는 신비의 통로이다.

 

이런 점에서 영성 수련에서 이러저러한 프로그램들은 공연을 위해 준비된 무대에 불과하다. 영성 지도자는 공연을 돕는 스태프일 뿐이다. 그 자리에 임하셔서 직접 춤을 추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간절히 열망하는 영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손을 붙잡고 함께 춤을 추신다. 그러면 영혼은 그 손에 이끌려 함께 춤을 출 뿐이다. 그것은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영혼이 함께 춤추는 혼인 잔치이자, 하나님 안에서 모든 창조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는 우주적인 춤이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 말한 대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그 춤 한 가운데 있으며, 그 춤은 우리의 핏속에서 고동치고 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잊고, 우리의 끔찍한 엄숙함을 바람에 던져버리고, 그 보편적인 춤(general dance)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여전하다.”[1]

 

 


 

〈월간 문화목회〉48(2024년 6월호), 17-21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1]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Y: New Directions, 1962), 297.

'시와 수필 > 문화목회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숲 벤치  (0) 2024.07.12
테네브레 : 빛나는 암흑  (0) 2024.04.30
소리풍경 2  (0) 2024.04.08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최초로 누린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이다. 창세기에는 아담이 땅 위의 짐승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세기 2:19-20a)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름 짓기이야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역할과 태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동물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서 붙일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한낱 피조물인 아담에게 맡기셨다. 아담이 자발적으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만나는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동물들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다. 그가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말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권유하시지 않으셨을까? 아담, 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겠니?

 

성서학자들은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아담의 이름 짓기의 의미를 그 앞 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명령과 연관시킨다. 하나님은 땅의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신 후에 흡족하게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6-28).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최초로 한 행위는 그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새와 짐승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사람은 창조주로부터 그 동물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는다. 많은 피조물들 가운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살도록 지음받았다는 말과 같다. 아마도 하나님은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너희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이 나를 대리하여 너희를 다스릴 것이란다.

 

그런데 이름을 짓는 것은 단순히 권한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야기(19-20)가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인 것을 애처롭게 여기시고 그에게 배필을 만들어 주신 이야기(18-25) 안에 들어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가 아니라 그 아내와 관계를 맺고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어 살아가도록 뜻하셨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과도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의도일 것이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여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명명식(命名式)’을 눈앞에 그려보면,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아담은 자신에게 온 동물들을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보며, 손으로 어루만지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동물들에게 부여하신 그들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 그렇게 지어준 이름들 하나하나에는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향한 그의 애정이 담겨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 이름들을 부를 때마다 그의 마음에서 애정이 솟아났을 것이라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아담이 그렇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께서도 매우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행복해 하셨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들에게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붙임으로써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전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창조의 동역자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와 동역자로서 이 땅을 사랑과 정성으로 다스릴 사명이 있다.

 

이렇게 동물들의 이름은 아담이 지어 주었지만,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 주셨다. 앞서 인용한 창세기 126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담”(adam)이다. 히브리어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의 이름으로서 고유 명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하는 보통 명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기 이전에, 당신의 마음에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때부터 그 존재를 이미 아담이라고 명명하셨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의 이름을 따라서 아담’(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아담/사람이라는 이름에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딸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시편 8:4-8/새번역)

 

그리고 시인은 이어서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9)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에는 경이에서 솟아나는 창조주를 향한 깊은 경외심과 탐구심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름을 지으셨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을 권한이 없다. 다만, 이렇게 여쭈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32:29a). 또한,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3).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32:29b)라며 그 요청을 거절하시거나, 그저 나는 나다”(3:14)라고 대답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숨기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YHWH)라고 알려주셨다(3:16, 6:2).

 

그리스-로마 종교의 제의에서 사용된 기도문을 살펴 보면, 기도자는 자신이 청하는 신의 이름을 거창한 수식어를 사용하여 부르며, 사실상 그 신을 설득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20:7), 그 이름을 불러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로는 네 글자(YHWH)로 기록하면서도, 입으로는 직접 발음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주님(adonai)’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사실상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소리는 추정할 뿐,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우리에게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하나님을 소유하거나 조종할 수는 없고, 다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께 온전히 소유될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태초부터 시작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사람(아담) 사이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그분께 속한 존재로서 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이다. 이것이 영성 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신다(33:7).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의 근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간혹 경우에 따라 익명성 속에 숨고 싶을 때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아 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하는 욕구가 존재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확인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김춘수 시인은 잘 알려진 「꽃」이라는 시에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노래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사랑으로 불리고 존중받을 때 커다란 행복을 얻는다.

 

 

반대로 이름을 박탈당할 때, 또는 이름이 조롱당할 때 사람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깊은 모멸감과 고통을 겪게 된다. 미국 한인 이민사는 그러한 고통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9031월 하와이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 노동자로 모집되어 간 102명의 한인 이주자들은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렸다. 그들이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했던 식별 카드(identification card)에 적힌 번호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이었다. 농장주들을 그들을 사람이 아니라 생산 수단으로 취급하여 짐승처럼 구타하고 착취하였다.[1] 이러한 비정체성(non-identity)의 경험은 그들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은, 일본 유학을 위한 증서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며, 이름을 박탈당하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시로 남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참회록」, 부분)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박탈당함으로써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받지 못하고 좋은 자녀’, ‘좋은 학생’, ‘좋은 ○○등과 같은 미명으로 타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의 고통은 자신의 참된 이름을 찾을 때, 또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애정을 가지고 불러줄 때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나를 만드신 하나님일 때 우리 삶은 궁극적인 의미를 얻고, 더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참된 이름은 나의 신분증에 기록된 이름 몇 글자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에 새겨진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듣기까지 나의 이름은 비밀로 남아 있다. 그 비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왕상 19:12-13). 그리고 그 이름 속에 담긴 진리를 들은 자만이 자신의 이름을 삶으로 살아 낼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의 감리교 목사이자 작가인 테드 로더(Ted Loder)는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이 시가 자신의 기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침묵 가운데 제 이름을 지어 주소서

 

제가 지어 붙이는

어떤 이름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거룩한 분이시여,

침묵 가운데

제 이름을 지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당신께서 제 안에 두신

진리를 들으며,

당신께서 저를 향해 품으신

사랑을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께서 부르신 대로

당신의 인류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그 사랑을 살아 내게 하소서.[2]

 


[1] 서광운, 『미주한인칠십년사』(서울: 해외교포문제연구소, 1973), 27-30.

[2] Ted Loder, Guerrillas of Grace: Prayers for the Batt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4), 30.

 

「빛과소금」 2024년 6월호 게재글.

'영성공부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기심의 감옥에서 사랑의 사귐으로  (0) 2024.10.01
말씀이 나를 읽는 ‘거룩한 독서’  (0) 2023.06.29
흙과 꽃  (0) 2023.04.08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찬양을 듣고 계신 것을 느꼈어요. 시간이 좀 지났지만, 꼭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살며시 미소를 띠고서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지난 성 목요일에 드린 테네브레를 회상하는 듯 그윽하게 빛나고 있었다.

 

테네브레는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고난주간(성 주간)의 마지막 3(, , ) 중에 드리는 기도회이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용어이지만, 테네브레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늦어도 9세기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니 그 역사가 천 백 년이 훌쩍 넘었다. 원래 테네브레는 성 주간의 마지막 3일 동안 새벽 두세 시와 해뜰참에 드리던 수도원의 기도회(Martins, Lauds)였는데, 후기중세시대 이후부터는 교회에서 주로 오후나 저녁기도로 드려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성 주간의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저녁 중 하루를 택하여 드리기도 한다.

 

지난 2019년에 영락수련원에서 테네브레를 시작하며, ‘어두움’, ‘그림자를 뜻하는 라틴어 테네브레’(Tenebrae)암흑의 예전으로 번역하였다. 그것은 테네브레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관련된 성경 말씀들이 봉독될 때마다 초들을 하나씩 끄다가 마지막에는 암흑 속에서 마치는 예전이기 때문이다. 성서 본문은 시편과 예레미야애가와 서신서 등에서 선택이 되는데, 개혁 교회 전통에서는 예수님의 가상칠언의 말씀이나 마지막 만찬과 수난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 말씀들을 읽는 편이다. 특징적인 점은 예수님께서 숨지신 장면을 읽은 후에는 봉독자가 성경책을 힘껏 덮거나 발로 마룻바닥을 쿵 하고 굴리는 등의 방식으로 큰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소리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을 때 지진이 일어난 것을 상징하는데(27:51),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일 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청각적 효과는 방금 봉독된 말씀에 시공간을 넘어선 현장성을 더해준다.

 

전통적인 형태의 테네브레는 산 모양으로 된 독특한 형태의 촛대에 열다섯 개의 초를 세워놓고 양쪽 끝에서부터 초를 하나씩 끄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의 개수나 배열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지기도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마지막 초가 꺼지면, 담당자가 그 초를 제단이나 커튼 뒤에 숨기거나 아예 예배실 밖으로 옮기는 행위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숨지신 후에 십자가에서 내려지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며 참여자들은 마치 당시 그 장면을 목격한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현재적인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는 성 금요일 예배 때 예수님의 수난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극적인 영상이나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테네브레는 단순히 성서 말씀을 봉독하고, 찬송으로 응답하며, 보조적으로 어둠 속에서 단순한 상징들을 사용하지만 참여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수난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속에서 사건으로 경험하도록 초대한다.

 

영락수련원에서 성 목요일에 테네브레를 드린지 벌써 여섯 해가 되었다. 목요일을 택한 이유는,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본교회에서 기도회가 있기 때문에 비어 있는 목요일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고난주간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날이어서, 영락수련원의 성 목요일 예배는 (1) 말씀의 예전, (2) 성찬의 예전, 그리고 (3) 암흑의 예전(테네브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 중 암흑의 예전은 테네브레의 핵심 개념과 특징들을 살리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우리의 상황에 맞게 구성하여 실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회중 찬송을 중요시한 개신교 전통을 살려 복음서 말씀 봉독 후 함께 부르는 찬송이나 악기 연주를 통해 말씀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원래 테네브레는 대부분의 순서들이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우리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성도들도 봉독자와 연주자로, 그리고 회중 찬송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매년 같은 형식이지만, 봉독되는 말씀과 음악과 예전 장식 등은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다.

 

나는 올해 성 목요일 예배를 준비하며, 나 자신이 수련원의 다른 어떤 사역보다도 이 일에 더욱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도 정말 바쁜 중에도 많은 정성을 들여서 예배를 기획하였고, 봉독과 연주를 맡은 이들도 각각 자신들이 맡은 바를 기도하며 성실히 준비하였다.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나는 이제 준비한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좋은 프로그램이나, 실력 있는 연주자나, 능숙한 봉독자도 실제 예배 가운데 은혜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은 없다.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전한 선물이다. 인간적인 기획과 노력들은 모두 장작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가운데서 장작과 같이 불태워져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올해도 우리가 준비한 장작을 모두 태우셨다. 아니, 우리가 준비한 장작은 고작 한 묶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큰 불을 일으키셨다. 비록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으나, 그 불로 인해서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예배하는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함께 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서로 말로 나눌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앞서 내게 어둠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경험했다고 말씀하신 그 권사님께서 은혜를 나누어 주시기 전에도 그분에게 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초들이 꺼지면, 테네브레도 끝난다. 각자가 어둠 속에 머물다가, 침묵 가운데 돌아간다. 개인적으로 나는 테네브레의 모든 시간들 중에서도 이 시간이 가장 좋다.

 

어둠은 빛의 결여다. 그래서 암흑은 공허이며, 어두움이 깊을수록 공허도 깊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깊은 흑암과 공허 속에서도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1:2). , 하나님은 암흑 속에서도 충만하게 현존하신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공허는 공허보다도 더 깊은 충만함이 된다.

 

그렇게 한동안 완전한 어둠, 완전한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다 보면, 어느새 알 수 없는 평화가 마음속에 깊이 배어든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53:5).


 

〈월간 문화목회〉47(2024년 5월호), 19-23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시와 수필 > 문화목회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도회 초대장  (0) 2024.06.10
소리풍경 2  (0) 2024.04.08
소리풍경  (0) 2024.03.14

 

 

하트를 안 하면 사진이 아니죠

 

파란 눈을 가진 젊은 수사님의 말에 단체사진을 찍던 일행은 크게 웃었다. 그리고 다 함께 ‘손 하트’를 하며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 보았다.

 

영성 순례단과 함께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떼제(Taiz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라 모라다(La Morada)[1]로 가서 우리의 도착을 알렸다. 그곳에서 환영팀으로 봉사하던 젊은이는 예약자 명부를 보더니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불러내었다. 그러자 이내 안쪽에서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나와 내 앞에 섰다.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내가 영어로 “Hello!” 라고 인사하자, 그는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답했다. 

 

장 다니엘(Jean-Daniel). 슬로베니아 출신의 젊은이는 이전에 서울 화곡동에 있는 떼제 수사들의 공동체에서 얼마간 살았다고 했다. 그의 한국어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꼭 필요한 내용을 소통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떼제에서의 소리풍경(soundscape)을 떠올려 보면 기억에 남는 소리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장 다니엘 수사님의 한국말이다.

 

사실 떼제에서 한국말을 들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곳에 한국인 수사님이 한 분 계셨지만 몇 해 전 한국으로 돌아오셔서 지금은 국내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한열 수사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던 차에 뜻밖에도 장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그저 몇 시간 머물다가 떠나가는 방문객들이었지만, 장은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주고, 시간을 내어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한국어로 말이다.

 

떼제에서 들은 한국말 중 우리 순례단에게 가장 놀라운 감동을 주었던 것은 아마도 낮기도 시간에 들은 성서 말씀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몇 가지 이유로 떼제에서 숙박을 하지는 않고 낮기도에만 참석하였다. 모두들 많은 기대를 가지고 기도회에 참석하였는데 생소한 언어들로 부르는 찬양은 곡조는 알아도 따라 부르기가 어려웠고, 그 뜻을 알 수도 없어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말씀 봉독 시간에 한국어가 들려왔다. 떼제에서는 예배나 기도회 중에 성서를 프랑스어, 독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반복해서 봉독하는데, 그날은 한국에서 방문객들이 왔다고 한국어로도 읽은 것이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장 수사님이었다.

 

비록 그의 한국어 발음은 내가 영어를 말할 때처럼 어색했으나 우리 일행 중에는 그 소리에 귀가 열리고,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왔다고 나누시는 분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2:8) 이토록 감격스러운 일인지 예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다. 오순절 날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2:4)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지만, 이곳 떼제의 화해의 교회’(Eglise de la Réconciliation)에서는 손님들에게 환대를 베푸는 그들의 관습을 따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방문객들의 언어로 말씀을 봉독하였다.

 

낮기도가 끝나고, 공동체 내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장 수사님과 미리 약속한 방에 모여 함께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우리에게 떼제 공동체를 간단히 소개해 주었고, 우리의 질문들에도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파란 눈의 수사님과 한국어로 나누는 대화는 따뜻하고 즐거웠으며, 감동과 배움이 있었다. 간담회를 마무리할 무렵 그는 우리에게 떼제 공동체가 처음 시작된 옛 교회’(the old church)로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새 그의 뒤를 따라 마을길을 걸어 오래된 작은 예배당으로 향했다.

 

 

그가 옛 교회라고 부른 곳은 성 막달라 마리아 교회’(Église de Sainte-Marie-Madeleine)라는 이름이 붙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매우 오래된 교회였다. 이 건물은 원래 약 10세기 말에 지어진 교회당을 개축한 것으로 그 터와 벽돌에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에서 배어 나오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순례단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 교회 안으로 들어가 작은 예배당에 고요히 앉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고 오직 작은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오후의 햇볕만이 우리의 침묵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때 장 수사님은 내게 여기서 찬양을 불러도 괜찮아요.” 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 그의 말은 내게 그대들의 언어로 찬양을 불러 보세요.” 라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떼제 찬양을 불렀다.

 

주여, 날 이끄시며, 어두운 길 밝혀 주소서
주여 불안한 맘에 평화 주소서

 

마치 깊은 우물 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찬양 소리가 천장이 높은 예배당을 가득 채우며 울렸다. 이 찬양은 이번 영성 순례를 준비하며, 그리고 순례를 다니며 자주 부르던 곡이었다. 나 또한 여행 가이드도 없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을 인도해 오면서 이 찬양을 얼마나 많이 불렀던가? 반복해서 부르는 찬양 소리는 우리가 앉아 있는 교회 건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울렸고, 그 울림과 함께 마음속의 어둠에도 빛이 스며들었다. 불안이 평안에 서서히 자리를 내어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떼제에서의 경험을 회상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소리풍경은 바로 이 옛 교회에서 불렀던 찬양 소리이다. 20여 명의 각기 다른 성품의 순례단원들이 함께 노래하며 체험한 일치감과 평화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물론 여행이 길어지며 때때로 그것이 흔들릴 때가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지난 호에 소리풍경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면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각각 어떠한 소리풍경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 어떻게 하면 소리풍경이 성도들의 영성을 깊게 하는 교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했는데,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이다. 방문자, 또는 주변부에 있는 이들의 언어가 존중되고 들리는 공동체, 깊은 영성에서 나오는 평화와 일치의 노래가 울리는 교회, 그런 교회를 꿈꾸어 본다.

 


 

〈월간 문화목회〉46(2024년 4월호), 20-24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1] 라 모라다(La Morada)는 떼제 공동체 내의 수사들의 생활 구역 입구에 위치한 건물로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필요를 돕는 곳이다.

'시와 수필 > 문화목회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네브레 : 빛나는 암흑  (0) 2024.04.30
소리풍경  (0) 2024.03.14
그림에서 불어 오는 봄바람  (0) 2024.02.11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제주도를 찾은 것은 단지 그곳이 20년 전 아내와 함께 갔던 신혼여행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주도의 바다, 제주도의 바람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제주도 동북쪽에 자리잡은 한 어촌 마을 펜션에 짐을 풀고 곧바로 해변으로 나갔다. 해질녘이 되니 까페도 일찍 문 닫고, 겨울날 올레길을 걷는 사람도 없었다. 한적한 포구에는 나와 아내와 아이와 바람과 파도와 새들만 있었다.

 

여행은 짧았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남는 것은 사진이라고, 아쉬운 마음에 휴대폰 속에 저장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 보았다. 즐거운 모습이 담긴 사진들 사이에는 숙소 앞 해변에서 촬영한 짧은 동영상도 있었다. 잿빛 구름이 잔뜩 낀 해변에는 파도소리를 압도하는 바람소리가 가득했고, 지구가 만들어 내는 그 소리들과 함께 거센 바람에 밀려 힘겹게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의 울음소리와 방파제를 뛰어 다니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 소리가 섞여 간간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다시 나를 제주 바다로 데려가 주었다.

 

그렇게 잠시 추억 속에 머무는데, 문득 여행 중 어디선가 받았던 기념 엽서가 생각이 났다. ‘사운드 컬러링’(Sound Coloring)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혔 있는 엽서 세트였다. 찾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제주 곳곳의 소리풍경을 녹음하고, 각각의 장소에 서식하는 특징적인 동물들을 그려 두어 사용자가 색연필로 칠할 수 있도록 한 엽서들이다. 엽서에 인쇄된 큐알(QR) 코드를 스캔하니 제주도의 풍경 사진과 함께 그곳에서 녹음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웹사이트로 연결되었다. 비록 이번 여행 중에 내가 직접 가본 곳들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를 듣고 있으면, 사진 속의 풍경이 마음속에 떠오르며 마치 제주도의 구석구석까지 이끌려 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엽서와 풍경 소리를 통해 영어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말은 소리를 뜻하는 ‘sound’와 풍경을 뜻하는 ‘landscape’를 합성한 단어로서 소리로 경험되는 풍경을 의미하는 말이다. 랜드스케이프가 확실히 시각을 통해서 경험되는 경치라면, 사운드스케이프는 소리를 통해서 경험되는 풍경이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소리풍경’으로 번역된다. ‘아, 이런 말도 있구나!’ 소리풍경이라는 개념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말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곱씹는데, 나의 의식은 어느새 작년 영성 순례 때 다녀온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가의 몽생미쉘 수도원으로 가 있었다. ‘몽생미쉘’(Mont-Saint-Michel)은 문자적으로 ‘성 미가엘의 산’이라는 뜻으로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이다. 이곳에 709년 생 오베르(Saint Aubert) 주교가 꿈에 천사장 미가엘의 지시를 받아 예배당을 세웠고, 그것이 11세기에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으로 발전되었다고 전해진다. 작은 섬 위에 세워진 웅장한 중세의 건축물과 조수간만의 차가 큰 노르망디 해안의 자연환경이 매우 아름답게 조화되어서 ‘서구의 경이’(Wonder of the West)라고 불리는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고, 매 년 수백 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사실 수도원들을 순회하는 영성 순례를 준비하며 몽생미쉘을 여정에 꼭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이곳은 근대 이후에는 수도원이 아니라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또 현재는 너무 관광지화되어서 수도원 본래의 맛을 느끼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을 다녀오신 한 영성학 교수님께서 꼭 가보라고 권면해 주셔서 먼 길을 달려 갔는데, 함께 간 거의 모든 분들이 정말 이곳에 오기 잘했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잊지 못할 추억이 남는 곳이 되었다. 많은 여행 안내 자료에 소개된 것처럼 건축물과 환경이 정말 아름답기도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몽생미쉘에서 체험한 경이(wonder)의 절정은 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의 회랑(回廊)에 있을 때 찾아왔다.

 

회랑(cloister)은 건축물의 주요 부분을 둘러싸거나 연결하는 지붕이 있는 복도로서, 일반적으로 아치를 사용한 사각형의 회랑은 수도원 건축물을 특징짓는 공간이기도 하다. 몽생미셸 수도원 성당의 북쪽 날개 부분(transept) 바깥에는 사각형의 회랑이 자리잡고 있는데, 한쪽 면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어서 아치 너머로 보이는 바다 조망이 매우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이 그곳에 들어 섰을 때에는 이미 해질녘이었고, 중년의 한 여성이 청소년으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프랑스어로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일행의 목소리가 방해가 된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떠나갔다.

 

그것을 보고 나는 우리 순례단원들에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침묵의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회랑의 한쪽 모퉁이 벽으로 붙어 일렬로 앉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으니 주위의 소리들이 마음에 들리기 시작했다. 지붕과 정원 바닥에 떨어지는 차분한 빗소리와 마음을 깨우는 바닷바람 소리, 그리고 회랑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정겨운 발자국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다를 향하여 난 아치의 빈 공간에서는 해질녘의 하늘이 아련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침묵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소리들과 풍경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심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린 잘 알 수 있었다.

 

마침 그때의 장면을 담아 둔 영상이 있어서 찾아 보았더니 그 침묵의 시간이 다시 경험되며 마음이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차 오른다. 이렇게 소리풍경은(soundscape)은 시각적인 풍경(landscape)과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그 시간과 공간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한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어떤 세계를 추억이나 기대 속에서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소리풍경이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다녀온 여행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지금 내가 그 한 부분에 몸담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한 현재적인 고민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각각 어떠한 소리풍경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이들은 강단에서 전해는 메시지의 내용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어떠한 소리풍경을 그 마음에 담아갈까? 그리고 그 소리풍경에 대한 기억과 울림들이 그들이 엿새 동안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칠까? 어떻게 하면 소리풍경이 성도들의 영성을 깊게 하는 교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여행을 다녀온 사진과 영상을 보다가 괜히 엉뚱한 고민만 깊어진다.

 

 


 

〈월간 문화목회〉45(2024년 3월호), 19-23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시와 수필 > 문화목회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리풍경 2  (0) 2024.04.08
그림에서 불어 오는 봄바람  (0) 2024.02.11
오락은 영성의 즐거운 열매입니다  (0) 2024.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