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새벽이다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련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쪽으로 훤-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 윤동주, 별똥 떨어진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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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말, 윤동주 시인은 별똥 떨어진 데라는 수필에서, 자신과 우리 민족이 처해 있던 암담한 현실을 이라는 이미지로 묘사하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칠흑 같이 매우 어둡고 깊은 밤이었습니다.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 보다.”는 그의 말처럼,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였던 19171230일에 태어나, 일제가 지배하던 만주와 한반도와 일본에서 약 만 272개월을 살다가,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216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옥사하였습니다.

윤동주와 당시 한민족이 살았던 시대가 더욱 암울했던 이유는 그 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수필에서 닭이 홰를 치면서 울어 새벽이 동터온다 하여도 이 마을, 곧 조선은 여전히 암담할 뿐이어서 한밤의 어둠 속에서 깜박깜박 졸며 다닥다닥 나란히 한 초가들의 아름다운 풍경도 실은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일 뿐이라며 슬퍼합니다. 진정한 새벽, 참된 아침은 조국이 광복될 때에야 오게 되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새벽, 예수님을 잃은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새벽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의 고백처럼 그들은 여전히 캄캄한 밤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 정오에 온 땅을 덮은 어둠이(15:33) 제자들의 마음까지 완전히 덮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 시간 후 세상이 다시 밝아지고, 또 그날 밤이 지난 후 여느 때처럼 토요일 새벽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혼란과 절망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과 같은 안식일이 지나고 난 후, 다음 날 새벽 몇 명의 여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24:1)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여인들은 아직 어두울 때에”(20:1), 곧 새벽이 채 오지 않은 밤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그녀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찾고 기대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 곧 죽은 몸이었는데,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빈 무덤이었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곳에 있던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도 무덤 곁에 남아 슬퍼하며 울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 속에 있던 그녀는 자신 앞에 나타난 주님이 그저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알려 주세요, 그러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라고 애절하게 부탁했지요. 그러나 그녀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그토록 사모하고 찾던 주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랍오니(선생님)”라고 주님을 불렀습니다(20:14-16). 마침내 그녀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깨어지고, 새벽이 힘차게 동텄습니다.

새벽을 뜻하는 영어 단어 중에 ‘daybreak’(데이브레이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전적으로 태양빛이 처음 나타나는 때를 뜻하는 말로써, ‘’(day)부서지다/부수다’(break)라는 두 단어로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새벽은 말 그대로 낮이 밤을 부수고 갑자기 출현하는 때입니다. 밤이 깊고 깊어져서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때에 갑자기 동쪽에서 태양빛이 나타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면, 밤은 깨어져 버립니다. 굳게 닫힌 밤의 철문을 깨어 부수고 새벽이 갑자기 출현합니다. 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새벽입니다. 단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때가 새벽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한 이에게는 죽음의 밤이 끝나고 낮과 같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점에서 부활은 새벽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간 막달라 마리아가 보고자 했던 것은 죽은 예수의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놀랍게도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었습니다. 깊은 밤 속에 있던 마리아에게 드디어 부활의 새벽이 밝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사고의 기존 틀이 깨어지고,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죽음과 슬픔의 밤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으로 가득 찬 환한 낮에 속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갔던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은 이미 살아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밤 속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숨은 곳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움과 죽음의 밤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주님께서 그곳으로 직접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셨을 때에야 그들도 부활의 새벽을 맞게 되었지요(20:19-21). 이처럼 부활의 새벽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에야 열립니다.

저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단 세 번의 새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무()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던 태초의 새벽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명령하심으로 지금까지 전혀 없던 새로운 세상, 빛과 질서의 새벽이 열렸습니다(1:1-3). 이것이 온 세상의 첫 새벽입니다. 이 첫 번째 새벽은 과거에 이미 완성된 새벽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새벽은 부활의 새벽입니다. 이 새벽은 약 이천 년 전에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미 도래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새벽은 교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경험해야 참으로 맞게 되는 새벽입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만날 때에, 그는 마리아처럼 내가 주를 보았다”(20:18)라고 외치며 비로소 그 새벽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지막은 천국의 새벽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간 뒤, 장차 천국에서 신령한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 눈을 떠서 보게 될 빛의 세계가 바로 이 새벽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날마다 맞는 새벽은 모두 천국의 새벽을 표상합니다. 밤마다 눈을 감고,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은 이 땅에서 죽고, 천국에서 눈을 떠서 완전히 새로운 새벽, 영원한 새벽을 맞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빛나는 새벽별이신 주님을 만나 뵙고, 그분과 하나가 되게 될 것입니다(12:16).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새벽은 이러한 천국의 새벽을 통해 온전히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이 찾아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세상에 죽음의 기운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참으로 깊은 밤입니다. 그러나 새벽을 맞는 방법은 밤을 겪어내는 것밖에 없습니다. 비록 캄캄한 밤이 끝이 없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새벽은 반드시 어둠을 부수고 밝아 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깊은 밤에 태어나서, 깊은 밤을 살았던 윤동주 시인은 시대처럼 올 아침을 밤을 새워 기다렸습니다(쉽게 씨워진 시). 너무나 안타깝게도 비록 그는 그 광복의 아침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그가 기다렸던 아침이 거짓말처럼 힘차게 도래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세상이 어둠으로 덮이고, 우리 삶에도 깊은 밤이 지속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새벽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고야 말 것입니다. 밤을 부수고 힘차게 도래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언젠가 죽을 육체 속에서 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마지막 새벽에는 영원히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주일은 이러한 진리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부활의 새벽은 천국의 새벽을 미리 맛보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손을 잡고 그 새벽을 기다립시다. 마리아처럼 아직 어두울 때에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러 나아갑시다.

-영락교회 〈만남〉(2020년 4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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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시편 144:3-4



바람의 주인되신 주님, 


"사람은 숨과 같고,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습니다." 한껏 들이마셨다가 뜨겁게 내쉬어도 차가운 대기 속에서 곧 식어버리고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한 번의 숨, 이것이 저입니다. 땅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는 지나가는 그림자, 이것이 저의 인생이지요. 자존심을 내세울 것도 없고, 남에게 화낼 것도, 서운해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 그림자에게서 태어난 그림자가 그림자와 만나 그림자를 낳고 살고 있습니다. 그 그림자에 날마다 빛을 비추어 그림자가 차가운 응달이 아니라 다정한 양달이 되게 하시니 이것이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아시고,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에게 마음을 쓰십니까?"


오늘도 그림자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2020. 2. 26.

재의 수요일




Lord, what is a human creature that You should know him

the son of man, that You pay him mind?

The human is like unto breath, 

his days like a passing shadow


- Psalm 1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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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잇는 사람들

 

최근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격리라는 단어를 언론에서 자주 접합니다. 바이러스에 이미 감염된 사람, 또는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폐쇄된 공간에 격리시키는 것은 질병의 확산을 차단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입니다. 그래서 익명의 감염자가 시설에 격리되었다는 소식은 그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안감과 더불어 한편 안도감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홀로 병상에 누워 투병해야 하는 환자 본인과 그를 익명이 아니라 실제 이름으로 알고 있는 가족들은 격리 조치로 인해 매우 큰 심리적 고통을 겪습니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뿐만 아니라, 수 년 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때도 역시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어린 아기나 연로하신 부모님과 헤어져야 하는 경우에는 그 고통이 훨씬 큽니다. 또한 감염자나 그 가족들을 잠재적 보균자로 여기고 마치 전염병을 옮기는 쥐를 바라보듯이 두려움과 혐오의 눈길로 쳐다보는 사회적 시선 또한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격리와 혐오는 전염병이 창궐할 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평소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사회는 격리를 통해서 사회적 건강과 안전을 유지하려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범죄자, 특히 강도나 살인 등 중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도소에 수감하여 사회에서 격리시킵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이 심각한 이들도 격리 병동에 수용하여 치료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러한 격리가 사회적 안전을 위해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조치이기는 하지만, 이 격리가 지나치거나 부당하게 이뤄지면 인권이 상당히 침해되고, 오히려 사회가 전반적으로 더 병들어 갈수도 있습니다. 교도소나 폐쇄 병동에 강제로 수감 또는 수용된 이들은 무대 밖의 존재처럼 보통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그렇게 격리된 이들의 통계를 접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자나 정신질환자가 발생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스스로가 자신을 격리시키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습니다. 일명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6개월 이상 사회적인 관계와 활동을 거부하고 방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족을 제외하고는, 심한 경우에는 가족과도 전혀 소통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기 격리도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적절한 돌봄이나 도움을 받지 못해서 고독사나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또한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할지라도 우리 주변에는 관계가 깨어지거나 끊어져서 외로움 가운데 있는 처량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교도소나 병동에 강제로 격리되는 경우나, 사람들을 피해 스스로를 격리하는 경우 모두 소수의 개인들의 문제로만 여길 수 없는 사회적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이 홀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과 도움이 절실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러한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포로된 자, 갇힌 자,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4:18).

그래서 우리 4여전도회가 남들이 잘 기억하지 않는 격리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자애로운 여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염병으로 격리 병동에 수용된 이들과 그 가족들, 교정 시설에 수감 중인 죄지은 사람들, 폐쇄 병동에 갇힌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고치시고 치료하시도록 기도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스스로를 격리시킨 안타까운 사람들이 4여전도회를 통해서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4여전도회 회원들께서 이 모임을 통해서 서로를 위한 기도 동역자와 영적 동반자를 만나고, 참된 공동체에 소속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락교회 4여전도회가 이 슬픈 격리의 시대에, 갇힌 자를 자유롭게 하고, 끊어진 관계를 잇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임이 될 것입니다.

2020년 2월 영락교회 4여전도회 회보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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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눈을 뜨는 훈련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

 


하나님,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의 것이옵니다.

, 사랑의 하나님,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닮게 하소서.”

 


단순하나, 뜨거운 사랑과 열망으로 가득한 이 기도문은 로렌스 형제의 고백이다. 유명한 영성 고전 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로렌스 형제는 17세기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살았던 평신도 수도자였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도, 권위 있는 성직자도 아니었지만, 그가 남긴 글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명과 도전을 주고 있다. 그러면 로렌스는 누구이며,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어떤 책인가?

 

1. 로렌스 형제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또는 로렌스 수사로 알려진 그의 본명은 니콜라 에르망(Nicolas Herman)이다. 그는 1614년 당시 로랜느(Lorraine) 공국의 영토였던 에리메니(Hériménil)(현재 프랑스 동부지역)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의 이름과 책이 매우 유명한 것에 반해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사후에 이 책을 편집해서 출판한 조셉 드 보포르(Joseph de Beaufort)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전부다.

보포르에 의하면, 니콜라는 경건한 부모 아래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늘 본이 되는 정직한 삶을 살았던 그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그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아들의 교육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고, 오직 복음에 합당한 교훈들만을 골라서 심어주었다.”(140)[각주:1] 이러한 영향 아래 니콜라는 열여덟 살이 되는 해에 겨울의 벌거벗은 나무를 보다가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깨닫고 세상을 온전히 등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 아직은 그를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된 삶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했다.

청년이 된 니콜라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로랜느 공국의 군인으로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30년 전쟁’(1618-1648)은 독일을 무대로 신교와 구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매우 처참한 전쟁이었다. 니콜라는 참전 후 곧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스파이 혐의로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항상 경건한 삶을 살던 그는 담대하고 솔직한 진술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가 21세가 되던 1635년에는 스웨덴과의 랑베르빌러(Rambervillers) 전투에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게 되어 전역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니콜라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세상의 나라를 위한 군인이 아니라 거룩한 직업, 즉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서 전투하는 일에 종사하기를 갈망하게 되었다(141). 그리고 그는 주님께 참되게 헌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만 따라 걷겠다는 굳은 결심과 거룩한 열망으로 잠시 광야에서 은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점차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26세인 1640, 파리에 소재한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평신도 수도자로 입회하였다. 그는 신학 교육을 받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1642년에는 평수도자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로렌스(로랑)”(Laurent de la Résurrection)란 별칭을 얻었다. 그곳에서 그는 수도원의 부엌에서 약 백 여 명의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아 15년 동안 섬겼다. 그러나 다친 다리로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오가는 것이 어려워서 1657년에는 신발 수선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처럼 그는 평생 수도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다가 1691212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는데, 향년 77세였다.

 

2.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어떤 책인가?

원래 로렌스 형제는 책을 저술해서 출판할 의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의 깊은 영성과 인품에 대한 소문을 들은 노아유(Louis Antoine de Noailles)(그는 이후에 추기경이 된다) 수도원장 조셉 드 보포르에게 그를 만나볼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보포르는 166683일과 16671125일 사이에 그와 네 차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고, 로렌스가 쓴 편지들도 필사하였다. 그리고 그 자료들이 노아유의 권유로 로렌스의 사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원래 이 책은 프랑스어로 기록되었는데, 1710년에 출판된 불어판을 끝으로 이후에 영어로 번역되어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게 되었다. 그중에 감리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웨슬리(John Wesley)와 미국의 복음주의 목사이자 저술가인 토저(A. W. Tozer)가 있다.

이 책은 크게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셉 드 보포르가 로렌스와 나누었던 대화들, 로렌스의 편지들, 그가 남긴 잠언들, 보포르가 쓴 로렌스의 생애. 이처럼 이 책은 체계적인 집필 계획을 갖고 쓴 작품이 아니라 자료들을 모아 놓은 것이어서, 중복되는 내용들도 많지만 로렌스 형제의 단순한 삶과 영성을 반복적으로 조명하며 강조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이 책의 한국어 제목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영어 제목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를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 제목만 보면 하나님께서 임재 연습을 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에서 연습이라는 말은 실전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여겨지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하나님 임재 연습은 실제와 분리가 되지 않는다. , 하나님 임재 연습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이다.

책의 제목처럼 이 작품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기를 훈련하라는 것이다. 로렌스 형제에 의하면, “영적인 생활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한 훈련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이다.”(110)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그분이 언제나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124), “순간순간 어떤 식으로든 그분과 막힘이 없이, 그리고 겸손하면서도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뜻한다”(110).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이러한 대화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 가장 한 가운데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126). 꼭 교회나 기도실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모든 장소에서, 모든 순간에 우리 마음을 예배 처소로 만들어 하나님과 대화하는 훈련을 해나갈 수 있다. 구체적으로 영혼의 눈, 곧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하나님을 자주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는 거룩한 습관을 길러야 한다. 처음에는 지속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순전하고 사랑에 찬 시선으로 주님의 임재를 바라볼 수있게 될 것이니(130), 지금 첫 걸음을 내딛으라고 로렌스는 권면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로렌스는 하나님의 임재는 영혼의 생명이요 양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다.”(127)고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로렌스가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믿음이다. 로렌스는 가톨릭 수도회에 속해 있었지만, 마치 오직 믿음으로를 외친 마르틴 루터처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내게 알게 하는 것을 오직 믿음뿐입니다.”(163)라고 고백한다. 그는 회심 초기 자신의 죄가 그대로 있고, 완전히 용서 받기 위해서 자신이 뭔가 해야 할 것처럼 느꼈지만, 믿음으로 메마르고 어둠의 시기를 겪은 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비록 로렌스는 수도원 담장 안에 사는 수도자였지만, 그 속에서도 그는 주방과 신발수선실에서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를 훈련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세속에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보포르에 의하면 로렌스 형제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수단은 매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166)

이처럼 로렌스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행했다. 그것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허드렛일이든 상관없이 그는 프라이팬의 작은 달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었고, 그 일도 끝나 더 할 일이 없으면 주방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삶에 임재하시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떠서 우리의 삶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볼 수는 있다. 그래서 하나님 임재 연습은 눈을 뜨는 훈련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이 책의 도움을 받아 날마다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15:9), 모든 것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락교회 「만남」 2020년 1월호, 34-37.

  1. 괄호 속의 숫자는 책의 페이지 번호. 『하나님의 임재 연습』(두란노, 컬러 양장판, 201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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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가을의 독서

 

 

 

기도의 계절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물론 1년 365일, 사시사철이 모두 기도의 날이지만 특히 가을이 되면,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고 고요히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언젠가 교과서나 엽서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구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 김현승, 〈가을의 기도〉 1연.

 

그렇다면 왜 하필 가을일까요? 이 시에서 말하는 가을은 산이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철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나뭇잎이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다 덧없이 떨어지는 늦가을입니다. 이때를 시인은 침묵 속에 기다리다가, 낙엽이 떨어지면 드디어 언어로 기도하고자 합니다.

 

낙엽이 떨어지면 썩고 흙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새 순으로 돋아나는 자연의 법칙을 시인이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겨울의 문턱에 들서는 늦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는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히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직감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참된 기도란 바로 이러한 인생의 유한함과 고독함이 머릿속과 가슴속에서 동시에 전율처럼 울릴 때 절대자 앞에서 “겸허한 모국어”로 발화됩니다.

 

 

기도의 언어

김현승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태어나 말을 배웠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처음 듣고, 처음 한 말은 조선어였지만, 그가 자라 글을 배우던 시기의 국어(國語)는 일본어였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말인 1937년부터는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1940년부터는 신문과 잡지 등 한글로 된 인쇄물들이 거의 다 강제 폐간당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있어서 “모국어”란 갓난아이와 같은 그의 가장 순수한 존재와 결합된 원초적인 언어, 그리고 자신의 정서와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진실한 언어였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아름답게 꾸며낸 말이 아닌, 또는 형식에 맞춘 공적인 말도 아닌, 그리고 외부로부터 강제로 부여된 말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가장 진실하고 본능적인 언어인 “모국어”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언어는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은 사람이 발화하는 “겸허한 모국어”입니다.

 

그런데 시인에 의하면, 이 “겸허한 모국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언어입니다. 외국어를 습득하듯 자신의 지혜와 노력으로 배우고 연습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시어를 다듬듯 조탁하여 만든 언어도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자, 기도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언어입니다. 이 진정한 기도의 언어를 얻기 위해 시인이 하는 일은 낙엽이 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많은 기도의 말들을 섣불리 쏟아 내거나 중언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겸허하고 진실한 기도의 말을 주실 때까지 침묵 속에 고요히 기다립니다.

 

침묵은 순수하고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입니다. 물론 침묵 가운데 기도할 때 실은 그 침묵 속에서 많은 말과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침묵기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잡념 또는 분심(分心)과 싸우다가 지쳐서 침묵기도는 나와 맞지 않는다며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분심이 일어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은 어지러운 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기도 중에 다른 생각들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생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연결된 감정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원인이 파악이 되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흘려보낸(letting go) 뒤 다시 앞서 샛길로 빠진 지점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마음은 정화되고 침묵 속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기도의 언어로 서서히 채워집니다. 그리고 기도가 매우 깊은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기도의 말이 다름 아닌 말씀(logos)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현존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침묵을 훈련하는 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마틴 레어드의 『침묵수업』(한국 샬렘)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합니다.

 

 

가을의 독서와 기도

가을은 또한 독서의 계절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 식상한 말이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종이책 대신 티브이나 유투브 같은 영상물만 보거나 스마트 폰으로 짧은 글들만 읽는 오늘날에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매우 절박한 호소가 되었습니다. 빠르게 전환되는 화려한 영상을 수동적으로 시청하는 것과는 달리, 독서에는 보다 능동적인 참여가 요구됩니다. 글이 말하는 바를 파악하는 이해력과 글자들이 묘사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상상력은 물론, 말해지지 않은 행간의 의미까지도 탐구하는 추리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책은, 종이와 글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의 세계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 들여 경험하게 합니다.

 

가을에 읽을 만한 좋은 책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도의 좋은 자료입니다. 지난 상반기 ‘기도대각성’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교회에서 펴낸 〈말씀의 샘에서 솟아나는 기도〉의 기획의도가 바로 독자가 말씀을 읽고, 그 독서 경험에서 솟아나는 기도를 드리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책을 아직 다 활용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번 가을에 못다 한 부분을 읽고, 기도를 실천해 나가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미 묵상지를 통해서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를 맛보신 분들에게는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두란노)이라는 책을 권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영성 지도》(Spiritual Direction)인데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비워 두고, 말씀을 읽고, 글을 쓰고, 기도하는 훈련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책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과 하나님과 이웃을 보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혼자 읽는 것도 좋지만, 그룹으로 함께 읽고, 나누고, 훈련하면 더욱 좋습니다. 또한 영락수련원에서는 이번 가을에 ‘거룩한 독서 수련’ 2차(9월 26-28일)와 3차(11월 21-23일)가 예정되어 있으니, 오셔서 말씀으로 기도하며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누리시길 초대합니다.

 

선선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의 배경은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이지만, 지금부터 침묵 가운데 그때를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겸허한 모국어”를, 진실한 기도의 말을, 무엇보다 말씀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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