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 시편 148:1-14

 


별을 만드신 하나님,

시편은 해와 달과 밝은 별들에게 주님을 찬양하라 명령합니다(3-4).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들에게 “있으라” 명령하심으로 그것들이 지음을 받아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5). 또한 주님은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그들에게 건너지 못할 경계를 주셨습니다(6). 그래서 그들은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덕분에 저희는 해나 달이나 다른 별들이 저희가 사는 지구와 부딪혀서 재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에게 궤도를 정해주셨고, 해와 달과 별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그 경계를 건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명령하신 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늘을 보며, 그리고 우주의 사진을 보며 우주와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주님, 저희 인간들은 어떠합니까? 저희들은 해나 달이나 별들처럼 주님께서 놓아두신 자리를 잘 지키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정해두신 경계, 건너지 말아야 할 그 선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그 선을 넘어, 주님께서 먹지 말라 명령하신 나무의 과실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욕심과 죄악 가운데 태어난 저희 인간들은 끊임없이 그 경계들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의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도, 그리고 몇 년 전의 사스, 메르스 바이러스도 모두 하나님께서 넘지 말라 하신 그 선을 넘었기 때문인 것은 아닌지요? 주님께서는 낙타나 박쥐는 부정한 동물이니 먹지 말라 하셨지요(레 11:4, 19). 그런데 좀 더 ‘특이한’ 먹거리를 찾는 이들이, 혀와 배를 만족시킬 ‘특별한’ 음식을 찾는 이들이, 그리고 방법에 상관없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이 그 선을 넘었습니다. 그래서 박쥐에게 있어야 할 바이러스가 그 경계를 넘어 인간들 사이에 퍼진 것은 아닌지요? 물론 이것은 현재 과학적으로 그 근거나 전파경로가 명확히 밝혀진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경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자신의 욕구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저희 인간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세계 질서가 많이 어지러워지고 파괴되어 가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주님,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은 또한 시편을 통해서 식물들은 물론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는 물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십니다(9-13).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교회가 손가락질 받고 있는 이 때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로 모든 자연 세계와 더불어, 온 우주 만물과 더불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형제자매인 이 피조세계와 더불어 그 경계를 지키며 주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더불어 살 수 있도록 구원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2020. 3. 15.




Praise Him, sun and moon, 

praise Him, all you stars of light.

Praise Him, utmost heavens, 

and the waters above the heavens.

Let them praise the Lord's name,

for He commanded, and they were created.

And He made them stand forever, for all time.

He set them a border that could not be crossed.


Psalm 148:3-6 (trans. Robert A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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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ight sky at Death Valley

January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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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연필 2020.04.04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기억을 위해 여기에 댓글로 남겨둔다.
    "동물은 이제 갈 곳이 없다. 인간이 만든 기후변화로 점점 살 곳이 줄고, 인간이 지은 집과 공장과 도로에 밀려 살 곳을 빼앗긴다. 인간은 고기를 위해, 실험을 위해, 심지어 즐거움을 위해 동물을 죽인다. 이 과정에서, 또는 내몰린 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인간의 주거지로 들어오면서 접촉 기회가 늘어난다.
    병원체도 갈 곳이 없다. 인간이 나무를 자르고 토종 동물을 도살할 때마다, 마치 건물을 철거할 때 먼지가 날리는 것처럼, 주변으로 확산된다. 밀려나고 쫓겨난 미생물은 새로운 숙주를 찾든지 멸종해야 한다. 그 앞에 놓인 수십억 인체는 기막힌 서식지다. 이들이 특별히 우리를 표적으로 삼거나 선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존재하고, 너무 주제넘게 침범하는 것이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2838820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 시편 145:14-16

 

왕이신 우리 하나님,


주님은 쓰러지는 모든 자들을 받쳐주시고, 이미 넘어져 구부러진 모든 이들을 일으켜 세우신다.”(14)는 말씀이 정말이십니까? 지금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이미 쓰러져 울부짖고 있습니다. 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들도 곧 넘어지고 말 것이라고 아우성입니다. 주님도 보시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주님께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오늘날 저희들은 성경을 통해 계시된 주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이 현실 세계에서는 별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은 불일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 불일치가 하나님의 무능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실은 저희들의 무지나 믿음 없음이나 조급함 때문이었음을 증명해 주십시오. “모든 눈이 주를 앙망하며 바라보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옵소서. 주님의 손을 펴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기쁨을 주시옵소서.”(15-16)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말입니다. 주님, 지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 왕이시지 않습니까?

 

2020.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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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불면

 

 

자정이 다 되도록 잠이 오지 않아

밤보다 깊은 생각에 들어앉았는데

 

아직 세 돌도 안 된

사랑스런 아들이

겨드랑이를 파고 들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아들아 너도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느냐

 

너는 아빠가 있고

아빠는 네가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니
아빠는 어흥이
넌 슈퍼맨

 

이미 오늘이 다 지나갔으니
이제 그만 자자
걱정에겐 내일이 없단다
내일에는 걱정이 없단다

 

잘 자라 우리 아가
토닥토닥
토오-다-악

 

2020.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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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예배

Dangerous Worship : A Reflection on My Worship 

 


예배는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예배를 통해 혁명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배자들이 그 말씀의 응답하여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혁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한 일이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혁명적이다. 인간의 허위와 악을 폭로하고 심령을 찔러 쪼개는 예리한 검이기 때문이다(4:12). 그리고 그 말씀에 제대로 응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고자 분투하는 이들의 삶이란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11:12). 급진적인 복음을 전파하고, 몸소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던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란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타적인 사랑과 정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그래서 세상을 돈과 권력과 쾌락과 거짓의 나라로 만들려는 악한 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참으로 위험한 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한국 교회의 예배가 다른 의미에서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전염병이 지역 사회로 확산되는 장이 된다는 것이다. 은혜의 자리, 치유의 자리가 아니라 감염의 자리라는 말이다. 교회의 예배가 성도들뿐만 아니라, 나아가 교회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도 감염시키는 위험한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빈번하게 장례식장, 결혼식장에도 가야하는 목회자들은 복음의 전파자나 치유자가 아니라 바이러스의 전파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매우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많은 교회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온라인 생중계로 예배를 드리던 지난 31일 아침, 이사야 1장 말씀이 생각나 찾아 읽었다.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이 정신없이 널려 있는 제물은 다 무엇이냐?

번제물, 숫양, 포동포동한 송아지들,

나는 이미 질리도록 먹었다.

황소, 어린양, 염소들의 피도 지겹다.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짓들이냐?

누가 내 앞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 짓 저 짓 벌이며

예배장소에서 이렇듯 소란을 피우라고 가르치더냐?

 

예배 시늉 놀이, 이제 그만 집어치워라.

같잖은 경건 놀음, 더 이상 참아 줄 수가 없다.

달마다 열리는 회합,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 갖가지 특별 모임,

모임, 모임, 모임, 더는 못 참겠다!

이런저런 목적의 집회들, 나는 싫다!

정말 신물이 난다!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경건, 경건, 경건을 떠벌이는 너희가 지겹다.

이제 너희가 기도 쇼를 벌여도,

나는 외면할 것이다.

아무리 오래, 아무리 크게, 아무리 자주 기도해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너희가 사람을 찢어 발겼기 때문이다. 너희 손에 피가 흥건하다.

집에 가서 씻어라. 너희 행실을 씻어라.

너희 삶에서 악행을 깨끗이 씻어 내어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하여라.

바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말하여라.

선한 일을 배워 행하여라.

정의를 위해 일하여라.

낙오자들을 도와주어라.

집 없는 이들을 대변해 주어라.

힘없는 자들을 변호해 주어라.”

 

    - 이사야 1:11-20(메시지 예언서, 유진 피터슨, 이종태 역)

 

놀랍게도 하나님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드리던 예배에 전혀 미련이 없으셨다. 오히려 예배에 신물이 나셨고,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 때문에 매우 괴로워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들에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실까?

 

수 년 전, 유학을 다녀와서 특별히 소속된 교회가 없을 때에 주일이면 여러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관점에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이 별로 없었다. 물론 나처럼 목사이면서, 유학까지 가서 공부를 오랫동안 했으며, 성격까지 까탈스러운 청중의 귀를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정말 설교자의 깊은 말씀 묵상과 주해(exegesis)에서 나온 설교가 아니라 자기 해석(eisegesis)에서 나온, 곧 자신의 경험과 관점으로 성경 본문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 설교들이 넘쳐났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하는 건지, 찬양을 인도하는 건지, 아니 쇼를 하는 건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 기독교 TV 채널에서 본 한 대형교회의 예배 장면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당시 그 교회는 여러 가지 이슈로 교계 안팎에서 날카롭게 비판받고 있었는데, 크고 웅장한 예배당에서 담임목사의 인도로 영광의 주님”, “왕 되신 주를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은 마치 세상과 분리된 높은 담장 안의 그들만의 왕국과도 같이 느껴졌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정말 기뻐하셨을까?

 

이 외에도 이후 약 5년 동안 여기저기에서 한국 교회를 다시 만나면서 목격한 장면들은 내게도 매우 상처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설교를 상습적으로 표절하여 목소리에 핏대를 높여 가며 외치는 설교자도 보았고, (내가 볼 땐) 가사와 별 상관없이 아궁이에 부채질하여 불을 지피듯 사람의 감정을 충동하는 2박자의 템포로 빠르게 박수를 유도하는 찬양인도자도 보았고, (역시, 내가 볼 땐) 성령의 인도와는 상관 없이 악기 소리의 볼륨을 한껏 높여서 그저 크게 소리 지르는 기도인도자도 보았다. 그리고 청중들은 그 설교에 울고 웃고 아멘이라고 응답했으며,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노래했고, 목이 쉬도록 외치며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그 찬양과 기도를 어떻게 보셨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가? 설교자로, 예배인도자로, 예배자로 예배와 관련된 일들을 직업적으로 하며 살고 있는 나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실한 예배자인가? 나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간절한 마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예수님 시대에 성전 종교에 종사하던 가야바나 다른 제사장들과 닮은 모습은 없는가? 또한 나는 설교자로 예배인도자로 정말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자신의 죄악을 살피며 강단에 서왔던가? 조금도 아쉬움이나 부끄러움이 없는가? 있다. 아니, 많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으로 슬퍼하는 이들이 많다. 당연히 슬픈 일이다. 너무나도 슬프고, 또 아쉽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슬픈 것은 예배가 영적, 도덕적인 면에서의 위험성을 상실했다는 점이지 않을까? 돈과 힘의 왕국을 견고하게 쌓아가려는 세상의 관점에서 예배가 더 이상 위험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비통하게 여겨야 할 점이지 않을까?

 

지금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으로 인해 쟤네들 때문에라고 신천지를 손가락질하며 탓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나의 예배를, 우리의 예배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어떤 특정 교회나 특정 인물을 비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배자로서의 나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하고, 우리 교회의 예배를 새롭게 해나가는 예배갱신운동이 이 참에 한국교회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위험한 예배가 회복되도록,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한국 사회 곳곳에서 그 말씀에 온전히 응답하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우리 함께 회개하고, 애쓰면 좋겠다. 교회가 이웃 사랑과 공적 책임을 위해 몇 주 동안만 잠정적으로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시고 아예 스스로 교회 문을 닫아 버리시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말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미가 6:6-8

 

2020.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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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새벽이다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련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쪽으로 훤-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 윤동주, 별똥 떨어진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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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말, 윤동주 시인은 별똥 떨어진 데라는 수필에서, 자신과 우리 민족이 처해 있던 암담한 현실을 이라는 이미지로 묘사하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칠흑 같이 매우 어둡고 깊은 밤이었습니다.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 보다.”는 그의 말처럼,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였던 19171230일에 태어나, 일제가 지배하던 만주와 한반도와 일본에서 약 만 272개월을 살다가,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216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옥사하였습니다.

윤동주와 당시 한민족이 살았던 시대가 더욱 암울했던 이유는 그 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수필에서 닭이 홰를 치면서 울어 새벽이 동터온다 하여도 이 마을, 곧 조선은 여전히 암담할 뿐이어서 한밤의 어둠 속에서 깜박깜박 졸며 다닥다닥 나란히 한 초가들의 아름다운 풍경도 실은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일 뿐이라며 슬퍼합니다. 진정한 새벽, 참된 아침은 조국이 광복될 때에야 오게 되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새벽, 예수님을 잃은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새벽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의 고백처럼 그들은 여전히 캄캄한 밤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 정오에 온 땅을 덮은 어둠이(15:33) 제자들의 마음까지 완전히 덮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 시간 후 세상이 다시 밝아지고, 또 그날 밤이 지난 후 여느 때처럼 토요일 새벽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혼란과 절망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과 같은 안식일이 지나고 난 후, 다음 날 새벽 몇 명의 여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24:1)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여인들은 아직 어두울 때에”(20:1), 곧 새벽이 채 오지 않은 밤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그녀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찾고 기대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 곧 죽은 몸이었는데,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빈 무덤이었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곳에 있던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도 무덤 곁에 남아 슬퍼하며 울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 속에 있던 그녀는 자신 앞에 나타난 주님이 그저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알려 주세요, 그러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라고 애절하게 부탁했지요. 그러나 그녀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그토록 사모하고 찾던 주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랍오니(선생님)”라고 주님을 불렀습니다(20:14-16). 마침내 그녀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깨어지고, 새벽이 힘차게 동텄습니다.

새벽을 뜻하는 영어 단어 중에 ‘daybreak’(데이브레이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전적으로 태양빛이 처음 나타나는 때를 뜻하는 말로써, ‘’(day)부서지다/부수다’(break)라는 두 단어로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새벽은 말 그대로 낮이 밤을 부수고 갑자기 출현하는 때입니다. 밤이 깊고 깊어져서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때에 갑자기 동쪽에서 태양빛이 나타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면, 밤은 깨어져 버립니다. 굳게 닫힌 밤의 철문을 깨어 부수고 새벽이 갑자기 출현합니다. 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새벽입니다. 단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때가 새벽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한 이에게는 죽음의 밤이 끝나고 낮과 같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점에서 부활은 새벽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간 막달라 마리아가 보고자 했던 것은 죽은 예수의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놀랍게도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었습니다. 깊은 밤 속에 있던 마리아에게 드디어 부활의 새벽이 밝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사고의 기존 틀이 깨어지고,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죽음과 슬픔의 밤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으로 가득 찬 환한 낮에 속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갔던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은 이미 살아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밤 속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숨은 곳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움과 죽음의 밤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주님께서 그곳으로 직접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셨을 때에야 그들도 부활의 새벽을 맞게 되었지요(20:19-21). 이처럼 부활의 새벽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에야 열립니다.

저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단 세 번의 새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무()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던 태초의 새벽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명령하심으로 지금까지 전혀 없던 새로운 세상, 빛과 질서의 새벽이 열렸습니다(1:1-3). 이것이 온 세상의 첫 새벽입니다. 이 첫 번째 새벽은 과거에 이미 완성된 새벽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새벽은 부활의 새벽입니다. 이 새벽은 약 이천 년 전에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미 도래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새벽은 교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경험해야 참으로 맞게 되는 새벽입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만날 때에, 그는 마리아처럼 내가 주를 보았다”(20:18)라고 외치며 비로소 그 새벽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지막은 천국의 새벽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간 뒤, 장차 천국에서 신령한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 눈을 떠서 보게 될 빛의 세계가 바로 이 새벽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날마다 맞는 새벽은 모두 천국의 새벽을 표상합니다. 밤마다 눈을 감고,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은 이 땅에서 죽고, 천국에서 눈을 떠서 완전히 새로운 새벽, 영원한 새벽을 맞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빛나는 새벽별이신 주님을 만나 뵙고, 그분과 하나가 되게 될 것입니다(12:16).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새벽은 이러한 천국의 새벽을 통해 온전히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이 찾아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세상에 죽음의 기운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참으로 깊은 밤입니다. 그러나 새벽을 맞는 방법은 밤을 겪어내는 것밖에 없습니다. 비록 캄캄한 밤이 끝이 없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새벽은 반드시 어둠을 부수고 밝아 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깊은 밤에 태어나서, 깊은 밤을 살았던 윤동주 시인은 시대처럼 올 아침을 밤을 새워 기다렸습니다(쉽게 씨워진 시). 너무나 안타깝게도 비록 그는 그 광복의 아침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그가 기다렸던 아침이 거짓말처럼 힘차게 도래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세상이 어둠으로 덮이고, 우리 삶에도 깊은 밤이 지속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새벽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고야 말 것입니다. 밤을 부수고 힘차게 도래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언젠가 죽을 육체 속에서 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마지막 새벽에는 영원히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주일은 이러한 진리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부활의 새벽은 천국의 새벽을 미리 맛보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손을 잡고 그 새벽을 기다립시다. 마리아처럼 아직 어두울 때에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러 나아갑시다.

-영락교회 〈만남〉(2020년 4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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