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꽃

 



대략 백 번쯤 된 것 같다. 
이곳 영락동산에 올라온 것이.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영락교회에 부임한 후 지금까지 백여 분의 장례를 치루었다. 그래서 영락동산에 올라가면 묘비에 새겨진 이름들 중 아는 분들이 드문드문 눈에 뜨인다. 주로 몇 년 사이에 장례를 집례하여 이곳에 모셔드린 교구 성도님들이다. 

오늘도 하관예식을 마치고, 천천히 걸어서 묘역을 빠져 나오며 이름들을 살펴본다. 그러다 한 곳에서 발걸음이 멈추었다. 한두 달 전에 장례를 치른 분인데, 아직 비석도 세우지 못하고, 잔디도 입히지 못한 묘에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하얀 장미꽃이 놓여져 있다. 오전 열 시 반. 제법 높게 뜬 해가 흙만 덮여 있는 무덤을 따스하게 덮고, 흙 위에 놓인 하얀 장미들은 햇볕 속에 찬란하게 빛난다. 그것을 보니 입관실에서 뵈었던 고인의 모습과 이별을 슬퍼하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난 2월 22일, 올해의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도 이곳 영락동산에 올라왔었다. 그리고 한 집사님의 하관예식을 집례하며 “흙에 담긴 비밀”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였다.

 


오늘은 교회력에 따르면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의 수요일은 사순절의 첫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부활절 전 40일 동안 예수님의 삶과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첫날이 바로 재의 수요일입니다. 이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또는 ‘성회 수요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재의 수요일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자는 재의 뿌림을 받거나, 이마에 재로 된 십자가 표식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배자들은 “사람아, 기억하라.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금지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범죄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준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도록 운명지워졌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주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인생이 흙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흙은 참 신비한 물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흙 속에 씨앗을 심어 두면,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동물들은 흙에서 자란 식물들과 열매들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흙은 생명을 담는, 또는 생명을 자라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 다시 흙으로 돌아갔을 때에 그 흙을 양분으로 하여 식물이 자랄 수는 있어도 흙이 된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사람이나 기술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앞으로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결코 넘지 못할 한계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읽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 바울 사도는 혈과 육, 곧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썩지 않는 영원한 나라인데, 우리 몸은 나이가 들면 노화하여 쇠약해지고, 죽으면 썩어서 흙이 되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몸 그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여도 그곳에서 우리는 이 유한한 육신으로는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장차 때가 되면, 우리 모두 흙에 속한 몸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몸, 신령한 몸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바울 사도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라고 확신을 가지고 선언합니다. “육의 몸도 있으니 영의 몸도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 그리고 이곳 영락동산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눈을 감을 때에 가진 믿음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고대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미이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 영혼을 담는 몸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또한 흙이 되어 버린 육신을 다시 살리셔서 신령한 몸으로 일으키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한낱 흙에 불과한 사람을 사랑하시어, 직접 흙으로 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몸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덤 속에서 썩어 소멸되지 않으시고 다시 하늘에 속한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들도 흙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얻게 되었습니다. 흙 속에서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자다가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밝히 나타난 비밀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서 ‘비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μυστήριον”(미스테리온)이라는 단어인데, 이 말에는 비밀이라는 뜻 외에도 ‘mystery’, 곧 ‘신비’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서 나타난 이 신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신비입니다.

고인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셨고,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소망 안에서 잠드셨습이다. 지금 우리는 집사님의 육신을 이 차가운 겨울의 땅 속에 묻지만 집사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봄과 같은 천국에서 신령한 몸을 입고 다시 깨어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질병도 고통도, 눈물도 애통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실 것입니다. 오늘 부른, 집사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찬송처럼 천국에서 주님의 “그 빛난 얼굴 뵙고 그 영혼이 기쁨으로 가득 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흙으로 된 육신을 입고 있지만, 고인의 신앙을 따라 흙에 담긴 신비를 마음속에 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남은 인생 여정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함께 걸어갑시다. 아멘.

 

우리 교회에 속한 여러 장소들 중에서도 부활의 소망이 가장 뜨겁게 살아 있는 곳이 이곳 영락동산이 아닐까? 7단지에 모셔져 있는 한경직 목사님은 물론 이곳에 잠들어 있는 모든 성도들은 모두 부활의 소망 가운데 마지막 나팔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에는 부활의 시기에 대한 두 가지 사상이 나온다. 먼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회개하는 한 행악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성도가 죽으면 곧 부활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죽은 자들은 무덤에서 잠자다가 “마지막 나팔에” 일어나 순식간에 신령한 몸을 입고 변화하는 것이라 설명한다(고전 15:51).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기 때문이다(벧후 3:8).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 나라도 그러하다. 아마도 그리스도 안에서 눈을 감는 이들은 부활할 때 ‘오늘’ 다시 눈을 뜨는 것으로 느끼지 않을까? 

‘재의 수요일’로 시작하여 부활절로 마치는 사순의 여정은 우리의 인생을 담고 있다. 우리는 모두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만약 살아 있을 때 주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흙과 재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순절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보다 항상 부활절을 준비하는 날로써 존재한다. 사순절을 보낸 후 이 땅에서 맞는 부활절은 일종의 예행연습이다. 아직 우리는 흙으로 된 육체 속에 살아가지만 부활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맛보고 기대하는 날이 부활절이다. 

교회 전통에서 하얀색은 부활을 상징한다. 영락동산에서 하관을 할 때는 관 위에 하얀 꽃을 살짝 던져 넣고 흙을 덮는다. 그리고 자연장을 할 때에는 골분을 흙 속에 넣고 그 위에 국화를 올려 둔다. 이러한 헌화는 고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 뿐만이 아니라,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부활의 아침에 꽃처럼 다시 피어날 것을 믿고 소망하는 상징적인 행동이다. 

12세기의 영성가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육체는 죽음 가운데 심겨졌고, 부활 안에서 다시 피어났습니다.”고 아름답게 말했다. 주님 안에서 잠들어 흙에 심겨지는 우리 인간의 육신도 그날이 오면 그분 안에서 찬란한 부활의 꽃으로 다시 피어날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이곳 영락동산에도 

이제 봄바람이 분다. 

2023년 3월 13일.

- 영락교회 〈만남〉(2023년 4월호) 게재.

 

After Tenebrae,
there remained only
thick fog, darkness, and silence
in Gethsemane garden of the retreat center.

성 목요일 예배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수련원의 겟세마네 정원에는
짙은 안개와 어둠과 침묵만이 남았다

 


Maundy Thursday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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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화살처럼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를 늦추어 게으르게 보내며 여유를 부려도, 주어진 시간을 늘리기 위해 부지런히 많은 일들을 하며 보내어도 시간은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을 간다. 오늘도 누군가는 세상에 태어나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난다. 사람은 순간을 살고, 시간은 영원을 본다.
시간을 만드신 분, 시간의 주인이신 분 앞에 겸손히 앉아 순간이 영원에 맞닿는 시간을 바라본다.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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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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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묵상하기 | 
 

 

마지막 때를 알리는 징조들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를 때 겪게될 어려움과 주어질 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의 약속과 경고가 마태복음(10:17-20)과 누가복음(12:11-12)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꼭 종말에 일어날 일이라고 한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읽으며 많은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공회나 회당에 넘겨져 심문받고 매를 맞았으며, 총독과 왕 앞에 서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증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공회는 꼭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산헤드린 공의회만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이십 명 남짓의 작은 의회들도 가리킵니다. 주후 70년 이전의 지방 공회들은 그 지역의 장로나 제사장들에 의해 운영되며 지방 법정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중앙에서나 지방에서나 당국자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렇게 권력자들 앞에 끌려가게 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슨 말이든지 성령님께서 주시는 대로 말하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곧,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니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미가서 7장 6절을 암시하면서 가족간에 서로를 죽음으로 넘겨주는 일도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족간의 불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일어나게 될 박해의 현상입니다. 가장 친밀한 관계이며, 위기가 있을 때 피난처가 되어야 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죽음에 넘겨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치루게 될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박해와 고난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면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육체의 죽음을 당하게 될지라도 결국에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말씀을 과도한 자기 열심으로 교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또는 교회로부터 이단과 사이비로 규정된 잘못된 무리들을 따르다가 생기는 가족 간의 갈등이나 사람들의 미움을 합리화시키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이런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내게 있습니까? 혹시 내 안에 일어나는 두려움이나 불안은 없습니까? 주님께 진솔하게 말씀 드리고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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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보기 | 

 

 

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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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 묵상하기 | 
 

 

성전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성전 맞은편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 곳으로, 거리가 가까워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며 쉬시기도 하셨습니다. 감람산으로 가신 주님은 성전을 마주 대한 곳, 아마도 겟세마네 동산이 위치한 감람산 서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첫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주님께 가가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나오며 예언하신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날 것인지, 또한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조용히 여쭈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을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 징조들이 무엇인지 대답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많은 거짓 메시아들이 와서 “내가 그라”, 곧 “내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또한, 곳곳에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것이며,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징조들만 알려주셨을 뿐, 언제 그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정확한 때를 알려주셨으면, 우리가 그 때를 준비하는 데에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아마 오늘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전쟁과 자연 재해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마가복음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후 70년 전후에도 수많은 전쟁과 자연재해가 있었으며, 또한 거짓 메시아들이 많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최초의 독자들도 이 징조들이 ‘바로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 마가복음이 기록된 이후, 이 본문을 읽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 정확한 때를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때가 아직 많이 남았다고 방심하지 않고, 항상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로 깨어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징조들이 나타나도 아직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8절에서 “재난의 시작”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산고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종말이 산고 끝에 이루어지는 출산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산고를 겪고 있으며, 그 고통은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더욱 극심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당부하십니까? 마음 깊은 곳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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