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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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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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를 알리는 징조들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를 때 겪게될 어려움과 주어질 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의 약속과 경고가 마태복음(10:17-20)과 누가복음(12:11-12)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꼭 종말에 일어날 일이라고 한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읽으며 많은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공회나 회당에 넘겨져 심문받고 매를 맞았으며, 총독과 왕 앞에 서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증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공회는 꼭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산헤드린 공의회만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이십 명 남짓의 작은 의회들도 가리킵니다. 주후 70년 이전의 지방 공회들은 그 지역의 장로나 제사장들에 의해 운영되며 지방 법정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중앙에서나 지방에서나 당국자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렇게 권력자들 앞에 끌려가게 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슨 말이든지 성령님께서 주시는 대로 말하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곧,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니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미가서 7장 6절을 암시하면서 가족간에 서로를 죽음으로 넘겨주는 일도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족간의 불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일어나게 될 박해의 현상입니다. 가장 친밀한 관계이며, 위기가 있을 때 피난처가 되어야 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죽음에 넘겨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치루게 될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박해와 고난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면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육체의 죽음을 당하게 될지라도 결국에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말씀을 과도한 자기 열심으로 교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또는 교회로부터 이단과 사이비로 규정된 잘못된 무리들을 따르다가 생기는 가족 간의 갈등이나 사람들의 미움을 합리화시키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이런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내게 있습니까? 혹시 내 안에 일어나는 두려움이나 불안은 없습니까? 주님께 진솔하게 말씀 드리고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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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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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성전 맞은편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 곳으로, 거리가 가까워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며 쉬시기도 하셨습니다. 감람산으로 가신 주님은 성전을 마주 대한 곳, 아마도 겟세마네 동산이 위치한 감람산 서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첫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주님께 가가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나오며 예언하신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날 것인지, 또한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조용히 여쭈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을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 징조들이 무엇인지 대답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많은 거짓 메시아들이 와서 “내가 그라”, 곧 “내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또한, 곳곳에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것이며,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징조들만 알려주셨을 뿐, 언제 그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정확한 때를 알려주셨으면, 우리가 그 때를 준비하는 데에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아마 오늘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전쟁과 자연 재해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마가복음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후 70년 전후에도 수많은 전쟁과 자연재해가 있었으며, 또한 거짓 메시아들이 많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최초의 독자들도 이 징조들이 ‘바로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 마가복음이 기록된 이후, 이 본문을 읽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 정확한 때를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때가 아직 많이 남았다고 방심하지 않고, 항상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로 깨어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징조들이 나타나도 아직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8절에서 “재난의 시작”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산고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종말이 산고 끝에 이루어지는 출산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산고를 겪고 있으며, 그 고통은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더욱 극심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당부하십니까? 마음 깊은 곳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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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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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성전 기득권자들을 비판하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함께 있던 제자들 중 하나가 주님께 성전 건축에 사용된 돌들의 크기와 성전의 규모를 가리키며 감탄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대제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짓기 시작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인 주전 19년에 짓기 시작하여 주님께서 승천하시고도 한참 후인 주후 64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건축에 사용된 많은 돌들이 가로 5.5미터, 세로 11.3미터, 두께 3.7미터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였으며, 건물 규모도 솔로몬 성전의 약 두 배 정도 였다고 합니다. 또한, 전 세계에 있던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보내어 와서, 헤롯 성전은 당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건축물 중 하나였습니다. 어쩌면 당시 성전의 위용에 감탄했던 제자는 그 성전에서 예수님과 함께 다스릴 날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건물의 외양에 마음을 뺏긴 제자에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성전이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며 섬뜩하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주후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완공된 지 약 2년 후인 주후 66년부터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성전 완공으로 민족의식과 자부심이 한껏 고무된 유대인들은 이제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무기를 들고 봉기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폭동이었으며, 로마는 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었고,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그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완공된지 몇 년 되지 않은 그 화려한 성전도 철저히 허물어 버렸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최초 독자들은 예수님의 이 예언을 통해서 자신들의 현실을 돌아보며, 하나님 나라는 크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복음에 순종하는 참된 제자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곳곳에 화려한 교회당들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십니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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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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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예루살렘 성전 입구 바깥쪽에는 여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남녀 모두 그곳에 갈 수 있었지만 여인들은 그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뜰 너머 성전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곳에는 마치 나팔을 위로 향하게 세워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헌금함이 열세 개가 있어서 성전을 찾은 사람들이 그곳에 헌금을 드렸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먼저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은 금액을 드렸는데, 아마도 그들은 값지고 무거운 동전들을 과시하듯이 던져넣었을 것이며, 짤랑거리는 그 소리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난한 과부는 고작 렙돈 두 개를 넣을 뿐이었습니다. ‘렙돈’은 옛 그리스의 화폐 단위인데, 당시 가장 가치가 없고 가벼운 동전이었습니다. 이것을 로마 화폐 단위인 고드란트로 환산하면,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에 해당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화폐로 대충 환산하면 천 원 안팎의 금액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성전 관리들은 과부가 적은 금액의 헌금을 드리는 것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겠지만, 예수님은 그 가난한 여인의 선한 믿음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그들이 가진 것의 일부를 드렸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인 마가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재산을 집어삼키는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한 위선적인 종교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가 드리는 헌금을, 비록 그것이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고 할지라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고, 제자들을 불러서 그 과부를 높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기록하여 널리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에서 그 속에 담긴 주님의 눈빛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통해 다시 살아나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편견없이 따뜻하게 비추어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단지 자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선한 믿음을 주목하여 보시고 높이 평가하신 주님의 그 눈빛이 오늘 나의 눈과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여전히 발견됩니까? 또한 내게는 생활비 전부를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 그 여인의 믿음과 사랑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정직하게 자신을 비추어보고, 주님과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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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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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은 그 명칭처럼 문서를 필사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복음서에 나오는 ‘서기관’은 일반적으로 유대의 율법학자들을 가리킵니다. 율법학자, 또는 율법사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서를 해석하는 학자이자 그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사상과 생활의 근간이 되는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존경을 표했고, 제자들은 그들을 ‘랍비’라 불렀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긴 옷”은 제사장의 옷과 비슷하게 그 끝이 발까지 내려오는 흰색 아마포 옷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별한 옷으로 아마 이 옷을 입고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회당의 높은 자리”는 회당에서 율법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넣어 둔 상자 옆, 높은 곳에 놓아둔 의자였는데 그곳에 앉으면 회중들을 내려다 볼 수도 있고, 또 회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잔치의 윗자리”는 연회를 베푼 주인의 옆자리인데, 그곳에 앉는 사람은 명예로운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시장에서 문안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과 명예를 갈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진정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비윤리적이고 탐욕적이어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매우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였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율법에 명시된 과부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파렴치한 악행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율법을 잘 알았지만, 그대로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그들은 더욱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에게 그러한 서기관들을 조심하고 가까이하지 말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악하고 어리석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에 목을 매면서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갈망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내 안에도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이나 권위를 가지고 겉으로는 경건한 체하면서도, 실제로는 말씀에 대한 지식과 기도라는 행위를 도구 삼아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그들의 위선이  혹시 나 자신이나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그들을 조심하고 멀리하라는 주님의 권면이 내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살펴보고, 거리끼는 점들이 있다면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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