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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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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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성전 기득권자들을 비판하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함께 있던 제자들 중 하나가 주님께 성전 건축에 사용된 돌들의 크기와 성전의 규모를 가리키며 감탄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대제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짓기 시작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인 주전 19년에 짓기 시작하여 주님께서 승천하시고도 한참 후인 주후 64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건축에 사용된 많은 돌들이 가로 5.5미터, 세로 11.3미터, 두께 3.7미터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였으며, 건물 규모도 솔로몬 성전의 약 두 배 정도 였다고 합니다. 또한, 전 세계에 있던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보내어 와서, 헤롯 성전은 당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건축물 중 하나였습니다. 어쩌면 당시 성전의 위용에 감탄했던 제자는 그 성전에서 예수님과 함께 다스릴 날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건물의 외양에 마음을 뺏긴 제자에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성전이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며 섬뜩하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주후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완공된 지 약 2년 후인 주후 66년부터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성전 완공으로 민족의식과 자부심이 한껏 고무된 유대인들은 이제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무기를 들고 봉기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폭동이었으며, 로마는 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었고,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그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완공된지 몇 년 되지 않은 그 화려한 성전도 철저히 허물어 버렸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최초 독자들은 예수님의 이 예언을 통해서 자신들의 현실을 돌아보며, 하나님 나라는 크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복음에 순종하는 참된 제자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곳곳에 화려한 교회당들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십니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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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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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예루살렘 성전 입구 바깥쪽에는 여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남녀 모두 그곳에 갈 수 있었지만 여인들은 그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뜰 너머 성전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곳에는 마치 나팔을 위로 향하게 세워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헌금함이 열세 개가 있어서 성전을 찾은 사람들이 그곳에 헌금을 드렸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먼저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은 금액을 드렸는데, 아마도 그들은 값지고 무거운 동전들을 과시하듯이 던져넣었을 것이며, 짤랑거리는 그 소리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난한 과부는 고작 렙돈 두 개를 넣을 뿐이었습니다. ‘렙돈’은 옛 그리스의 화폐 단위인데, 당시 가장 가치가 없고 가벼운 동전이었습니다. 이것을 로마 화폐 단위인 고드란트로 환산하면,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에 해당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화폐로 대충 환산하면 천 원 안팎의 금액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성전 관리들은 과부가 적은 금액의 헌금을 드리는 것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겠지만, 예수님은 그 가난한 여인의 선한 믿음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그들이 가진 것의 일부를 드렸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인 마가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재산을 집어삼키는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한 위선적인 종교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가 드리는 헌금을, 비록 그것이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고 할지라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고, 제자들을 불러서 그 과부를 높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기록하여 널리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에서 그 속에 담긴 주님의 눈빛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통해 다시 살아나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편견없이 따뜻하게 비추어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단지 자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선한 믿음을 주목하여 보시고 높이 평가하신 주님의 그 눈빛이 오늘 나의 눈과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여전히 발견됩니까? 또한 내게는 생활비 전부를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 그 여인의 믿음과 사랑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정직하게 자신을 비추어보고, 주님과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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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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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은 그 명칭처럼 문서를 필사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복음서에 나오는 ‘서기관’은 일반적으로 유대의 율법학자들을 가리킵니다. 율법학자, 또는 율법사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서를 해석하는 학자이자 그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사상과 생활의 근간이 되는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존경을 표했고, 제자들은 그들을 ‘랍비’라 불렀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긴 옷”은 제사장의 옷과 비슷하게 그 끝이 발까지 내려오는 흰색 아마포 옷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별한 옷으로 아마 이 옷을 입고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회당의 높은 자리”는 회당에서 율법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넣어 둔 상자 옆, 높은 곳에 놓아둔 의자였는데 그곳에 앉으면 회중들을 내려다 볼 수도 있고, 또 회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잔치의 윗자리”는 연회를 베푼 주인의 옆자리인데, 그곳에 앉는 사람은 명예로운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시장에서 문안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과 명예를 갈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진정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비윤리적이고 탐욕적이어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매우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였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율법에 명시된 과부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파렴치한 악행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율법을 잘 알았지만, 그대로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그들은 더욱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에게 그러한 서기관들을 조심하고 가까이하지 말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악하고 어리석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에 목을 매면서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갈망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내 안에도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이나 권위를 가지고 겉으로는 경건한 체하면서도, 실제로는 말씀에 대한 지식과 기도라는 행위를 도구 삼아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그들의 위선이  혹시 나 자신이나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그들을 조심하고 멀리하라는 주님의 권면이 내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살펴보고, 거리끼는 점들이 있다면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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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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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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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주님께서 무리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질문하셨는데, 그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가르치면서 그리스도가 다윗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신구약 중간기부터는 종말론적인 구원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 ‘그리스도’를 번역한 그리스어 ‘메시아’라는 말에는 그런 확장된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자료에 따르면,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은 주전 1세기부터입니다. 그 무렵 기록된 〈솔로몬의 시편〉이라는 유대 문헌을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불의한 통치자들을 파괴하고, 이방인들을 몰아내어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17:21-22). 이처럼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다윗의 자손’, 곧 군사적인 왕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를 때에는 이렇게 침략자들과 싸워 승리하여 나라를 해방시킬 통치자에 대한 기대를 담아 불렀을 것이며,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질문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그 선입견과 잘못된 기대를 깨뜨리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와 다윗의 관련성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리스도는 다윗에게 종속되거나 다윗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다윗이 ‘주’라고 부르는 탁월한 존재임을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주님은 여기서 명확히 밝히시지는 않으셨지만, 이어지는 행적을 통해 당신께서는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정치적 혁명가나 군사적 승리자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죽음을 이기시는 고난의 종이심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의 서기관, 곧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구별되는 탁월한 말씀이었고, 청중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수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교사”라고 기술하였는데, 이것은 오늘 본문에 기록된 청중들의 반응과 통합니다. 앞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분노하며 돌아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달리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즐겁게 듣고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님의 참 제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나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즐거움이 있습니까? 혹시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서기관들처럼 나의 좁은 이해 속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도 참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날마다 나를 찾아오시고,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의 잘못된 기대와 이해로 왜곡된 메시아를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내게 당신을 어떻게 알려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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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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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그 대적자들 사이의 변론을 지켜보다가 주님께서 매우 놀라운 지혜로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그도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질문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 곧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선생들은 종종 그렇게 계명의 경중을 비교하여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명료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신명기 6장 4절과 5절을 인용하시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라는 모세의 명령에 ‘목숨’이라는 단어를 더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되 생명까지 다바쳐 온전히 사랑하여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며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둘째 계명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묶어서 말씀하신 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거나 갈등을 일으키기보다 조화와 통합을 이루어야 함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서기관은 기쁨으로 맞장구쳤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제물을 드리는 그 어떤 제사보다 더 낫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점에서 그는 앞서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했던 사람들, 곧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과 사두개인들과 구별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서 할 말을 찾지 못해 분히 여기며 돌아갔지만, 오늘 본문의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조하며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를 향해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며 칭찬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다”라는 이중부정문은 ‘가까이 있다’는 긍정적인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식과 실천이 동일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 서기관은 자신의 전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 지식을 실천으로 구현해 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아는 그대로 실천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의 안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 서기관 사이에 오간 이 대화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나는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가까이 있습니까? 나는 이미 그 나라 안에서 그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곧 나의 전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있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차이가 없는 동일한 수준에서 행해지고 있습니까? 나는 이웃의 기쁨이나 슬픔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까?
나의 사랑의 완성도는 얼마나 됩니까?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 내가 더 내려놓거나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만약 주님께서 그런 부분이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신다면, 그것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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