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소녀 2

 

 

한 소년이

벚꽃나무 아래 

한 소녀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는다

소녀는 수줍은 듯 서있고

소년은 바람에 흩날리는

소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준다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바람에 나무끼던 꽃잎도

잠시 숨을 참고 멈춘다

 

이번에는 소녀가

소년을 자기 뒤에 세우고

함께 셀카를 찍는다

소녀는 살짝 몸을 뒤로 기울여 

소년에게 기대고

소년은 슬며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소녀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맞댄다

 

꽃잎들도 불그스레해진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들도 모르게

 

벚꽂나무 아래 서면

누구나 소녀와 소년이 된다

청춘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소년과 소녀는 

손을 맞잡고

꽃길을 걸는다

사월의 빛 속으로 행진한다

 

2024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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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小食)

 

새벽부터 휘날리던 싸락눈
이 그친 오후

산속의 진박새들이 바빠졌다
눈 쌓인 나뭇가지 사이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눈 덮인 땅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신 났다
어린아이들처럼

간간이 옆으로 누운 산(山)
처럼 생긴 머리로
산 바닥도 찍어 보고
마른 나뭇잎도 쪼아 대는데
헐벗은 겨울 산에서
도대체 무얼 먹는지

애개,
그 작은 부리로
서너 번 쪼아대더니
금방
파르르 날아간다

고작 그것 먹고
배고파서 어떡하니?

그러자 배부른 나에게
진박새가 하는 말

바보야,
무거우면 날 수 없잖아

하늘에서 찍 떨어진 말이
마음에 쿵 하고 내려 앉았다

아,
그러면
나도
날 수 있을까?
 

2025. 2. 12.
영락수련원에서
 
(memo: 새를 보고 나도 날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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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200억 건축보다 사람을 키워라》(키아츠, 2024)는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김재현 원장님이 쓴 일종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인재 양성’, 또는 ‘다음세대 양성’을 키워드로 저자의 오랜 경험과 지혜를 정리한 글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저자의 인생 이야기가 곳곳에 녹아 있다. 단순한 경험담이 아니라 ‘인재 양성’을 위해 저자가 투신했던 인생 이야기와 그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다음세대들과 그 부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은 “네 번의 장학재단 이야기”, 제2장은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 제3장은 “부모와 교회를 위한 제안”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비록 이 책에는 저자의 어머님 이야기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자전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를 ‘농부신학자’로 정의하고 화천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신학자 김재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러했다. 내가 김재현 원장님을 알아 온 지는 20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유학시절, 김재현 원장님의 미국 출장길에 여러 번 동행하며 기독교와 한국 교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원장님을 잘 알게 되었다. 그분의 꿈과 열정, 성품과 가족 이야기 등을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또는 토막토막의 정보로만 알고 있던 김재현 원장님을 좀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이 김재현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책이 아니라, 그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인재 양성’에 대한 책이므로, 자신이 걸어갈 인생길을 모색하는 청소년과 대학생,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는 부모와 교사, 목회자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저자와의 개인적인 대화와 이 책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의 부제가 “결국 사람이 사람을 키운다”인데, 나 역시 김재현이라는 사람의 영향을 받은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25년의 인재 양성 경험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많이 품고 있는 줄 알았는데, 글을 마칠 즈음에 보니 대단한 것이 별로 없었다. 대신 순간순간 내가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진하게 남는다.”(199). 

 

비록 저자는 ‘대단한 것이 별로 없는 글’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독자들이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인생 이야기와 조언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성찰과 숙고와 토론을 거쳐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가는 자료로 삼는다면, 독자들의 인생도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 줄 만한 가치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해외에서 손님이 한 분 찾아왔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참여하고 있는 큐티 모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같은 한인 교회에 다니고 있는 권사님들과 함께 하는 모임인데, 그곳에는 매시간 깨달음이 넘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 교회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 많은 그 권사님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많은 깨달음으로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하였고, 견디다 못한 목사님이 하루 아침에 사직서를 내고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깨달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였다. 좋은 말들은 가득하나 좋은 행실은 찾아 보기 힘든 것이 문제였다.

 

국어사전에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of Syracuse: BC 287년경BC 212년경)가 목욕을 하려고 욕조에 들어갔다가 유레카!라고 외치며 벌거벗은 채로 뛰쳐나와 거리를 달려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것은 그가 금덩어리가 순금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골똘히 궁리하다가 욕조에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골똘한 생각이나 궁리 뒤에 따라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깨달음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내가 열심히 연구하여 발견하고 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번뜩하고 내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복잡한 생각들과 마음을 뒤흔드는 갖가지 감정들을 비우거나 고요하게 가라 앉혀야 한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깨달음 그 자체를 목표로 삼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된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준비이다.

 

그러한 사례를 사막의 수도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4세기 전후에 사막에 거주하며 기도와 노동과 금욕의 삶을 산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을 사막의 수도자로, 그들의 지도자들을 사막 교부와 교모(desert fathers and mothers)로 부른다. 그 스승들은 남자는 통상 압바(abba, 아버지라는 뜻)로 여자는 암마(amma, 어머니라는 뜻)로 불리었다. 이러한 사막의 수도자들은 3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처음 출현하여, 4세기와 5세기를 거치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로 확산되었는데, 그들을 목격한 아타나시우스가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떠나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사막이 도시가 되었다.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로 사막으로 몰려 들었다.[1] 그들은 사막에 있는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지혜의 말씀을 들려 주기를 청하였다.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의 가르침과 일화를 모은 책인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한 형제가 스케티스에 있는 압바 모세의 집을 찾아와 한 말씀 청했다.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떠나라. 그대의 수실에 머물라. 그리하면 그대의 수실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2]

 

물론 『금언집에 담긴 교훈들은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특정한 인물들에게 주어진 말들이어서 독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화하여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막의 영적 스승으로부터 손쉽게 교훈을 얻어 자신의 머릿속을 채우려 했던 한 사람은 세속을 떠나 자신의 수도실로 들어가 그곳에 머물러 앉아 있으라는 권면을 받는다. 그러면 수실에서 고독 가운에 앉아 기도하는 동안 그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헛된 욕망과 어지러운 생각이 비워지고, 하나님으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움과 채움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내 가운데 검질기게 나아가는 훈련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어야 이르게 되는 영적 성숙의 고지이다.

 

수도자들이 기거하던 사막(desert)은 우리말에서 사막(沙漠)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모래 사막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황야(wilderness)를 포함한다. 이러한 장소는 고대 수도자들에게 마귀와 악마들이 거주하며 활동하는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먼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곳이 광야(desert/wilderness)였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생존조차 위태로운 극한 환경인 사막에서는 사람의 육체적 한계만이 아니라 내면의 약함도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 악마의 유혹과 시험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은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투가 맹렬하게 일어나는 전장이다. 사막의 은둔수도자들의 효시로 여겨지는 인물인 안토니우스(Antonius the Great: 251-356)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압바 안토니오스가 말했다. “사막에 머물며 내적 고요 안에 사는 자는 세 가지 싸움에서 자유롭게 되는데, 그것은 청각과 떠벌리는 것과 시각에 대한 싸움이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싸움만이 남는 바, 곧 마음과의 싸움이다.”[3]

 

사막의 자기 수도실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외부 세계의 방해, 곧 눈으로 보는 장면들과 귀로 듣는 말들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요일 2:16). 또한, 혼자 침묵 가운데 있기 때문에 혀를 제어하는 승산이 매우 낮은 싸움에 임할 필요도 없다( 3:8). 그러나 자신의 마음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다. 사실 유혹이나 죄악의 본질적인 원인은 사람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 있으며( 15:1-20), 사람이 유혹에 빠지고 넘어지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이 그릇된 욕망에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막에서의 악한 영들과의 전투란 바로 자신의 마음속의 육체적, 세속적 욕망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악마들은 때로는 과거 그들이 보았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유혹하기도 하고, 황금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그들을 속이고 욕망을 충동하기도 한다. 아니면,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채 협박하기도 하며, 가공할 만한 힘으로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금식과 절식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탐식에 직면하고, 금욕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성적 욕망과 싸운다. 또한, 무소유를 통해서 소유욕과 탐욕과 싸우며, 기도와 노동을 통해서 나태 또는 무기력(akedia) 싸우고, 세상의 지위나 영광을 멀리함으로써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허영과 교만과 싸운다.

 

원로가 말했다. “‘기다려라’ 하고 말하면서 탐식의 마귀를 뛰어넘어라. 그대가 굶주려 죽지는 않을 것이므로, 오히려 절제하며 먹어라. 마귀가 그대를 재촉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 규칙적으로 먹어라. 마귀는 언제나 먹으라고 재촉하기 때문이다.”[4]

 

마치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강을 헤엄쳐 가듯이 마귀의 유혹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것이 사막의 수도자들이 영적 전투를 싸우는 방법이다. 이러한 전투에 임하는 수도자들의 무기는 고독과 침묵, 그리고 금욕과 겸손이며, 무엇보다 철저히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끊임없는 기도이다. 수도자들의 금욕적, 수덕적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는 수단일 뿐,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를 통해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 사막의 원로들은 열정이 과도한 젊은 수도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실을 늘 염두에 두게 하였고, 과도한 금욕으로 스스로의 몸을 해치고 영적 교만에 빠지는 것을 경계시켰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고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편안함을 뒤로하고 온갖 수고를 마다 하지 않으며, 쉬지 않는 기도 가운데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유도 예수를 얻기 위해서였다.

 

한 형제가 원로에게 물었다. “사부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얻게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원로가 말했다. “수고와 겸손과 끊임없는 기도로 예수를 얻는다네. 거룩한 자들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세 가지 방법으로 구원받았다네. 그러나 휴식과 자기 의지와 의로운 체하는 태도는 수도자의 구원에 방해가 된다네.”[5]

 

예수를 얻는다.는 것은 자신이 청원하는 어떤 사항에 대한 특정한 응답을 얻는 것이나, 기도를 통해서 어떤 기이한 환상이나 황홀경의 체험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막의 교부들은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거나, 어떤 대상을 얻고 소유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릇된 모든 것들을 비우고, 순전한 마음으로 순전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수도자의 기도는 기도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할 때까지는 완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온전히 자신을 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현존 가운데 거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한 기도의 목표였으며, 예수를 얻는 것이었다. 자신의 각종 헛된 욕망과 번잡한 생각을 비우고 단순히 그 마음에 예수의 이름을 담는 이들에게는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은총이 주어졌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처럼 말이다( 5:8). 그들이 받은 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가득 찬 역설적 비움이었다.

 

그런데 사막으로 나아간 모든 이들이 그러한 은총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킨 가운데 영웅적인 고행을 하다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보다 환상이나 황홀경 같은 어떤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다가 넘어지기도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세금이나 군역과 같은 도시 생활의 짐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막으로 왔다가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래서 암마 신클레티케(Synkletik: ?~373)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산 위에 있는 많은 자들이 도시 사람들처럼 행세하다가 망했다. 도시에 있는 많은 자들은 사막의 행업을 이루므로 구원받는다. 많은 사람과 함께 하면서도 마음으로 홀로 살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살아가면서도 생각을 통해 무리와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6]

 

사막이라는 물리적 장소 그 자체가 수도자의 영적 성장이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20세기의 수도자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인류가 자신들의 자본과 기술로 사막에 환상의 도시들을 건설하는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막이 어디로든지 옮겨 가서 모든 곳이 사막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를 인간이 속죄하고 악마와 싸우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고독의 터전으로 만들 수 있다.[7] 이런 의미에서 많은 현대인들이 삭막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도시는 시멘트와 아스팔트의 사막이며, 우리는 굳이 이집트의 사막이나 팔레스타인의 광야로 나아가지 않아도 이 도시에서 일종의 수도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그릇된 욕망이나 생각을 비우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손쉽게 얻는 이러저러한 깨달음들까지 모두 내려놓고, 깨끗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공허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현존을 선물로 받아 그 가운데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를 복된 사막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빛과소금」 2024년 11월호 게재글.



[1]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년경-373)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활동하다가 아리우스주의자들과의 이단 논쟁으로 박해를 받아 여러 번 추방되었다. 그 중 한 번은 사막으로 도피하였고, 이 기간(356-362) 동안 그는 사막 수도자들의 삶과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들었다. Athanasius, Athanasius: The Life of Antony and the Letter to Marcellinus (Mahwah, NJ: Paulist, 1980), 94.

[2] 남성현 옮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46.

[3] 위의 책, 41.

[4] 위의 책, 77.

[5] 위의 책, 202-203.

[6] 위의 책, 47.

[7] Thomas Merton, Thoughts in Solitude (New York: Noonday Press, 199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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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평범성에서 이타적 일상성으로

 

“어, 공이 어디 갔지?”

여름 휴가를 맞아 아이를 데리고 글램핑을 갔다. 아이는 캠핑을 하고 싶어 했지만, 아무래도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은 캠핑보다는 필요한 것들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는 글램핑이 훨씬 수월했다. 우리가 간 곳에는 놀이나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공용 물품들이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는데, 아이는 그 중에서도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전날 오후에 가지고 놀던 공이 다음날 아침이 되니 감쪽 같이 사라졌다. 아이와 함께 원래 공이 놓여있던 보관함은 물론 글램핑장 구석구석을 찾아 보았지만 공은 사라지고 없었다. 할 수 없이 다른 놀이를 하고 있는데, 조금 뒤에 어떤 다른 가족이 숙소에서 나와서 공놀이를 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노는 것은 우리가 찾던 바로 그 공이었다. 그제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 가족은 전날 저녁에도 그 공을 가지고 놀았는데, 아마도 공을 밤새 자기 숙소에 보관하고 있다가 아침에 다시 가지고 나와서 노는 것 같았다. 공용 물품을 마치 자기 것처럼 독점하고서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없이 즐겁게 웃으며 아들과 노는 아빠를 보니 마음이 씁쓸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는 이와 같은 이기적인 모습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면 그 이기심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출간된지 거의 반백 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 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쓴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이다. 이 책에 의하면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이기적 존재이며, 그 유전자가 빌리고 있는 인간의 몸은 유전자가 살아남아 계속 운반되기 위해 진화를 통해 만들어낸 생존 기계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주인은 유전자이며, 인간은 죽어도 유전자는 복제를 통해서 계속 이어진다.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이 유전자가 실제로 이기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품을 최대한 많이 퍼뜨리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은유적인 표현인지는 사실 불분명하다. 어쨌든 도킨스의 도발적인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이기심은 생존을 목표로 경쟁하는 유전자의 본래적 속성, 또는 그러한 속성이 빚어내는 현상에서 기인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오늘날의 ‘신무신론’(新無神論), 곧 ‘종교, 또는 신에 대한 가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반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일련의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창조주나 신의 계획이나 섭리를 배제한 채 철저히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생명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창조주의 뜻에 따라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진화를 통해 우연히 발생한 생존 기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이나 자연 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검증하려는 시도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과학적 방법론이 신비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없이 부족할 뿐이다.

 

서방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로 불리우는 아우구스티누스(Augnustinus of Hippo: 354-430)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중세로부터 전해진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닷가를 걸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당시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On the Trinity)》를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한 분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세 분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때 그는 우연히 한 작은 아이를 발견하였다. 그 아이는 바닷가의 모래에 작은 구멍을 파고서, 작은 조개껍질(또는 숟가락)로 바닷물을 퍼다가 그 구멍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잠시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자신은 바닷물을 전부 떠다가 모래 위의 작은 구멍에 넣으려고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반응하였다. “뭐라고? 그것은 불가능해. 확실히 바다는 너무 크고, 구멍은 너무 작아.” 그러자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맞아요.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한정된 이해력으로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찰하는 데 성공하는 것보다는 제가 바닷물을 모두 다 떠서 구멍에 부어 넣는 것이 더 쉬울 거예요.” 이 말에 놀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몸을 돌려 그 아이를 바라보았더니 그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제한된 이해력으로 신비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중세만이 아니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극히 부분적이라 할라도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모두 헛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복잡해지지 않도록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간단하게 한 가지만 언급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이실 수 있는 이유는 세 위격이 서로 이기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자신을 내어 주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인해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곧 하나님의 상호침투(또는 상호내주)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이기적이지는 않았다. 삼위일체, 곧 사랑으로 하나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 1:26) 만드신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본질적으로 이타적인 존재였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자신의 사랑이 자신만을 향하여 좁은 ‘자기’의 경계 속에 갇혀 있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를 닮아 그 사랑이 ‘나’의 경계를 넘어 타자를 향해 즐겁게 범람하는 이타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했던(창 3:5), 곧 더 이상 하나님께 사랑으로 종속되고 연합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독립하여 대등하게 경쟁하는 존재가 되기를 욕망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사람은 창조시에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곧 자신의 한계를 넘어 타인에게로 흘러 넘치는 사랑을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상태로 원죄(original sin)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는데, 토머스 머튼(1915-1948)은 그것을 사람이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라 통찰한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1948)의 첫 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15년 1월의 마지막날, 물병자리 별빛 아래에서, 큰 전쟁이 치뤄지던 해에, 스페인이 국경에 인접한 프랑스의 산맥 어느 기슭에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본성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유로웠으나, 내가 태어난 세상의 형상을 따라 나 자신의 폭력과 나 자신의 이기심의 죄수였다.”[1] 

 

머튼에게 있어서 사람이 원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은 이기심의 감옥에 갇힌 죄수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그의 다른 표현을 인용하면 “거짓 자아(false self)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이다.[2]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생존을 목표로 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로 인해 발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물학적인 유전자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기적인 유전자’이다. 그리고 구원이란 바로 그 죄의 사슬을 끊고 이기심의 감옥에서 놓임을 얻는 것이며, 거짓 자아의 가면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참 자아(true self)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 이러한 영적 해방과 회복은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랑이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다. 그러한 완전한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신 하나님이 아니면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께 듣고 우리에게 전한 말,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요일 1:5)는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이기심이 전혀 없다.”는 표현으로도 바꾸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요일 4:8 참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의 몸으로 이땅에 오시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구원이 이기심의 감옥에서 놓임을 얻는 것이라면,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은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적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을 얻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도 이기적인 모습들이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배당 안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성경책을 아예 ‘자기 자리’에 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비치용 성경책을 자기 집에다 비치해 두고 읽는 사람들도 있다. 예산을 배정하거나 사역을 할 때에 자기가 속한 부서나 그룹의 이익을 우선시하기도 하고, 부서장을 임명하거나 사역을 배분할 때도 자신이 좀 더 유력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경쟁하고 은밀히 담합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에 두는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한 번, 사도 요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요한에 의하면, 우리가 교회로, ‘성도의 교제’로 부름을 받은 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요일 1:3). 그런데, 만약 우리가 ‘나는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요일 1:5-6).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제대로 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어둠의 일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거짓에 대한 요한의 처방은 이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 1:7/새번역).

 

빛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어두운 일들을 내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이 탄식한 것처럼(롬 7:24) 당위나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다. 지하 감옥과 같이 좁고 어두운 우리 마음의 창문을 열어 전적으로 이타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마음 깊은 곳을 구석구석 비추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이기심의 감옥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어 빛이신 하나님의 사귐 속에 거할 수 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상호 침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속에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욕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이상 내가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나의 안전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게 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요일 4:18).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사귐을 통해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충만한 기쁨을 우리 또한 누릴 수가 있다(요일 1:4).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글램핑장에서 보았던 아빠는 아들과 함께 놀면서 그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가 만약 공용물품을 독점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쓰는 기쁨을 알았다면, 제한된 자원을 자신들만 누리는 차가운 기쁨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며 함께 누리는 따뜻한 기쁨을 아이도 알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1] Thomas Merton, The Seven Storey Mountain(FL, Orlando: Harcourt Brace & Company, 1948), 3.

[2]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New York: New Directions, 1962), 33.

 

「빛과소금」 2024년 9월호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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