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신학과 실천」 제94호(2025년 5월)에 게재된 논문의 한글 초록이다. 이 논문은 지난 2025년 2월 제95회 한국실천신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요즘은 학술지 검색 사이트에서 쉽게 원문을 볼 수 있지만, 기록을 위해 여기에도 원고를 pdf파일로 첨부한다. 

권혁일_토머스 머튼의 『냉전 편지』에 담긴 제3의 메시지.pdf
1.32MB

 


 

이 글은 “정의와 평화가 위기에 처하고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때에 목회자들은 설교단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 답을 찾기 위 해서 이 연구는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수도자이자 사회 비평가였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1961년 10월부터 1962년 10월 사이에 작성하여 긴급하게 등사판으로 배포한 『냉전 편지』(Cold War Letters)에 주목한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으로 세계가 핵전쟁의 위기에 직면한 때에, 머튼은 ‘냉전 편지들’을 통해서 편지의 수신자들과 서간집의 독자들에게 정치, 사회적 문제의 도덕적, 영적 원인을 직시하고,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에 바탕한 제3의 길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냉전 편지』에 담긴 토머스 머튼의 사상과 호소는 진영이나 세력 간의 대립이 아닌 통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원론적 사고로는 도저히 생각해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제3의 위치’(a third position)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제3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메시지는 단지 정의와 평화의 구현을 위한 이상적인 원칙과 방향만 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지향하였다. 이와 같은 토머스 머튼의 메시지를 적용하면, 설교자는 당면한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활동주의’(activism)에서 벗어나, 고독과 침묵 가운데 거하며 명료한 통찰력을 가지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회중들로 하여금 사회적인 현실은 도외시하고 개인적 위안으로만 만족하게 하는 ‘행복을 주는 약’으로 회중을 현혹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정치적 좌우를 넘어서는 도덕 원칙을 찾아, 통합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할 긴급한 사명이 있다. 토머스 머튼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오늘날 한국 교회가 처한 상황이 동일하지는 않다. 하지만, 수도원에서의 깊은 침묵의 삶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시대를 꿰뚫어 보았던 머튼의 메시지를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영적 갱신을 이루고,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데에 시의적절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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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차

 

 

5월 12일

12년 전 

아버지께서 

사망선고를 받은 날

 

12년 후 그날

5월 12일

아버지의 차는

운행 중지 진단을 받았다

 

주행거리 12만 킬로미터

2009년식 SM5 LE

장애인용 LPG

 

더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 사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일주일 전 오일들도 모두 바꾸고

브레이크패드도 새 것으로 달아주었는데

그래서 수술을 받으시러 병원에 들어가시기 전

새 남방도 두 벌 사서 걸어두셨는데

 

언제나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아버지가 아껴 타시다 물려 주신 차

영정 속의 아버지가 타시고 

마지막 여행을 했던 차

즐거운 길도, 힘든 길도 

나와 함께 달렸던 고마운 차

지난 어린이날도 가족들의 

웃음을 가득 싣고 달렸던 차

 

일주일 동안 지하주차장에 

안치해 두고서

깊은 밤 남 몰래 흘렸다 

굵은 눈물을

중환자실 마지막 밤

아버지처럼

 

어떻게 하겠는가

여행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야지

나눠줄 것 나눠주고 

가볍게 떠나야지

 

폐차장에 차를 남겨 두고 

뒤돌아서는데

화로 속에 관이 들어가던

그날이 

자꾸 생각난다

 

 

2025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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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소녀 2

 

 

한 소년이

벚꽃나무 아래 

한 소녀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는다

소녀는 수줍은 듯 서있고

소년은 바람에 흩날리는

소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준다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바람에 나무끼던 꽃잎도

잠시 숨을 참고 멈춘다

 

이번에는 소녀가

소년을 자기 뒤에 세우고

함께 셀카를 찍는다

소녀는 살짝 몸을 뒤로 기울여 

소년에게 기대고

소년은 슬며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소녀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맞댄다

 

꽃잎들도 불그스레해진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들도 모르게

 

벚꽂나무 아래 서면

누구나 소녀와 소년이 된다

청춘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소년과 소녀는 

손을 맞잡고

꽃길을 걸는다

사월의 빛 속으로 행진한다

 

2024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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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小食)

 

새벽부터 휘날리던 싸락눈
이 그친 오후

산속의 진박새들이 바빠졌다
눈 쌓인 나뭇가지 사이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눈 덮인 땅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신 났다
어린아이들처럼

간간이 옆으로 누운 산(山)
처럼 생긴 머리로
산 바닥도 찍어 보고
마른 나뭇잎도 쪼아 대는데
헐벗은 겨울 산에서
도대체 무얼 먹는지

애개,
그 작은 부리로
서너 번 쪼아대더니
금방
파르르 날아간다

고작 그것 먹고
배고파서 어떡하니?

그러자 배부른 나에게
진박새가 하는 말

바보야,
무거우면 날 수 없잖아

하늘에서 찍 떨어진 말이
마음에 쿵 하고 내려 앉았다

아,
그러면
나도
날 수 있을까?
 

2025. 2. 12.
영락수련원에서
 
(memo: 새를 보고 나도 날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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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200억 건축보다 사람을 키워라》(키아츠, 2024)는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김재현 원장님이 쓴 일종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인재 양성’, 또는 ‘다음세대 양성’을 키워드로 저자의 오랜 경험과 지혜를 정리한 글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저자의 인생 이야기가 곳곳에 녹아 있다. 단순한 경험담이 아니라 ‘인재 양성’을 위해 저자가 투신했던 인생 이야기와 그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다음세대들과 그 부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은 “네 번의 장학재단 이야기”, 제2장은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 제3장은 “부모와 교회를 위한 제안”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비록 이 책에는 저자의 어머님 이야기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자전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를 ‘농부신학자’로 정의하고 화천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신학자 김재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러했다. 내가 김재현 원장님을 알아 온 지는 20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유학시절, 김재현 원장님의 미국 출장길에 여러 번 동행하며 기독교와 한국 교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원장님을 잘 알게 되었다. 그분의 꿈과 열정, 성품과 가족 이야기 등을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또는 토막토막의 정보로만 알고 있던 김재현 원장님을 좀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이 김재현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책이 아니라, 그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인재 양성’에 대한 책이므로, 자신이 걸어갈 인생길을 모색하는 청소년과 대학생,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는 부모와 교사, 목회자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저자와의 개인적인 대화와 이 책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의 부제가 “결국 사람이 사람을 키운다”인데, 나 역시 김재현이라는 사람의 영향을 받은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25년의 인재 양성 경험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많이 품고 있는 줄 알았는데, 글을 마칠 즈음에 보니 대단한 것이 별로 없었다. 대신 순간순간 내가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진하게 남는다.”(199). 

 

비록 저자는 ‘대단한 것이 별로 없는 글’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독자들이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인생 이야기와 조언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성찰과 숙고와 토론을 거쳐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가는 자료로 삼는다면, 독자들의 인생도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 줄 만한 가치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