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적 평범성에서 이타적 일상성으로

 

“어, 공이 어디 갔지?”

여름 휴가를 맞아 아이를 데리고 글램핑을 갔다. 아이는 캠핑을 하고 싶어 했지만, 아무래도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은 캠핑보다는 필요한 것들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는 글램핑이 훨씬 수월했다. 우리가 간 곳에는 놀이나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공용 물품들이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는데, 아이는 그 중에서도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전날 오후에 가지고 놀던 공이 다음날 아침이 되니 감쪽 같이 사라졌다. 아이와 함께 원래 공이 놓여있던 보관함은 물론 글램핑장 구석구석을 찾아 보았지만 공은 사라지고 없었다. 할 수 없이 다른 놀이를 하고 있는데, 조금 뒤에 어떤 다른 가족이 숙소에서 나와서 공놀이를 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노는 것은 우리가 찾던 바로 그 공이었다. 그제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 가족은 전날 저녁에도 그 공을 가지고 놀았는데, 아마도 공을 밤새 자기 숙소에 보관하고 있다가 아침에 다시 가지고 나와서 노는 것 같았다. 공용 물품을 마치 자기 것처럼 독점하고서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없이 즐겁게 웃으며 아들과 노는 아빠를 보니 마음이 씁쓸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는 이와 같은 이기적인 모습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면 그 이기심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출간된지 거의 반백 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 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쓴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이다. 이 책에 의하면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이기적 존재이며, 그 유전자가 빌리고 있는 인간의 몸은 유전자가 살아남아 계속 운반되기 위해 진화를 통해 만들어낸 생존 기계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주인은 유전자이며, 인간은 죽어도 유전자는 복제를 통해서 계속 이어진다.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이 유전자가 실제로 이기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품을 최대한 많이 퍼뜨리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은유적인 표현인지는 사실 불분명하다. 어쨌든 도킨스의 도발적인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이기심은 생존을 목표로 경쟁하는 유전자의 본래적 속성, 또는 그러한 속성이 빚어내는 현상에서 기인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오늘날의 ‘신무신론’(新無神論), 곧 ‘종교, 또는 신에 대한 가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반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일련의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창조주나 신의 계획이나 섭리를 배제한 채 철저히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생명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창조주의 뜻에 따라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진화를 통해 우연히 발생한 생존 기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이나 자연 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검증하려는 시도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과학적 방법론이 신비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없이 부족할 뿐이다.

 

서방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로 불리우는 아우구스티누스(Augnustinus of Hippo: 354-430)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중세로부터 전해진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닷가를 걸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당시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On the Trinity)》를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한 분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세 분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때 그는 우연히 한 작은 아이를 발견하였다. 그 아이는 바닷가의 모래에 작은 구멍을 파고서, 작은 조개껍질(또는 숟가락)로 바닷물을 퍼다가 그 구멍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잠시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자신은 바닷물을 전부 떠다가 모래 위의 작은 구멍에 넣으려고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반응하였다. “뭐라고? 그것은 불가능해. 확실히 바다는 너무 크고, 구멍은 너무 작아.” 그러자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맞아요.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한정된 이해력으로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찰하는 데 성공하는 것보다는 제가 바닷물을 모두 다 떠서 구멍에 부어 넣는 것이 더 쉬울 거예요.” 이 말에 놀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몸을 돌려 그 아이를 바라보았더니 그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제한된 이해력으로 신비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중세만이 아니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극히 부분적이라 할라도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모두 헛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복잡해지지 않도록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간단하게 한 가지만 언급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이실 수 있는 이유는 세 위격이 서로 이기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자신을 내어 주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인해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곧 하나님의 상호침투(또는 상호내주)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이기적이지는 않았다. 삼위일체, 곧 사랑으로 하나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 1:26) 만드신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본질적으로 이타적인 존재였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자신의 사랑이 자신만을 향하여 좁은 ‘자기’의 경계 속에 갇혀 있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를 닮아 그 사랑이 ‘나’의 경계를 넘어 타자를 향해 즐겁게 범람하는 이타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했던(창 3:5), 곧 더 이상 하나님께 사랑으로 종속되고 연합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독립하여 대등하게 경쟁하는 존재가 되기를 욕망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사람은 창조시에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곧 자신의 한계를 넘어 타인에게로 흘러 넘치는 사랑을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상태로 원죄(original sin)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는데, 토머스 머튼(1915-1948)은 그것을 사람이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라 통찰한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1948)의 첫 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15년 1월의 마지막날, 물병자리 별빛 아래에서, 큰 전쟁이 치뤄지던 해에, 스페인이 국경에 인접한 프랑스의 산맥 어느 기슭에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본성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유로웠으나, 내가 태어난 세상의 형상을 따라 나 자신의 폭력과 나 자신의 이기심의 죄수였다.”[1] 

 

머튼에게 있어서 사람이 원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은 이기심의 감옥에 갇힌 죄수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그의 다른 표현을 인용하면 “거짓 자아(false self)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이다.[2]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생존을 목표로 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로 인해 발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물학적인 유전자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기적인 유전자’이다. 그리고 구원이란 바로 그 죄의 사슬을 끊고 이기심의 감옥에서 놓임을 얻는 것이며, 거짓 자아의 가면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참 자아(true self)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 이러한 영적 해방과 회복은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랑이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다. 그러한 완전한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신 하나님이 아니면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께 듣고 우리에게 전한 말,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요일 1:5)는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이기심이 전혀 없다.”는 표현으로도 바꾸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요일 4:8 참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의 몸으로 이땅에 오시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구원이 이기심의 감옥에서 놓임을 얻는 것이라면,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은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적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을 얻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도 이기적인 모습들이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배당 안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성경책을 아예 ‘자기 자리’에 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비치용 성경책을 자기 집에다 비치해 두고 읽는 사람들도 있다. 예산을 배정하거나 사역을 할 때에 자기가 속한 부서나 그룹의 이익을 우선시하기도 하고, 부서장을 임명하거나 사역을 배분할 때도 자신이 좀 더 유력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경쟁하고 은밀히 담합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에 두는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한 번, 사도 요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요한에 의하면, 우리가 교회로, ‘성도의 교제’로 부름을 받은 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요일 1:3). 그런데, 만약 우리가 ‘나는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요일 1:5-6).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제대로 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어둠의 일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거짓에 대한 요한의 처방은 이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 1:7/새번역).

 

빛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어두운 일들을 내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이 탄식한 것처럼(롬 7:24) 당위나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다. 지하 감옥과 같이 좁고 어두운 우리 마음의 창문을 열어 전적으로 이타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마음 깊은 곳을 구석구석 비추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이기심의 감옥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어 빛이신 하나님의 사귐 속에 거할 수 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상호 침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속에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욕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이상 내가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나의 안전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게 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요일 4:18).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사귐을 통해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충만한 기쁨을 우리 또한 누릴 수가 있다(요일 1:4).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글램핑장에서 보았던 아빠는 아들과 함께 놀면서 그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가 만약 공용물품을 독점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쓰는 기쁨을 알았다면, 제한된 자원을 자신들만 누리는 차가운 기쁨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며 함께 누리는 따뜻한 기쁨을 아이도 알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1] Thomas Merton, The Seven Storey Mountain(FL, Orlando: Harcourt Brace & Company, 1948), 3.

[2]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New York: New Directions, 1962), 33.

 

「빛과소금」 2024년 9월호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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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정말 가까운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룹 영성지도 시간, 한 자매가 굵은 눈물 방울을 떨어뜨린다.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이들도 티슈를 꺼내 눈물을 닦는다. 그들에게도 그렇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기억에도 한 친구가 떠올랐다.
 
우리 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상당히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목회 현장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숫자가 아니라 눈물로 경험한다. 교인과 교인의 가족이나 친구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회자도 스스로 세상을 떠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마 10:29), 그들의 자살 기도가 실패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추구하기보다, 먼저 문제를 안고 일상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기를 추구해야 한다.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한 여인을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자살생존자’라고 부른다. 그녀는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살 기도를 한 후 닷새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고, 가해자의 가족으로부터 “차라리 죽지, 왜 다시 깨어났느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돌아온 그녀를 환영해 주셨고, 그 사랑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이 깨어난 날을 생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아홉 번째 ‘생일날’, 그녀는 교구목사인 나를 찾아왔다. 나는 함께 교구를 섬기는 전도사님과 함께 생일 케이크의 초를 밝히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성경에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인물들이 나온다. 욥은 비참한 재앙 가운데 “내가 태어난 날아, 사라져라. 내가 잉태된 그 밤아 없어져 버려라!”(욥 3:3, 메시지)고 절규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 또한 “내가 태어난 날이여, 저주 받아라!”(렘 20:14, 메시지)라고 극심한 고통 속에 부르짖었다. 이렇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은 자살하기 직전의 마지막 단계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저항 행위이다. ‘너는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야.’ ‘네가 없어도 세상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 등과 같이 한 사람의 존재와 생명의 가치를 부정하는 생각과 비난에 대한 생생한 저항이다.
 
20세기 미국의 트라피스회 수도자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효용성의 관점에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현대 서구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역할에 달린 것이 아니다. 생명은 그 자체가 가치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은 유전자 변형을 통해 새로운 품종의 씨앗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돌멩이나 생명이 없는 어떤 물질에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없다. 그것은 앞으로도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전하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와 아내는 아이가 없어서 오랫동안 외롭게 지냈다. 그러나 결혼 13년만에 아이를 얻게 되었다. 불가능한 것 같아 이제 마음을 비우자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은 아이를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람의 노력이나 우연에 의해 존재하게 된 이가 없다는 진리를 깊이 절감하게 되었다. 부모가 계획하지 않은 아이, 부모가 원치 않은 아이는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아이는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하나님께서 뜻하셔서 이 땅에 태어났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이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한 생명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녀는 내가 ‘생일’을 축하해 준 그 이후에도 많은 위기를 겪었다. 깊은 우울감과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였고, 한 번씩 찾아오는 자살 충동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께 다시는 자살을 기도(企圖)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하고, 대신 기도(祈禱)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무력감과 절망감 등과 같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까지도 모두 토로하였다. 어떤 때는 간신히 숨을 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죽음과 가까운 상태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때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삶의 목표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 그것은 자살 위기 속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최근에 자신의 간증을 담은 자작곡을 녹음하여 앨범으로 발매하고, 유튜브에 ‘사랑숲벤치’라는 채널을 만들었다. 사실 그녀는 이전에 같은 이름의 블로그를 몇 년 동안 홀로 운영하였으나, 어느 날 찾아온 깊은 내적 어둠으로 인해 블로그를 폐쇄한 적이 있다. 생명을 거부하는 죽음의 문화에 홀로 맞서기가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그녀는 그로기 상태가 되어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가, 이제 유튜브 채널 개설과 함께 다시 죽음의 문화와 싸우기 위해 세상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같이 뒷걸음 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사랑 가득한 숲속 벤치’를 만들어 나갈 동역자가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그녀를 함께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리며, 한 해 동안 간신히 이어왔던 부끄러운 연재를 갈무리한다.
 

 

〈월간 문화목회〉49(2024년 7-8월호), 16-19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남는 연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편집진과 독자들께는 죄송하지만 나의 깜냥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어서 이쯤에서 내려 놓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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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때 교회에서 쓸 수 있는 영성 수련 프로그램 하나 잘 만들어 와~.”

 

유학 시절 잠시 귀국하였을 때 만난 신대원 동기 형은 내게 밥을 사주며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그 말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형의 애정 어린 조언은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그 말이 잊혀지지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당시 내가 공부하고 있던 박사 과정 프로그램은 기독교 영성학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학문적 훈련을 하는 과정이어서 구체적인 영성 수련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말에 웃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영성 수련은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프로그램의 작동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성이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영성 수련()’라는 용어도 한국 교회 안에서 매우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제목은 영성 수련()’인데 실제 내용은, 간단히 경건회를 드린 후 세미나나 야유회, 레크리에이션 등의 다른 활동들로 대부분의 시간을 채우는 경우도 많다. 또는 참가자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한 이벤트성이 짙은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참가자들 모르게 가족들로부터 영상 편지나 손 편지를 받아서 보여 주거나, 아름다운 장식들과 수많은 초로 만든 하트 속에 서게 하거나, 관을 준비해서 관 속에 들어가 누워 죽음의 상황을 경험해 보게 하는 식이다. 그래서 이런 수련회는 비밀 유지가 관건이다. 내용이 알려지게 되면 김이 새어버려감동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각종 인위적인 기술들영업 비밀들로 진행되는 영성 수련회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나 일시적인 감동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그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흔히 기도는 능동적 기도수동적 기도가 있다고 말한다. 능동적 기도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 추론, 상상 등과 같은 이성적 기능을 사용해서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이다. 언어를 사용하여 드리는 일반적인 청원기도나 말씀묵상기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수동적 기도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노력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순전한 은혜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추구하는 기도이다. 보통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능동성과 수동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기도가 깊어질수록 능동성이 줄어들고 수동성이 늘어난다.

 

비슷하게 영성 수련에도 이러한 능동성과 수동성이 존재한다. 영성 수련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단연 기도이다. 강의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는 하나님에 대해 들음으로써 간접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지만, 기도를 통해서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 수련 중의 강의는 기도를 안내하고, 돕기 위해서 제공된다. 또한, 소그룹 나눔이나 일대일 영성 지도 역시 수련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기도 체험을 잘 분별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갖기 위해 실시한다.

 

그래서 필자가 섬기는 영락수련원에서 진행하는 영성 수련은 하루 세 번의 기도회를 그 기본 골격으로 한다. 강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수련을 시작할 때 기도에 대한 강의를 단 한 번만 하는데, 주로 말씀으로 기도를 드리는 방법인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복음서 묵상’(Gospel Contemplation)을 소개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아침과 점심과 저녁에는 모든 수련자들이 함께 모여 인도자의 안내에 따라 기도하고, 그 사이에는 각자가 정해진 말씀을 읽고 개인적으로 기도한다. 그렇게 하면, 하루에 다섯 차례 이상 기도하게 되는데, 기도가 계속될수록 하나님과의 만남도 점점 깊어진다. 또한, 기도의 연장으로서 단순한 노동을 하기도 하고, 여백의 시간에는 자연 묵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영성 지도자를 만나 기도 체험을 이야기하고 지도를 받는데, 이 시간을 통해서 수련자는 영성 지도자와 함께 자신의 지난 기도를 되돌아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고 누리게 되며, 다음 기도를 위한 실제적인 안내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성 수련에서는 영성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영성 지도자는 수련자들에게 적절한 성서 본문을 선택하고, 그 본문으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잘 안내하며, 기도를 한 후에는 수련자들을 만나 기도 체험을 듣고, 그들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일어나고 관계가 더욱 발전하도록 적절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영성 지도는 성경 지식이 많거나, 자신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두 가지도 필요하지만, 영성 지도자는 수련자의 기도 체험을 다루어야 하는 만큼 기독교 영성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영성 지도 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소개한 영성 수련의 요소들, 곧 기도회와 개인 기도, 그리고 기도를 돕기 위한 강의와 영성 지도, 또한 기도의 연장으로서의 노동과 자연 묵상 등의 프로그램들과 영성지도자라는 인적 요소는 수련자들이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것을 돕기 위한 요소일 뿐이다. 수련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이러한 활동들을 하는 것은 능동적인 노력이지만 기도가 깊어질수록 점점 자신의 노력들을 넘어서는 수동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난 호에서도 테네브레를 소개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것은 인간의 능동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산출되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주체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 수련을 기획하고 진행할 때는 인간적인 기술과 방법으로 고안한 프로그램들이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앞서지 않도록 절제할 필요가 있다. 참가자들이 은혜받은 느낌을 갖게 하려는 조급함이나 강박으로 인해 사람의 감정을 손쉽게 움직이려는 이벤트적인 요소는 지양하는 것이 좋다. 그것보다는 성령께서 수련자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세밀하게 활동하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수련 전반에 걸쳐 침묵의 분위를 조성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영락수련원의 영성 수련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기도회나 예배 때 찬양을 하거나, 영성 지도자와 만나 대화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수련자들은 수련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침묵 가운데 지낸다. 식사도 침묵 가운데 홀로 하고, 잠도 독방에서 고독 가운데 혼자 잔다. 휴대폰도 꺼두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한다.

 

그러므로 영성 수련은 원료를 투입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적인 공정(工程)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개방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면에서 행하시는 활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받아들임은 수련을 마무리짓는 예배의 성찬식을 통해서 정점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고 명령하신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라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받아서 먹고 마심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그리고 함께 수련에 참여한 형제자매들과의 하나됨을 체험하는 신비의 통로이다.

 

이런 점에서 영성 수련에서 이러저러한 프로그램들은 공연을 위해 준비된 무대에 불과하다. 영성 지도자는 공연을 돕는 스태프일 뿐이다. 그 자리에 임하셔서 직접 춤을 추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간절히 열망하는 영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손을 붙잡고 함께 춤을 추신다. 그러면 영혼은 그 손에 이끌려 함께 춤을 출 뿐이다. 그것은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영혼이 함께 춤추는 혼인 잔치이자, 하나님 안에서 모든 창조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는 우주적인 춤이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 말한 대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그 춤 한 가운데 있으며, 그 춤은 우리의 핏속에서 고동치고 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잊고, 우리의 끔찍한 엄숙함을 바람에 던져버리고, 그 보편적인 춤(general dance)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여전하다.”[1]

 

 


 

〈월간 문화목회〉48(2024년 6월호), 17-21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1]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Y: New Directions, 1962),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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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최초로 누린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이다. 창세기에는 아담이 땅 위의 짐승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세기 2:19-20a)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름 짓기이야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역할과 태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동물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서 붙일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한낱 피조물인 아담에게 맡기셨다. 아담이 자발적으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만나는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동물들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다. 그가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말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권유하시지 않으셨을까? 아담, 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겠니?

 

성서학자들은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아담의 이름 짓기의 의미를 그 앞 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명령과 연관시킨다. 하나님은 땅의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신 후에 흡족하게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6-28).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최초로 한 행위는 그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새와 짐승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사람은 창조주로부터 그 동물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는다. 많은 피조물들 가운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살도록 지음받았다는 말과 같다. 아마도 하나님은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너희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이 나를 대리하여 너희를 다스릴 것이란다.

 

그런데 이름을 짓는 것은 단순히 권한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야기(19-20)가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인 것을 애처롭게 여기시고 그에게 배필을 만들어 주신 이야기(18-25) 안에 들어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가 아니라 그 아내와 관계를 맺고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어 살아가도록 뜻하셨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과도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의도일 것이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여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명명식(命名式)’을 눈앞에 그려보면,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아담은 자신에게 온 동물들을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보며, 손으로 어루만지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동물들에게 부여하신 그들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 그렇게 지어준 이름들 하나하나에는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향한 그의 애정이 담겨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 이름들을 부를 때마다 그의 마음에서 애정이 솟아났을 것이라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아담이 그렇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께서도 매우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행복해 하셨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들에게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붙임으로써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전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창조의 동역자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와 동역자로서 이 땅을 사랑과 정성으로 다스릴 사명이 있다.

 

이렇게 동물들의 이름은 아담이 지어 주었지만,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 주셨다. 앞서 인용한 창세기 126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담”(adam)이다. 히브리어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의 이름으로서 고유 명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하는 보통 명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기 이전에, 당신의 마음에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때부터 그 존재를 이미 아담이라고 명명하셨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의 이름을 따라서 아담’(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아담/사람이라는 이름에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딸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시편 8:4-8/새번역)

 

그리고 시인은 이어서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9)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에는 경이에서 솟아나는 창조주를 향한 깊은 경외심과 탐구심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름을 지으셨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을 권한이 없다. 다만, 이렇게 여쭈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32:29a). 또한,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3).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32:29b)라며 그 요청을 거절하시거나, 그저 나는 나다”(3:14)라고 대답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숨기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YHWH)라고 알려주셨다(3:16, 6:2).

 

그리스-로마 종교의 제의에서 사용된 기도문을 살펴 보면, 기도자는 자신이 청하는 신의 이름을 거창한 수식어를 사용하여 부르며, 사실상 그 신을 설득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20:7), 그 이름을 불러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로는 네 글자(YHWH)로 기록하면서도, 입으로는 직접 발음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주님(adonai)’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사실상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소리는 추정할 뿐,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우리에게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하나님을 소유하거나 조종할 수는 없고, 다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께 온전히 소유될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태초부터 시작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사람(아담) 사이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그분께 속한 존재로서 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이다. 이것이 영성 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신다(33:7).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의 근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간혹 경우에 따라 익명성 속에 숨고 싶을 때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아 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하는 욕구가 존재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확인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김춘수 시인은 잘 알려진 「꽃」이라는 시에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노래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사랑으로 불리고 존중받을 때 커다란 행복을 얻는다.

 

 

반대로 이름을 박탈당할 때, 또는 이름이 조롱당할 때 사람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깊은 모멸감과 고통을 겪게 된다. 미국 한인 이민사는 그러한 고통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9031월 하와이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 노동자로 모집되어 간 102명의 한인 이주자들은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렸다. 그들이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했던 식별 카드(identification card)에 적힌 번호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이었다. 농장주들을 그들을 사람이 아니라 생산 수단으로 취급하여 짐승처럼 구타하고 착취하였다.[1] 이러한 비정체성(non-identity)의 경험은 그들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은, 일본 유학을 위한 증서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며, 이름을 박탈당하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시로 남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참회록」, 부분)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박탈당함으로써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받지 못하고 좋은 자녀’, ‘좋은 학생’, ‘좋은 ○○등과 같은 미명으로 타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의 고통은 자신의 참된 이름을 찾을 때, 또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애정을 가지고 불러줄 때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나를 만드신 하나님일 때 우리 삶은 궁극적인 의미를 얻고, 더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참된 이름은 나의 신분증에 기록된 이름 몇 글자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에 새겨진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듣기까지 나의 이름은 비밀로 남아 있다. 그 비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왕상 19:12-13). 그리고 그 이름 속에 담긴 진리를 들은 자만이 자신의 이름을 삶으로 살아 낼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의 감리교 목사이자 작가인 테드 로더(Ted Loder)는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이 시가 자신의 기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침묵 가운데 제 이름을 지어 주소서

 

제가 지어 붙이는

어떤 이름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거룩한 분이시여,

침묵 가운데

제 이름을 지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당신께서 제 안에 두신

진리를 들으며,

당신께서 저를 향해 품으신

사랑을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께서 부르신 대로

당신의 인류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그 사랑을 살아 내게 하소서.[2]

 


[1] 서광운, 『미주한인칠십년사』(서울: 해외교포문제연구소, 1973), 27-30.

[2] Ted Loder, Guerrillas of Grace: Prayers for the Batt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4), 30.

 

「빛과소금」 2024년 6월호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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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찬양을 듣고 계신 것을 느꼈어요. 시간이 좀 지났지만, 꼭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살며시 미소를 띠고서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지난 성 목요일에 드린 테네브레를 회상하는 듯 그윽하게 빛나고 있었다.

 

테네브레는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고난주간(성 주간)의 마지막 3(, , ) 중에 드리는 기도회이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용어이지만, 테네브레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늦어도 9세기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니 그 역사가 천 백 년이 훌쩍 넘었다. 원래 테네브레는 성 주간의 마지막 3일 동안 새벽 두세 시와 해뜰참에 드리던 수도원의 기도회(Martins, Lauds)였는데, 후기중세시대 이후부터는 교회에서 주로 오후나 저녁기도로 드려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성 주간의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저녁 중 하루를 택하여 드리기도 한다.

 

지난 2019년에 영락수련원에서 테네브레를 시작하며, ‘어두움’, ‘그림자를 뜻하는 라틴어 테네브레’(Tenebrae)암흑의 예전으로 번역하였다. 그것은 테네브레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관련된 성경 말씀들이 봉독될 때마다 초들을 하나씩 끄다가 마지막에는 암흑 속에서 마치는 예전이기 때문이다. 성서 본문은 시편과 예레미야애가와 서신서 등에서 선택이 되는데, 개혁 교회 전통에서는 예수님의 가상칠언의 말씀이나 마지막 만찬과 수난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 말씀들을 읽는 편이다. 특징적인 점은 예수님께서 숨지신 장면을 읽은 후에는 봉독자가 성경책을 힘껏 덮거나 발로 마룻바닥을 쿵 하고 굴리는 등의 방식으로 큰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소리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을 때 지진이 일어난 것을 상징하는데(27:51),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일 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청각적 효과는 방금 봉독된 말씀에 시공간을 넘어선 현장성을 더해준다.

 

전통적인 형태의 테네브레는 산 모양으로 된 독특한 형태의 촛대에 열다섯 개의 초를 세워놓고 양쪽 끝에서부터 초를 하나씩 끄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의 개수나 배열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지기도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마지막 초가 꺼지면, 담당자가 그 초를 제단이나 커튼 뒤에 숨기거나 아예 예배실 밖으로 옮기는 행위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숨지신 후에 십자가에서 내려지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며 참여자들은 마치 당시 그 장면을 목격한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현재적인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는 성 금요일 예배 때 예수님의 수난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극적인 영상이나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테네브레는 단순히 성서 말씀을 봉독하고, 찬송으로 응답하며, 보조적으로 어둠 속에서 단순한 상징들을 사용하지만 참여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수난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속에서 사건으로 경험하도록 초대한다.

 

영락수련원에서 성 목요일에 테네브레를 드린지 벌써 여섯 해가 되었다. 목요일을 택한 이유는,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본교회에서 기도회가 있기 때문에 비어 있는 목요일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고난주간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날이어서, 영락수련원의 성 목요일 예배는 (1) 말씀의 예전, (2) 성찬의 예전, 그리고 (3) 암흑의 예전(테네브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 중 암흑의 예전은 테네브레의 핵심 개념과 특징들을 살리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우리의 상황에 맞게 구성하여 실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회중 찬송을 중요시한 개신교 전통을 살려 복음서 말씀 봉독 후 함께 부르는 찬송이나 악기 연주를 통해 말씀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원래 테네브레는 대부분의 순서들이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우리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성도들도 봉독자와 연주자로, 그리고 회중 찬송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매년 같은 형식이지만, 봉독되는 말씀과 음악과 예전 장식 등은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다.

 

나는 올해 성 목요일 예배를 준비하며, 나 자신이 수련원의 다른 어떤 사역보다도 이 일에 더욱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도 정말 바쁜 중에도 많은 정성을 들여서 예배를 기획하였고, 봉독과 연주를 맡은 이들도 각각 자신들이 맡은 바를 기도하며 성실히 준비하였다.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나는 이제 준비한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좋은 프로그램이나, 실력 있는 연주자나, 능숙한 봉독자도 실제 예배 가운데 은혜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은 없다.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전한 선물이다. 인간적인 기획과 노력들은 모두 장작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가운데서 장작과 같이 불태워져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올해도 우리가 준비한 장작을 모두 태우셨다. 아니, 우리가 준비한 장작은 고작 한 묶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큰 불을 일으키셨다. 비록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으나, 그 불로 인해서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예배하는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함께 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서로 말로 나눌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앞서 내게 어둠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경험했다고 말씀하신 그 권사님께서 은혜를 나누어 주시기 전에도 그분에게 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초들이 꺼지면, 테네브레도 끝난다. 각자가 어둠 속에 머물다가, 침묵 가운데 돌아간다. 개인적으로 나는 테네브레의 모든 시간들 중에서도 이 시간이 가장 좋다.

 

어둠은 빛의 결여다. 그래서 암흑은 공허이며, 어두움이 깊을수록 공허도 깊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깊은 흑암과 공허 속에서도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1:2). , 하나님은 암흑 속에서도 충만하게 현존하신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공허는 공허보다도 더 깊은 충만함이 된다.

 

그렇게 한동안 완전한 어둠, 완전한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다 보면, 어느새 알 수 없는 평화가 마음속에 깊이 배어든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53:5).


 

〈월간 문화목회〉47(2024년 5월호), 19-23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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