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얼굴



그는 어린 시절 얼굴을 뺏겼다

이미 얼굴을 뺏긴 비딱한 형들이

그의 얼굴을 공처럼 차고 놀다가

잘 자라라고 낄낄거리며

도봉산 어두운 산기슭에 심었다

그때부터 그의 얼굴은 자라지 않았다

몇 년 후 고아원을 벗어나도

산 그림자는 늘 그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그러던 그의 얼굴이 세 번 변했다

하나님을 만나고 아들의 얼굴이 되었고

아내를 만나고 남편의 얼굴이 되었으며

딸을 만나고 아빠의 얼굴이 되었다


그의 얼굴은 아직도 변한다

어느새 눈물로 하얘진 억새가 자라고

바람이 지나가는 오솔길들이 생긴다

아무도 모르게 꿈꾸는 낮달이 뜬다


그는 이제 또 누구를 만나 

누구의 얼굴이 될까?


201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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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Halloween)이 다가오니 마켓에는 호박이 가득 쌓여 있고, 길을 걷다보면 기괴한 할로윈 장식을 한 집들이 쉽게 눈에 띈다. 그것은 할로윈 날 밤에 죽음의 신이 보내는 악령들이 사람을 해치러 왔다가, 집 앞의 무시무시한 장식들을 보면 무서워서 도망을 가기 때문에 해를 피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날 이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겠지만, 미국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로윈을 문화적인 놀이로 즐기는 듯하다. 물론 복음주의권에서는 이교 문화인 할로윈 파티에 거리낌을 느끼고, 추수 축체(harvest festivals)로 대체하기도 한다.


   


처음에 미국에 유학을 와서 산책길에 이런 풍경들을 봤을 때 신기하기도 하고 좀 섬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약 백 여년 전에 한국에 온 서양인 선교사 제임스 게일도 평안북도 용천 지역을 방문했다가 이와 비슷하게 섬뜩한 풍경을 목격했다.


용천에서는 한 특이한 풍습이 우리들의 관심을 끌었다. 나는 이런 것을 조선의 다른 데서는 본 일이 없다. 우리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더러운 주막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가능한 한 깨끗한 자리를 골라서 앉았는데, 그 후에서야 우리는 바로 머리 위의 마룻대에서 단검이라고 할 만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 때부터 계승된 관습인 것 같다. 그들에 의하면 만약 그 마을에서 누가 불길한 날에 죽으면, 그 혼령은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살아 있는 사람을 데려 갈 작정으로 남의 집에 들어간다고 한다. 집에 들어 갈 때에 망령이 마룻대를 흘깃 쳐다보는데, 거기에 달린 단검을 보면 겁을 먹고 도망간다고 한다. 그래서 단검이 집안 사람들을 구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7) 지음, 권혁일 옮김,《제임스 게일(서울: KIATS, 2012), 93-94.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죽음의 힘을 가진 어떤 존재가 자신들을 해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기괴한 장식물이나 무기로 악한 힘을 퇴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회는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에 대한 위협조차도 '조롱'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음을 정복하셨다! '할로윈(Halloween)', 곧 '모든 성인들의 날 전야(All Hollows' Eve)'라는 이름 자체에 그 승리와 소망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참조1, 참조2).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all saints)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죽음은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끌어 당기는 악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미신을 따라 천장에 단검을 매달아 놓을 필요도, 집 앞에다 기괴한 장식물을 달아 놓을 필요도 없다. 무시무시한 장식물이나 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령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오직 어떤 인위적인 것으로도 장식하지 않은, 그리스도를 향한 '벌거벗은' 믿음과 부활을 바라보는 검질긴 소망이 우리를 그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서양의 할로윈 문화를 수입하여 즐긴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특히 어린아이 교육 기관들에서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모든 성도들의 날 전야'라는 할로윈의 이름 뜻조차도 모르면서 '고급스러운 서양 문화'라고 생각하며 즐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많은 현대인들이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요란한 껍데기'로 그 두려움을 가리고, 얼이 빠진 채로 유흥(entertainment)을 즐기며 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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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설명 의무'와' 환자의 자기 결정권'



일반적으로 수술은 신체에 대한 침습(侵襲, Eingriff) 행위라고 말한다. 곧 수술을 한다는 것은 치료를 목적으로 신체에 어떤 손상을 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러한 침습에 정당성이 부여되기 위해서는 의사는 사전에 환자 또는 보호자에게 수술을 통해 예상되는 이득과 위험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이를 '의사의 설명 의무'라고 한다. 그리고 환자가 의사의 정확한 설명을 듣고 충분한 숙고 과정을 거쳐서 수술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일반적으로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의무와 권리는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의사의 설명의 의무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보통은 이 두 가지 의무와 권리에 대해 아는 환자나 보호자는 매우 드물다.


보통 수술과 같은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환자와 보호자는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게 되기 때문에 - 그러나 환자는 의사의 말을 비판적으로 경청해야 한다! - 의사는 더욱 더 책임감을 가지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정확하고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의료기관에서 이런 의무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의사 개인의 실수로 인해서 설명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기보다는 수술 성공여부와 상관 없이 수술 횟수를 의사의 경력과 업적으로 인정하는 의료계의 풍토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수술을 장려하는 병원 경영진의 상업주의적인 정신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아래는 한 논문을 참조하여 의사의 설명 의무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정리한 것이다. 참조로 아래의 내용은 명문화된 법적 조항들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의료소송에 있어서 재판부의 판단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의사의 설명 의무와 관련해서 의료소송을 진행하려고 한다면 관련 논문과 판례들을 많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박종렬(Park Jong-Ryeol) 김운신(Kim Woon-Shin). "의사의 설명의무와 손해배상 범위에 관한 연구 의사의 설명의무와 손해배상 범위에 관한 연구(A study on the Scope of Compensation for Damages and Informed Consent)." 법학연구, Vol.27 (2007).


1. 설명의 주체 - 처치 의사, 주치의, 또는 다른 의사를 통한 설명도 충분. 그러나 의사가 아닌 간호사나 사무직원이 설명하는 경우는 위반이다.


2. 설명의 대상 - 환자가 판단 능력이 있는 경우에는 환자 본인에게 설명해야 한다. (중대한 수술인 경우 보호자에게도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3. 설명의 시기 - 환자에게 침습의 중대성에 상응하는 의사형성을 위한 충분한 숙고기간을 고려하여 행해져야 한다. 따라서 중대한 침습의 결과에 대하여는 침습 바로 전, 특히 수술직전에 설명을 해서는 안 된다. 반면 경미한 침습이나 마취의 위험에 대하여는 침습 바로 전, 또는 전날 밤의 설명으로도 충분하다.


4. 설명의 범위와 기준 - 환자의 증상, 침습의 내용 등을 ‘분별력 있는 환자’가 자기결정을 위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지는 사정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5. 설명의 의무 위반의 입증 책임 - 논문의 저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환자 쪽에 있다고 본다. (실제적으로 담당 의사와 병원측에서 결정적인 증거 없이는 설명의 의무 위반을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설명의 의무 위반을 입증하기 위해서 환자쪽에서 의료기록, 의사와의 면담 녹취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6. 설명의 의무 위반과 침습 결과의 인과성

참조 : 의사의 설명 의무 위반을 인정한 법원 판례 http://blog.naver.com/hwa77778/10040102178




자신이나 가족이 암으로 수술을 고려하는 분이 있다면 아래의 기사를 꼭 참조하기를 권한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부친께서 암이 아니라, 암수술 후 병원내감염과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암진단을 받은 지 한 달여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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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8. 화.



이번에도 이삼일 하다가 말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몇 주째 저녁마다 줄넘기를 들고 나가서 운동을 한다. 이 여인을 십오년 동안이나 봐왔는데 아직도 한번씩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내가 아직 그녀를 다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또 그녀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 생활은 다 알 수 없는, 그래서 소유할 수 없는 서로에 대한 끝없는 탐구이다. 현실적이면서도 신비한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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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5. 목


정호승의 《여행》이라는 시집을 잃고 있는데, 시인이 부친을 여의고 난 뒤에 적은 시편들이 내게 적잖이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라는 시를 읽는데,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버님 면도도 해드리고, 손톱도 깎아 드리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던 시인이 참 부러웠다. 중환자실에 계시던 아버지께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 그래도 마음에 와닿았던 시 한 구절을 적어 놓자.


이슬이 햇살과 한몸이 된 것을

사람들은 이슬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

그러나 이슬은 울지 않는다

햇살과 한몸을 이루는 기쁨만 있을 뿐

이슬에게는 슬픔이 없다


- 정호승 <이슬의 꿈> 부분



2013. 9. 14. 토.


추석이 다가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명절. 오늘은 한국에 있는 동생 가족이 추석을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 놓은 추모관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아직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어린 조카는 종이에다 팥빙수 한 그릇을 그려서 유리장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옆쪽에서는 한참 동안 추모예배를 드리는 가족이 있었고, 그 소리를 들으며 동생네는 "아버님,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돌아왔다고……. 나도 잠자리에 누워 그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잠들었다.












2013. 9. 16. 월.


오늘은 어머니랑 평소보다 더 오래 전화통화를 했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가 마침 어머니께서 암의 전조를 설명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신 직후였다. 아버지에게도 그런 전조 중의 하나가 나타나서 지역의 중형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그냥 감기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짧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고, 병을 키운 것을 속상해 하셨다. 그래도……, 그래도……, 30여 분 동안의 통화 끝에 어머니께서 맺은 말은, 그래도 이제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어머니는 아픔과 그리움을 견뎌내고 계시다.



2013. 9. 18. 수.


여기 캘리포니아 시간으로 0시, 한국 시간으로 오후 4시, 부산과 서울, 그리고 이곳 버클리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두 컴퓨터 앞에 모였다. 그리고 화상통신을 통해서 함께 추석가정예배를 드렸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명절인데 나도 해외에 있고, 서울에 사는 누나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산에 내려가지 못한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동생 가족만 드릴 추도예배가 너무 허전할 것 같아 마음을 많이 쓰고 있었다. 아내는 내게 너무 마음이 안 좋으면 며칠이라도 한국에 다녀오라며 권했지만,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동생이 농담처럼 화상통신을 이용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것이 이렇게 실현되었다. 다같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같은 시간에 함께 연결되어 추도예배를 드리니 참 반갑고, 기뻤다. 아마 다음 명절에도 나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컴퓨터를 통해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겠지. 가족들과 만나 손도 잡고, 함께 밤새워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그런 명절이 얼른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추도 예배를 마무리하며, 아마도 작년 가을에 아버지께서 메모지에다 적어 놓으신 추석 인사말을 함께 읽었다. 

 

가을 하늘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

  가족과 이웃 간의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

  추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추석을 계기로 우리 가족의 마음의 상처들도 잘 아물어 가기를…….



2013. 9. 21. 토.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갑자기 연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외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니, 이산가족의 아픔을 백만분의 일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명절에도 화상으로도 만날 수 없고, 서로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그분들의 절망과 상처는 얼마나 클까? 이산가족 상봉을 두고 정치, 경제적 이해 관계, 자존심 등을 따져서는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