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교회 4부예배 주보 목회칼럼

2003. 5. 11.

 

세대통합예배를 통해 이루자

-간세대예배를 준비하며-

 

작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세대간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과 여러 사람들에 의해 많이 회자되고 있다이러한 세대간의 갈등은 사실 최근에 새롭게 생겨난 문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것인데최근에 와서 그것이 언론과 사람들에 의해 주목받으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문화의 변화가 갈수록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으며이와 함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의 변화가 가파르게 일어나고 있다그리하여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그리고 어린 세대의 간격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고함께 공감대를 이루는 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서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젊은 세대는 드럼과 각종 전자악기로 연주되는 빠른 비트의 찬양을 선호하고기성세대는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찬송가를 선호한다이런 양상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여러 교회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호소하고 있고또 갈등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도 성냥이 던져지면 금방이라도 불붙을 것 같은 갈등 요소들이 내재하고 있다.

 

서구도 이러한 문제로 몸살 앓기는 마찬가지이다30여년 전 헨리 나우웬이 쓴 책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에서 당시의 세대를 전통을 거부하는 세대로 정의하고 이런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사뭇 놀랍다그래서 최근의 미국교회에서는 이러한 세대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간세대 교육(Intergenerational Education)’의 개념을 도입하였다교회 교육을 통해서 세대간의 문화차이와 갈등을 극복하고 세대간의 화합을 이루려는 시도이다이러한 일련의 시도 속에서 나온 것이 간세대 예배(Intergenerational Worship)’이다용어가 생소하고번역체의 단어라서 더욱 어색하긴 하지만최근 한국교회에서도 이런 간세대 교육과 이와 더불어 간세대 예배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간세대 예배라는 말이 좋은 말은 아니다왜냐하면원래 예배가 세대별로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현재 교육적인 효율성을 위해 연령별로 부서가 나뉘어 지고부서별로 예배를 드리고 있긴 하지만원래 성경에서 예배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공간이였다그런데 간세대 예배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는 것은 그 만큼 현재 예배에서의 세대통합 기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이러한 기능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문화적 격차를 줄이고세대화합세대통합을 추구하는 간세대 예배가 필요하다.

 

올해 교회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에 있어서 이런 세대화합세대통합은 더욱 중요한 과제이다. ‘오고 가는 세대라는 올해의 기도제목 또한 오는 세대와 가는 세대를 구분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는 세대와 가는 세대의 연속성 속에서 다가오는 100년의 역사를 이어가고자 하는 뜻이다이런 의도 속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통합을 꾀하는 몇 가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그 중에서도 예배를 통한 세대통합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왜냐하면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공통으로 모인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교회에서 세대통합의 가장 근본되는 출발점은 이러한 공통된 신앙고백이어야 한다그리고 이런 신앙고백은 예배를 통해 생겨난다함께 부르는 찬양과 함께 듣는 말씀과 기도그리고 성례전 등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다이러한 공감대를 시작으로 해서 다른 갈등요소들도 주 안에서 해결해 갈 수 있다.

 

우리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어린 세대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기성세대와의 화합을 이루고어린 세대와의 연결점을 찾아 중간자 역할을 해야할 중요한 사명을 갖고 있다물론 화합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우리는 그 통로로 부르심을 받았다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번 간세대 예배를 기도하며 준비하자열린 마음으로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함께 예배 드리자가정 안에서의 세대화합이그리고 교회에서의 세대통합이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화해와 일치의 성령님에 의해 한 걸음 성큼 나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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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의 추천도서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The Selfless Way of Christ

 

헨리 나우웬 지음 / IVP / 3,500

 

지난 달 이재철 목사님의 《참으로 신실하게에 이어 두 번째로 추천 도서를 소개합니다. 이번 달의 추천도서는 헨리 나우웬의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영문 제목 ‘The Selfless Way of Christ’에 잘 나타나듯이 이 책에는 위로만 향해 올라가려는 세상을 조용하게 전복시키는 놀라운 제자도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실제로 헨리 나우웬은 예수회의 사제이자 심리학자로서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의 교수생활을 버리고 정신 지체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로 들어가 199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제자도를 몸소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저서는 전 세계에 걸쳐 널리 읽히며, 많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차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 목 차 ●●

1. 소명 : 하향성으로 부르심 - 상향성. 하향성. 영적인 삶

2. 시험 : 상향성을 향한 충동 - 상황부합의 시험. 이목 집중의 시험. 권력 확보의 시험

3. 자기비움 : 영적 성숙을 위한 훈련 - 교회훈련. 성경의 훈련. 마음의 훈련

 

문장이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고 분량 또한 80면의 얇은 책이라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오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읽으며 묵상해도 좋을 것입니다. 원래 이 책은 IVP에서 문고판으로 나온 것인데 올해 새로운 판형으로 선보였습니다. 문고판도 계속 나오고 있으니 저렴한 가격(1,500)을 원하시면 문고판을 구입하셔도 좋습니다. 이 책을 읽고 528()까지 예흔 출판부에게 독서감상문을 제출하시면 5월의 추천도서를 선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 본문 중에서 ●●

제자란 낮아지는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좇아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성공, 평판, 영향력을 구가하는 넓은 길을 선택하고픈 유혹을 받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하향성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다.십자가의 길, 즉 하나님의 하향성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살아 있는 그리스도들로 변화되기 때문에 우리의 길이 된다. 영적인 삶은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삶이다. 이 삶은 우리로 하여금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사로잡힌 가운데 자유롭게, 고통 가운데 즐겁게, 가난한 가운데 부유하게 해준다. 또한 상향성의 사회 한가운데 살면서도 구원에 이르는 낮아지는 길을 걸어가게 해준다.”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게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저자
헨리 나우웬 지음
출판사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2003-01-16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그리스도의 낮은 길을 따라서. 우리는 성공, 평판, 영향력을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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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의 추천도서


4월부터는 매달 한 권씩 추천도서를 선정하여 여러분들께 소개해드립니다.

책을 읽으시고,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까지 독서감상문을 제출하신 분에게는 모두 다음달 추천도서를 선물로 드립니다. 독서감상문은 A4용지 한 장 분량으로 줄거리 요약 없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점과 도전 받은 점, 그리고 지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점들을 적으시면 됩니다. 제출은 예흔편집부장에게 해 주시고, 채택된 원고는 예흔에 게재할 것입니다.

 

 참으로 신실하게

이재철 지음, 홍성사, 7,500.

 

이 책은 세 분의 청년사역자가 함께 추천하는 책으로 주 전도사님이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는 그 책입니다.

 

이 책은 이재철 목사님의 한국 청년들에 대한 애정 속에서 쓰여진 책으로, 저자 특유의 깊이 있는 통찰력과 문장력으로 말씀, 믿음, 구원, 등 신앙의 본질적인 주제들을 삶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아주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풀어내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 읽어 보세요.

 

구성은 아래와 같이 되어있습니다.

01. 말씀, 그 절대성

02. 믿음, 그 완전성

03. 구원, 그 영원성

04. , 그 현장성

 

내일을 위해 자신의 바탕을 닦고 있는 청년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령이 오염된 절대다수가 아니라 신실하게 깨어 있는 소수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늘 새롭게 하시며, 신실한 중심은 오늘, 청년의 때부터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책머리' 중에서

 

이번 달에 책 한 권을 사서 읽고, 독서감상문을 써서 제출하시면, 5월 추천도서를 선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매달 책을 한 권씩 읽고 독서감상문을 쓰면, 책 한 권을 투자해서 올 연말엔 9권의 좋은 경건서적을 소장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혼도 살찌우고 말이죠^^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게재




참으로 신실하게(믿음의 글들 191)

저자
이재철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02-05-17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늘 분주한 그대 걸음을 멈추게 할 청년 서신 그 두번째 유럽의 ...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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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교회 4부예배 주보 목회칼럼

2003. 3. 23.

 

억울하지만

 

중학교 때의 일이다그날따라 나는 쉬는 시간에 교실 안을 매우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담임선생님께서 내게 어떤 일을 맡기셨기 때문이었다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아마도 어떤 목적으로 급히 돈을 걷는 일이었다나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쉬는 시간짧은 10분 동안 쉬지도 못하고 교실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수업시작 종이 울리고 나서야 내 자리로 돌아왔다그 수업은 학교에서도 악명(?) 높은 한 선생님의 수업이었다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선생님이 들어오셨을 때 교탁 위에 누군가의 가방이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선생님은 아주 불쾌한 얼굴로 가방의 주인을 찾았다그 가방은 매우 낯익었다. ‘아뿔사!’ 나는 몹시 당황했다분명히 내 책상 옆에 걸려있어야 하는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아무래도 내가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는 동안장난치는 아이들의 발길에 채여 교탁 위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 같았다나는 앞으로 불려 나갔고선생님은 이유도 묻지 않고 나에게 몽둥이질을 해대기 시작했다그렇게 여러 대를 맞고 나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아파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눈물이 나왔다그러자 선생님은 내가 운다고 다시 또 나를 때렸다.

 

얼마 전 기도하다 갑자기 이 일이 생각났다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때 느꼈던 분노와 원망이 꿈틀거리며 터져나오는 것을 느꼈다벌써 15년이 지났지만난 아직도 그때 그 선생님과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 가방이 교탁 위에까지 올라가게 했던 친구들을 용서하지 못하고이글거리는 원망과 분노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게 사람들에게 조롱 받으시며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주님은 얼마나 억울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주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많은 특권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그리고 그분은 식사하실 틈도 없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병든 자를 고쳐 주셨으며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들에게 먹을 것도 주셨다그리고 나아가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그런데도 인간들은 전혀 그 고마움을 모르고떡을 받아 먹던 그 손으로 주님을 손가락질했으며호산나라고 외치던 그 입으로 주님을 조롱하고 저주하였다주님은 얼마나 억울하셨을까? ‘내가 저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라고 생각하시며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을그리고 천사들을 동원한 혁명보다 고난의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저들은 자기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 합니다라고 자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사람들을 전혀 원망하지 않으시고그들에게 분노하시지도 않으시고오직 끝까지 자신을 사랑과 용서의 제물로 드리셨다예수님에 비하면 나는 억울한 것도 아니다그리고 나는 나의 추악한 죄로 오히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했던 장본인이 아니던가?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감당치 못할 분노와 원망으로 몸부림칠 때가 있다그럴 때 누구보다도 억울하셨으면서도전혀 원망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던 주님을 생각하자그리고 주기도문의 한 구절로 이렇게 기도하자. “자비하신 주님주님께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저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해 주시옵소서비록 억울하고 원망스럽지만주님께서 저에게 대하여 그러하셨던 것처럼저도 사랑과 용서의 맘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오늘 사순절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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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는 사람, 사랑 주는 사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찬양이 처음 나왔을 때가 생각이 난다. 그 가사에, 그 선율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부르고 또 불렀고, 많은 지체들이 이 찬양을 통해 축복을 받으며 주루룩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외모나, 학력, 능력 등으로 평가받는 세상 속에서, 늘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인식의 전환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연민과 상처를 떨쳐버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지난 겨울수련회와 예배 때 이상호 목사님을 통하여 계속해서 들었던 말씀이 바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이 감격스러운 말씀이 아니었던가?


나는 분명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명성이나 훌륭한 행동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은 우리를 직접 지으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행동이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존재 자체로 인하여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려고 자신을 혹사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강박관념은 전혀 가질 필요가 없다. 또한 그 사랑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도 전혀 없다. 다만 그분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을 누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인식에서만 그치게 된다면, 우리는 아주 이기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내가 사랑을 받는 자라면, 동시에 다른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깨달음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 역시 아무런 조건 없이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짜증나게 하는 그들을 판단하고 미워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원래 그래!’라고 생각하며 아예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각이 다르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한일서 4:12)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 역시 사랑 받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서로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리는 통로가 될 때,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지체에게 흘러가고 그리고 지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 들어온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공동체 안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진다. 지난 주에 쓴 글처럼 우리 공동체가 치유공동체로 세워지는 것도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로 자신을 열 때 가능하다. 상상해보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사랑의 통로가 되어 우리 안에,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장면을... 정말 가슴 벅차지 않는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교회의 벽을 뛰어 넘어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찬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다 이 찬양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가 그 후편(?)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이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우리 청년1부 공동체와 또 각자의 삶의 자리에 심으신 것은 바로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임을 명심하자.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아름다운 또 하나의 열매를 맺어 가실 것이다.


2003. 2. 23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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