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 기도주간을 얻었다. 홀로 한적한 곳에 들어가서 며칠 보내고 싶었으나, 여름 동안 여러 가지 사역들로 집을 많이 비웠기 때문에, 올해 기도주간은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낮에는 아무도 없으니, 저렴한 비용으로 고독을 즐기기에 이만큼 적합한 장소가 또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아내에게 인사하고, 아이를 준비시켜 유치원에 보낸 후,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지난 여름 만난 사람들, 있었던 일들로 인해 복잡한 마음을 하나하나 정리한다. 특히 안타까운 교인들의 사연과 포이메네스 영성수련에서 만난 목사님들의 모습이 진한 안개처럼 부유한다.

 

내일은 여름이 지나가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處暑)이다. 옛날 선비들은 이 무렵에 여름 장마에 젖은 책을 그늘에서 말리는 음건(陰乾)이나 햇볕에 쬐이는 포쇄(曝曬)를 했다고 한다.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책상에 앉아 서가에 꽂힌 채 먼지 앉은 책들을 바라본다. 책 한 권 한 권에 얽힌 추억들이 생각나고, 그 책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기도주간을 보내며 눅눅해진 책들과 젖은 마음을 꺼내어 놓고 나름의 음건과 포쇄를 해야겠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당분간은 페이스북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고, 카카오톡에서도 사라지리라.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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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보자, 헌금을 낼 돈이 있나?"

 

토요일 저녁, 주일 헌금을 준비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엄마랑 책을 읽고 있던 아이가 엄마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하나님한테 기도해서 부자 되게 해달라고 하자."

 

아내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부자가 되고 싶어?"

 

그러자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우리 돈이 많이 없잖아."

   "돈이 많으면 뭐하고 싶어?"

 

다시 아내가 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들기 전, 아이에게 말했다. 

 

   "돈은 많이 없어도 돼. 꼭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괜찮아."

 

그리고 아이를 안고 기도했다. 

 

   "하나님, 저희에게 필요한 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세요.

    오늘밤, 저희 가족 편히 자게 해주시고

    내일 주일 예배 기쁘게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이도 "아멘"을 했는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깊은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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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 읽기 |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 묵상하기 | 
 

 

오늘 본문 마가복음 9장 41절과 42절을 예수님께서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말씀하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둘을 이어서 배치해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구절에는 서로 연결되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41절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시며, 당신께 속한 이들을 환대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이어서 42절에서도 주님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실족하다,’ 곧 ‘발을 헛디디거나 행동을 잘못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참된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연자맷돌은 여인이 가정에서 손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귀가 돌리는 크고 무거운 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극단적인 형벌이자, 시신도 수습하여 장사 지낼 수가 없는 비극적인 죽음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을 이렇게 처벌하라는 사법적 명령이 아니라, 아예 주님을 믿는 작은 자 하나도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강력한 윤리적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께 속한 자, 당신을 믿는 자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고,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해 주십니다. 비슷하게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다 된 것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13:1).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아끼시고 챙기시는 걸까요? 그것은 그저 어떤 조직이나 계파의 수장들이 하는 ‘자기 사람 챙기기’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 힘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크게 여기고 예수님을 무시하며 배척했습니다. 주로 힘이 없거나 약하고 소외된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킬 힘이 없는 그들을 위해 대변하시고,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여, 그들에게 작은 친절이라도 베푸는 것은 반드시 상을 받을 만한 훌륭한 행동이지만,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단 채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나을 정도의 엄청난 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지위 고하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스스로 힘이 있다 생각하고, 스스로를 크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작은 자임을 깨닫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주님은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내 마음에서는 어떤 감정이 일어납니까? 기쁨이나 안도감이나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나 그 무엇이든 주님께 솔직하게 말씀 드리고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 기도하기 | 

 

 

| 바라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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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묵상하기 | 
 

 

지난 주 본문(마9:36-37)에 이어 이번 주 본문에도 예수님의 이름에 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선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이서 오늘 본문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는 사건이 보도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무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지 말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그 사람은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내어쫓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귀신에게 제압당하여 도망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참조하면, 제자들이 금지시킨 그 사람은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고, 그분의 이름에 담긴 능력을 의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이를 “금지시키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시며,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한” 그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지 못하도록 금지 시킨 이유는 그가 ‘우리를 따르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의 무리를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리, 집단, 파벌을 중시 여기고, 마치 기득권 집단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사유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질투하고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특정한 무리나 집단의 소유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해 오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이나 계시나 은사를 자신들의 집단만의 것으로 사유화하고 배타적으로 행했던 이들이 있었지만, 그 결말은 모두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천 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리스도교 안에는 다양한 전통과 교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경계하고 물리쳐야 하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을 향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 한그릇이라도 대접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환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존중하는 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 이야기 속의 예수님의 제자라면, 나와 같은 무리에 속하지 않은 어떤 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습니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고, 그것에 대해 주님과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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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 묵상하기 | 
 

 

예수님께서는  서로 누가 크냐 다투던 제자들 앞에 한 어린아이를 데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다정하게 안으셨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그들이 머물던 집안 한 구석에 있었거나, 아니면 누군가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복해주시길 바라며 데리고 와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 아이에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예수님과 그 품에 있는 아이에게 쏠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리고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이런 아이 하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가장 약한 존재이자, 가장 가볍게 여김을 받던 존재였습니다. 더욱이 당시 제자들의 시선은 스스로 으뜸으로 여기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거나, 경쟁자로 여기는 동료들을 의식하느라 어린아이와 같이 작고 힘없는 존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높아지려던 욕망으로 가득 차고 자기중심적인 그들의 시선에 아이들은 전혀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대의 어른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 역시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당대 사회의 가치관과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으로 굳어진 그들의 사고를 마치 망치로 내리치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나에게 깨달음을 촉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제자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나의 부끄러운 초상화는 없습니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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