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주후 2004년 11월 26일



믿음의 차이

왁자지껄한 거리,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몰려 들었다. 마치 인기 연예인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든 젊은 소녀들과 아이들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을 둘러싼다. “이에 함께 가실 때에 큰 무리가 에워싸 밀더라(막5:24)

그때 갑자기 예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돌아보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문하였다.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실로 그랬다. 많은 무리가 떠밀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고의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지 아니면 부딪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주위를 돌아보셨다. 

그때 한 여인이 두려워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자기가 옷을 만졌음을 시인했다. 그 여인은 무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많은 의사들을 찾아가 보았고, 고생도 많이 하고, 치료비로 재산도 다 쏟아 부었으나 낫지는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그 안에 다시 희망이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을 거야” 당시 그녀는 혈루병으로 인해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받아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몰래 사람들 틈에 섞여서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막5:29)

여인은 두려워하였다. 부정한 자신이 허락없이 주님의 옷에 손을 대어 그분께 크게 야단을 맞지 않을까, 혹시 나은 병이 다시 도지지 않을까 떨었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한 음성으로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막5:34) 예수님은 불쾌해 하지도, 그 여인을 혼내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그 가련한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에게 구원을 주시고, 건강을 주셨다. 두려워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셨다. 

그날 그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마 그 복잡한 틈 속에서 주님은 여러 사람들과 몸이 부딪혔을 법도 하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또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유독, 이 혈루증은 앓던 여인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또 그 여인은 치료를 받았다. 무엇때문인가? 예수님과 몸을 부딪히고 옷깃이 스친 다른 많은 사람들과 이 여인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예수님의 옷이 아닌 예수님을 직접 만진다고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군병들이 그러지 않았던가?

이어지는 마가복음 6장 1-5절은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막6:3)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몇몇 병자만을 고치시고 별다른 일을 하지 않으셨다.(막6:5) 그러나 마가복음 6장 53-56절에는 또다른 사람들이 나온다. 아마도 혈루병 앓던 여인이 고침받은 소문을 들었을 법한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예수가 어디에 계시든지, 병자들을 침상에 눕혀서 그 곳으로 데리고 오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막6:55-56절)

이것은 믿음의 차이이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믿음이 있을 때 그 결과는 달라진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주님께서도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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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총회 백 배 즐기기!

 

 

11월 이맘 때가 되면, 교회마다 부서마다 정기총회로 모여 한 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준비하게 된다. 특히 이 정기총회를 통해서 다음해의 임원을 선출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이번에는 누가 임원이 될까?’라는 궁금증과 내가 임원이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또는 부담감으로 정기총회를 맞이한다. 그러나 우리가 매년마다 정기총회를 열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임원을 선출하는 것 이상의 정기총회의 의미는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오늘의 정기총회 그 의미를 알고 하면 더욱 유익하지 않을까?


정기총회는 회칙에 의거하여 일년에 한 번, 정한 때에 청년부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함께 모여 사업보고, 회계보고, 임원개선 등의 여러 가지 회무처리를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총회는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회의로서의 총회’, 그리고 모임으로서의 총회의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회의로서의 총회는 청년부(공동체)의 중요 안건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보통의 안건들은 임원회에서 처리하지만, 1년의 사업보고와 계획, 그리고 회계보고와 예산안 등은 총회(정기총회, 임시총회)를 통해서 확정되어 진다. 이 안건들을 모든 회원들이 모인 총회에서 다루는 것은 그 만큼 청년부의 한 해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를 사회의 근간으로 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투표라는 방법을 통하여 다음 해의 임원을 세우는 것 또한 총회의 중요한 회무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외에 청년부(공동체) 전체에 관련한 중요한 사안이 있다면 임원회(또는 다수의 회원)가 미리 안건을 제시하여 토의하는 안건토의’, 그리고 즉석에서 의견을 받아 토의하는 기타토의가 있다. 안건토의기타토의는 매 분기마다 분기회를 통해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청년부의 중요한 사안들에 대하여 회원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사실 이까지만 알아도 정기총회를 지루한 회의가 아닌, 의미있는 시간으로서 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이상의 것이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행하는 총회라는 형식과 방법은 엄밀하게 이야기해서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절대성을 인정하는 신본주의(神本主義)’이지만, 총회는 민주주의 제도가 뿌리를 두고 있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중요한 결정은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이 내리는 것이 바로 총회이다. 그러면 교회에서 총회는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도 1년에 한 번, 여러 교회와 노회에서 파송된 총대 목사님, 장로님들이 참여하여 총회를 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총회를 열되 세상에서 하는 것과는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차이는 바로 하나님의 절대성과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총회를 할 때는 사람들이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비록 사람들이 투표, 또는 표결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제비뽑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셨다면, 지금은 투표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신다. 이러한 신본주의의 원리는 모든 회무순서에 적용된다. 사업보고와 계획은 지난 한 해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와 함께 하심을 감사하고, 또 다음 해를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손에 맡기는 시간이다. 회계보고는 지난 한 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심을 감사하고, 또 앞으로의 한 해의 필요를 주님께 맡기는 시간이다. 그리고, 안건토의와 기타토의는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시간이며, 임원선출은 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세우는 시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으로서의 총회의 의미이다.


교회의 총회는 세상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야 한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교회의 총회 역시 세상의 총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알고 우리가 총회에 참여할 때에 총회를 백배 감사하며 즐겁게 치룰 수 있다.


2004. 11. 13.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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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의 추천도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오래된미래, 11,000>


얼마 전 아내가 기차여행 중에 읽으려고 샀다며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이 책은 배우 김혜자 씨가 기독교정신에 바탕을 둔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젼(World Vision)의 홍보대사로서 지난 12년간 에디오피아, 소말리아, 르완다, 방글라데시, 아프카니스탄, 인도 등의 기아지역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을 사진과 함께 글로 적어낸 책이다.

 

김혜자씨는 특히 어린아이들과 여성에게 주목한다. 그도 그럴것이 전세계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대부분의 이들이 여성과 아이들이다. “해마다 6백만 명의 아이가 다섯 살이 안 된 채 굶주림으로 숨져 가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 어린이 15천만명이 극심한 영양실조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책 속에는 기숫아와 질병에 관한 수 많은 통계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저 자가 아니라 실제로 수 많은 생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음을 강조한다.

책을 쓰려고 13개월 동안 집에만 붙박여 있었어요. 고통의 땅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단지 숫자와 통계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제 가슴에 담아온 생생한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 책을 썼습니다. ”

 

이 책은 기아상황에 대한 보고 외에도 그러한 참상이 일어나게된 정치적, 문화적 배경들 또한 요약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책 속의 나라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저자가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신데 왜 이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바른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때로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색채를 엷게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 책의 가치를 아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부디 사랑하는 우리 청년들이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리고 느꼈다면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바란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을 도울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전히 그들을 도울 힘이 내게 남아 있음을 나는 안다.”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게재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저자
김혜자 지음
출판사
오래된미래 | 2008-10-2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가난과 전쟁, 내전의 피해자인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보고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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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교회 4부예배주보 목회칼럼.
주후 2004년 10월 31일

 

                                        겨울이 오기 전에

 

간혹 차를 타고 한강다리를 건너다가 ‘갑자기 다리가 무너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는 전철을 타고 다니다가, ‘갑자기 전철에서 불이 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전철 안에 있는 소화기와 문을 수동으로 여닫는 손잡이의 위치를 눈여겨 본다. 내가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은 걸까? 그러나 몇 년 전 성수대교 붕괴와 대구지하철참사를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언제 또 그런 일들이 나에게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국제적인 테러단체들로부터의 테러 위협을 공공연히 받고 있는 때가 아닌가? 이렇게 만일의 사태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신속하고 적합하게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위기의 상황 속에서 나 혼자 살겠다고 긴 다리를 이용해 제일 먼저 도망치지는 않으리라고 다짐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내가 생각해보고 대처할 수 있는 사고의 경우란 고작 몇 가지 정도일 뿐이다. 원래 사고란 생각지 않은 때에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라 아무리 철저히 생각하고 대비해도 그 정도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이런 유형의 사고 뿐만 아니라 무형의 위기들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다. 질병, 실직, 가정불화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데에는 수많은 위기들이 지뢰밭처럼 도사리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그도 역시 살면서 수많은 환란을 만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섬겼던 임금에 의해 수없이 죽을 뻔 하고 광야로, 타국으로 쫒겨 다녀야 했다. 그리고 그가 임금이 된 이후에도 자기가 낳은 아들에 의해 두 번이나 반역을 당하고 쫓겨 다녀야했으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환란을 겪었다. 그래서 다윗은 ‘위기’ ‘환란’ ‘불의의 사태’ 등에서는 전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가 시편 32편 6,7절에 자신의 노하우(know-how)를 공개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란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홍수가 범람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거세게 쏟아져 내린다. 잠수교는 물론, 이렇다할만한 한강다리들도 모두 잠겨가고 물은 도로로 집 안으로 넘쳐흐른다. 사람들은 모두 물을 피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느라 아우성이다. 가재도구는 물론 귀중품도 미쳐 챙기기 못한 채 겨우 몸만 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이 홍수가 한 밤에 일어나면 사람들은 자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얼떨떨하다 못해 두려운 표정으로 모두다 떨고 있다. 골목마다 주차된 자동차들도 간신히 천장만 보이고 미처 피하지 못한 애완동물들이 물 속에서 허우적 거린다.

내가 만약 이런 상황 속에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놀라고 두렵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시편32편 6,7절에서 다윗은 경건한 자에게는 그 홍수의 두려운 물결이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는 주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도의 사람은 주님께서 자기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가운데 자신을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안다. 굳게 믿고 주님을 신뢰한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요동하지 않고, 담대하다.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위기들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르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시32:8)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닥칠 모든 위험에 가장 확실히 대처하는 방법은 바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때에, 그 모든 순간에 기도하며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반석으로 삼아야 한다. 내 안에 있는 경건치 못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 맡겨 드리고 늘 주 앞에서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렇게 살 수 없다. 

가을이 빠알갛게 익어간다.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의 기도도 깊이 익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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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주후 2004년 10월 30일

‘할 일’을 찾기 전에


 

“만일 내가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갈거야. 그곳 사람들에게 ‘내가 곧 갈게’ 하고 말할 거야. 그래서 그들이 내미는 그릇들을 물로 가득 채워줄 거야.” 인도 소녀 수미트라가 쓴 글입니다. … 만일 내가 비라면 나도 수미트라와 함께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음식이라면 모든 배고픈 이들에게 맨 먼저 갈 겁니다.

- 김혜자(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모금 연설에서) 김혜자,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미래, 2004년), 9쪽에서 재인용.



고등학교 시절,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이다. 당시 입시를 앞둔 현실이 좀 버겁기도 하였지만, 나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알고 싶었다. 그 당시 ‘당장 죽어도 난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고통과 슬픔과 무거운 짐이 많은 이 땅에서의 삶을 연장하는 것보다 지금 죽어 천국에 가는 것이 내게는 훨씬 유익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자칫 잘못하면 현실도피로 빠질 뻔한 이 생각의 끝에 내린 결론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당시 중·고등부 문집에 실렸던 교회 목사님의 인터뷰와 또 여러 가지들이 이런 결론을 내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것은 또한 신앙의 선배 바울 사도의 고민이자 결론이기도 했다.(빌1장 22-24절)


이후로 나는 내가 이땅에 살면서 해야할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회개혁’인 줄로 알았다. 그래서 언론에 뜻을 두고 대학신문기자를 하기도 하고, 그리고 문학에 뜻을 두고 열심히 시를 읽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통해 ‘사회개혁’ 이전에 ‘사람을 바꾸는 것’이 나의 ‘할 일’임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난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다. 교회에서 청년들을 ‘전도사’라는 직분으로 섬기고 있다. 그런데 아직 나의 ‘할 일’ 즉 ‘사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본질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위의 한 인도 소녀가 말한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비’가 본질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물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옷’이 본질적으로 해야할 일은 헐벗은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이 본질적으로 해야 할 일, 곧 사명은 굶주린 이들에게 가서 그들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본질’ 즉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즉 내가 누구인가에 따라 내가 어떤 일을 해야하는가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소방관은 불을 끄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이 할 일이다. 요리사는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사명이다. 공무원은 맡은 분야에서 공정하고 지혜롭게 행정을 처리하는 것이 사명이다.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입학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도 1년정도 학원강사를 해보았던 터라, 저녁시간을 활용해 파트타임으로 일하리라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막상 신대원에 입학하고 보니 해야할 공부와 사역이 정말 많았다. 그것만해도 다른 데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물론 재정적 필요도 있었지만, 난 결국 아르바이트를 포기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학원 강사’로 일하는 것은 나의 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하면 재정에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되겠지만, 공부와 사역은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원강사가 아닌, 신학생이며 전도사였다. 그래서 난 재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나의 본질적인 사명인 공부와 교회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감사하게도 3년 동안 한 번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미뤄본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여러 방법으로 채워주셨다.

많은 사람이 ‘나는 어떤 일을 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많이 질문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해야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내가 해야할 일’이 결정된다. 그것이 나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과 본질적인 사명은 결코 하나님과 떠나 결정되어 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창조자이시고, 지금도 내게 생명을 공급하고 계시는 주인이시자,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이고 나는 어떤 일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찾기는 항상 주님 안에서 진행되어져야 한다. 그러할 때 내가 서지 않아야 할 곳에 서고, 내가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된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보면 참 간단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참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 어리석은 질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삶의 뿌리를 지탱해 주는 아주 본질적인 요소이며, 과정이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고 넓은 것부터 시작하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주님의 제자다’라는 기본적인 명제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조금씩 질문의 폭을 좁혀가며 구체적으로 주님께 질문하라. ‘주님 저는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해주신 모든 경험과 지식, 그리고 재능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장 13절)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 어떤 소원을 두셨는 지를 알아보는 것도 유익하다. 어떤 일이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가 찾아 보자.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욕망과 하나님께서 두신 소원을 분별하는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기준으로 삼아 기도하고 묵상하며 신중하게 분별해 나가야 한다.


조급하지 않게, 인내하며 주님의 대답과 인도하심을 기다리자. 그러면 주님의 때에 분명히 말씀하시고 보여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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