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저.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역. 서울: KIATS, 2011.





베네딕트의 규칙서

저자
베네딕트 지음
출판사
KIATS | 2011-08-1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5세기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베네딕트가 청빈, 순종, 순결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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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서 읽기 길라잡이

《베네딕트의 규칙서》:

천국을 향한 공동체 여정의 이정표

 

 

왜 고대의 수도원 규칙서를 읽는가?

문학에서 고전古典은 그 작품이 쓰여진 시대와 장소를 넘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작품을 말한다이런 의미에서 《베네딕트의 규칙서 Regula Sancti Benedicti》는 기독교 영성의 고전이라고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이 작품은 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c.480-c.547)의 지도 아래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을 위해서 쓰여졌다그리고 이 규칙서는 지난 1500여 년 동안 수도원 안팎에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왔고또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베네딕트의 규칙서》가 기독교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무엇보다 이 책의 기록 목적과 규칙의 유연성이 중심적인 이유 중의 하나이다‘규칙’을 뜻하는 라틴어 레귤라regula는 여행자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길의 울타리,’ 또는 행동과 삶의 잣대를 의미한다베네딕트의 규칙은 수도사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한 딱딱한 규범이 아니라단순하고 순수한 영성생활을 통해 천국을 향한 수도사들의 영적 여정을 안내하기 위한 이정표와 지침이다.서문 제45-50

베네딕트는 이 규칙이 문자적으로 적용될 것이 아니라각 수도원이 처한 기후와 환경그리고 수도사 개인의 영적육체적 조건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대부분의 규칙은 수도생활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수도원장의 판단에 따라 적절하게 변경될 수 있으며더 나은 것으로 대치될 수도 있다이러한 규칙의 유연성은 오늘날 전 세계의 수도원 안에서 사는 이들은 물론 수도원 밖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베네딕트 영성의 유산을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수도원주의의 발달과 《베네딕트의 규칙서》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서방기독교 수도원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기독교 수도원의 역사는 4세기 초 이집트의 사막에서 시작되었다. 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Diocletianus 치하에서는 많은 이들이 혹독한 박해를 피해 사막으로 도망쳤다그런데 313년 콘스탄틴 황제Constantine the Great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는 당대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순교’를 찾아서 이집트의 황량한 사막으로 나아갔다.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에 따르면 4-5세기에는 “사막에 도시를 이룰 정도로 많은 수도사들이 이집트의 사막에서 은둔형 혹은 공동체형 수도원을 만들어 수도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렇다고 당시 사막의 수도사들이 세속 도시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그들은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처럼 교회에서 ‘영웅’으로 인식되며로마제국의 종교적 관용으로 인해 신앙이 느슨해진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이 같은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와 수도원 이야기는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의 생애 Vita Anthonii》와 요한 카시아누스Johnnes Cassianus의 《제도집 Institutes,《담화집 Conferences》과 같은 글과 종교-문화적 접촉을 통해 서방교회의 수도원 발달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갈리아Gaul와 팔레스타인로마가 지배한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수도생활의 이상을 추구하였다그리고 이러한 수도원 전통의 유산들이 축적되어 6세기《베네딕트의 규칙서》로 꽃피어났다실제로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사막 교부들의 생애와 금언집Apothegmata히에로니무스Hieronymus암브로시우스Ambrosius of Milan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바실리우스Basilius of Cappadocia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특히 《베네딕트의 규칙서》보다 조금 앞서 쓰여진 《스승의 규칙서 Regula Magistri》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베네딕트는 자신의 규칙을 토대로 서구 수도원제도의 기초를 놓으려 하거나 자신만의 수도회를 창설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의 규칙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융통성과 온건한 금욕적 수행그리고 균형 있는 생활규율 등으로 인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이후 8세기 후반과 9세기 초에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는 베네딕트의 규칙을 자신의 카롤링거 제국에 속한 수도원의 공식적인 규범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 10세기에는 베네딕트의 규칙을 사용하는 수도원들이 연합하여 베네딕트 수도회Benedictine Order를 창설하였다이후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중세에 수도원이 타락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는 물론 수많은 수도원개혁의 과정에서 신앙적 활력과 기준을 제공해주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베네딕트 수도원들은 영국성공회와 스웨덴 루터교 안에도 세워졌으며오늘날 전 세계에 약 3만 여명의 수사와 수녀가 베네딕트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고 있다.

 

베네딕트의 생애

베네딕트의 생애에 관해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그의 사후 약 50년 경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the Great가 자신의《대화집Dialogues》제2권에 남겨둔 베네딕트의 생애Vita Benedicti가 전부이다물론 그레고리우스의 성인전聖人傳이 오늘날의 전기biography의 개념으로 베네딕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그는 다만 “하나님의 사람” 베네딕트의 거룩한 성품과 영적인 특징을 묘사하고 이것을 통해 자신의 의도한 교훈을 교회와 이탈리아 사회에 전달하고자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기록에 따르면 베네딕트는 480년 이탈리아 중부의 누르시아Nursia라는 지방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그는 어린 시절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그런데 당대 사회의 방탕함과 무의미한 생활을 목격한 그는 13세가 되던 493년에 로마를 떠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그는 처음 1년은 엔피데Enfide에서 다른 금욕주의자들과 같이이후에는 수비아코Subiaco의 산 위에 있는 동굴에서 약 3년 간 홀로 기도와 금욕훈련에 매진했다그는 악마의 유혹과 육체의 정욕을 이겨내기 위해 심지어 쐐기풀과 들장미 덤불 속에 들어가 그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그의 종교적 생활이 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는 수비아코의 한 수도원장으로 부름을 받았다하지만 베네딕트의 엄격한 삶의 방식은 평이한 삶을 원하는 그곳 수도사들의 기대와 상충했고그는 다시 동굴로 되돌아갔다그러나 그의 종교적인 거룩함에 대한 평판과 기적에 대한 소문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그는 수비아코에서 약 19년 동안 열두 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하지만 이것은 곧 지역 사제들의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이를 피해 베네딕트는 529년경에 로마와 나폴리Naples 사이에 있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로 옮겼다그는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적용하여 이방신을 섬겨오던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사들을 지도하였다《베네딕트의 규칙서》가 기록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그는 수도사들의 삶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가뭄이 극심할 때는 수도원의 식량을 풀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등 수도원 밖의 사람들에게도 많은 자비를 베풀었다.

베네딕트의 죽음은 그의 기도하는 삶의 아름다운 절정을 보여준다그는 547 3 21일 몬테카시노에서 형제들의 부축을 받아 서서 기도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그레고리우스 1세는 베네딕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규칙서는 자신이 살았던 삶의 방법과 양식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생애와 대화[가르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베네딕트의 규칙을 통해 그의 삶의 방식과 훈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거룩한 사람[베네딕트]은 그가 가르친 것을 모두 삶으로 살아 내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의 《대화집》 제2권 제36)


《베네딕트의 규칙서》의 내용과 주요 주제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규칙을 제정한 의의를 설명하는 서문과 수도원에서의 각종 제도와 생활규율 등을 설명하는 7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서문에서 제7장까지는 《스승의 규칙서》와 아주 많이 일치하는 부분으로수도사의 종류(1)와 수도원장(2-3), 그리고 영적성장을 위한 훈련방법(4-7)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며 글 전체의 도입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전 도입부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규칙을 다루고 있다전체를 간략히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전례규칙과 자세(8-20), 직책과 역할(21, 31-32, 38, 47, 57, 62-66), 입회책벌파문(23-30, 42-46, 58-61), 노동과 각종 생활규칙(22, 33-37, 39-42, 48-56, 67-72), 끝맺는 말(73)로 이루어져 있다.

 

상호적인 사랑에서 솟아나는 순종

“들으라나의 아들아”라는 권고로 시작하는 서문은 이 글이 법률적 문서보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 전통잠언 1:8, 4:1 참조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실제로 베네딕트는 규칙서에 기록된 가르침들을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는 사랑의 교훈에 비유한다그러므로 자녀들은 이 가르침들을 주의 깊게 듣고마음으로 받아들이며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서문 1.

이러한 지혜문학으로서의 글의 성격은 베네딕트회의 3대 서약 중의 하나인 ‘순종’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와준다즉 베네딕트에게서 ‘순종’은 권위자의 일방적인 명령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오는 맹목적인 반응이 아니라영적인 부모와 자녀 사이의 상호적인 사랑과 신뢰에서 자라나는 미덕이다수직적인 관계에서 이렇게 형성된 순종은 나아가 수평적인 관계로 확장된다베네딕트는 그의 규칙서 끝부분에서 수도원장과 수도사 사이뿐만 아니라수도사들 사이에서도 상호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71.1, 72.5이와 같이 순종은 겸손과 더불어《베네딕트의 규칙서》의 처음과 마지막을 꿰뚫으며 모든 규칙을 하나로 묶는다이런 점에서 베네딕트의 순종은 효를 모든 행위의 근본으로 삼는 동양의 유학儒學의 가르침과도 통한다예를 들면유학에서도 부모의 사랑에 대한 자녀의 사랑의 반응이 효라고 가르친다부모와 자녀의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효가 형제자매와 친구와의 수평적인 관계로 확장된 것이 우정이다.

또한 순종은 발전시켜야 하는 미덕인 동시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영성훈련의 효과적인 방법이다‘순종’을 뜻하는 라틴어 오보에디레oboedire는 어원적으로 ‘듣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곧 순종은 수도원장이나 다른 형제들의 말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다그래서 베네딕트는 수도사는 상급자의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실행해야 하며상급자에게 보여준 순종은 곧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고 말한다5.4,15이처럼 순종의 훈련을 통해서 수도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귀를 열어놓게 되며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된다.

 

겸손환대그리고 자비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순종과 마찬가지로 겸손은 《베네딕트의 규칙서》의 기초를 이루는 미덕이며 동시에 영성훈련 방법이다7장에는 겸손의 열두 단계가 기록되어 있는데베네딕트는 겸손을 인간이 몸과 영혼즉 전인적으로 성장해가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제시한다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죄에 관한 욕망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그리고 두 번째부터 일곱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는 수도사는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고자신의 뜻을 버리며죄를 고백하고인내하는 가운데 순종하는 것을 배운다그리고 여덟 번째부터 마지막 단계는 겸손을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충실하게 나타내는 과정이다겸손의 단계를 모두 거치면 수도사는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이 사랑은 또한 수도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을 연합시켜서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것처럼 즐거이 준행하게 만든다이런 의미에서 겸손의 사다리는 수도사를 금욕적인 삶 또는 능동적 삶의 정점으로 인도한다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사랑 깊은 연합이 곧 베네틱트가 추구한 수도생활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겸손은 또한 베네딕트 영성의 또 다른 특징인 다른 이들에 대한 환대와 자비로 표현되어야 한다수도사들은 방문한 모든 손님들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몸을 완전히 엎드려 겸손히 영접하고 진심으로 대접해야 한다손님대접을 위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담당자는 중요한 금욕훈련 중의 하나인 금식도 포기해야 한다그리고 이 규칙서는 공동체의 병들거나 약한 이들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배려를 보이고 있다손님과 병든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같이 돌봄을 받아야 한다왜냐하면 그러한 환대를 통해 나그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경배를 받으시기 때문이다36, 53이처럼 겸손과 환대그리고 자비는 금욕수행보다도 더 우선되는 미덕이자 훈련이며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분과 연합하는 삶의 길이다.

 

삶의 균형과 리듬

베네딕트 영성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균형과 리듬이다먼저 베네딕트는 하루 중 기도와 노동이그리고 공동체의 예배와 개인의 영성생활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가르친다물론 우선순위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성무일도officium divinum 또는 하나님의 일Opus Dei에 있지만육체적인 노동과 개인적인 독서lectio divina 역시 매일의 수도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베네딕트는 제8장부터 제20장에 걸쳐 매일 혹은 매주 드릴 성무일도의 시간과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안내하고 있다그런데 이와 같은 기도와 예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이 추구한 “마음의 순수함과 참회의 눈물”이다20.3기도는 짧고 단순해야 하며20.4찬송은 마음과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어져야 한다19.7그리고 하나님이 어디에나 임재하시며모든 곳에서 주님의 눈이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에19.1 성무일도를 비롯한 모든 일은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행해져야 한다.

그 외에도 베네딕트는 사순절을 지키는 방법49과 취침과 식사 등 일상생활에 대한 지침22, 41도 제공하고 있다이러한 전례규칙과 일상생활의 규칙은 함께 어우러져 짧게는 매일의 생활길게는 연간 생활의 리듬을 형성한다즉 《베네딕트의 규칙서》에 심겨져 있는 수도원의 이상은 단조로운 매일의 의무들로 채워져 있는 삶이 아니라균형 잡힌 일상생활의 반복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리듬 있는 삶이다그런데 이러한 반복은 발전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하늘에 있는 집”을 향해 오르는 영적인 여정이며공동체가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규칙이라는 리듬에 맞춰 내딛는 공동의 발걸음이다72.4, 73.8.

 

라틴어 원문들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듯 많은 사본들이 발견된다현재 삼 백여 개 이상의 다양한 라틴어 사본들이 남아 있는데전승 과정에서 곳곳에 가필된 부분이 많아 원문을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규칙서》본문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시작되었다일반적으로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문서가 시작하는 첫 단어에 따라 아우스쿨타ausculta와 옵스쿨타obsculta,’ 두 그룹으로 구분되어 명명되어왔다중세시대에는 이 두 그룹의 사본을 적절히 조합하여 주석을 단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규칙서》각 장의 구분은 모든 사본에 나타나며절의 구분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947년에 안셀모 렌티니Anselmo Lentini에 의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KIATS영성 선집도 이 기준을 따랐다중세 기독교 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을 반영하듯규칙서에는 약 300여 개 이상의 성서본문이 직간접적으로 인용되었다물론 베네딕트는 성경본문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거나 출처를 표기하지 않았다오히려 수도사들이 보다 쉽게 낭독할 수 있도록 운율을 살리기도 했다.  KIATS영성 선집에서는 독자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만 성경인용의 출처를 담았다우리는 이 《규칙서》의 한글 번역과 연구를 위해 지금까지 나온 많은 라틴어와 영어 번역을 참조했다동시에 믿을만한 비평본인 아달베르트(Adalbert de Vogüé)가 편집한 La Règle de Saint Benoît: Introduction, Traduction, et Notes par Adalbert de Vogüé: Texte Établi et Preésenté par Jean Neufville (Paris, Éditions du Cerf, 1972)과 프라이(Timothy Fry)가 편집한 RB1980: The Rule of S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with Notes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1981)의 도움을 받았다.

 

주요 참고문헌

1차 문헌

Fry, Timothy RB1980: The Rule of S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with Notes.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1981.

Gregory the Great. The Life of Saint Benedict. Hilary Costello, Eoin de Bhaldraithe. Petersham, Massachusetts: Bedes Publications, 1993.

Lentini, Anselmo. S. Benedetto, La regola: testo, versione e comment2. Montecassino: Pisani, 1980.

McCann, Justin. The Rule of Sain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London: Burns and Oates, 1952.

Penco, Gregorio. S. Benedicti Regula: introduzione, testo, apparati, traduzione e commento. Florence: La Nuova Italia, 1958.

de Vogüé, Adalbert La Règle de Saint Benoît: Introduction, Traduction, et Notes par Adalbert de Vogüé: Texte Établi et Preésenté par Jean Neufville. Paris, Éditions du Cerf, 1972.

 

 

2차 문헌

강치원『베네딕트 규칙서』에 나타난 렉시오 디비나《선교와 신학》제19 (2007): 187-220.

김봉수『베네딕트 규칙서』에 나타난 수도원이념에 관한 연구《總神大論叢》제16 (1997): 249-290.

Casey, Michael. Strangers to the City: Reflections on the Beliefs and Values of the Rule of St. Benedict. Brewster, Massachusetts: Paraclete Press, 2005.

Ladrigan-Whelpley, Theresa. “Benedict of Nursia (c.480–c.547), Rule.” Christian Spirituality: The Classics. Arthur Holder . New York: Routledge, 2009: 62–73.

Merton, Thomas. The Rule of Saint Benedict: Initiation into the Monastic Tradition 4.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2009.

Stewart, Columba. Prayer and Community: The Benedictine Tradition.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98.

Swan, Laura. The Benedictine Tradition: Spirituality in History.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2007.

de Waal, Esther. A Life Giving Way: A Commentary on the Rule of St. Benedict.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1995.

 


마음에 우상을 들여놓고도, 그리고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도, 하나님께 묻기 위해 선지자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알고도 유혹에 이끌려 말하는 선지자,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 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14:1-11)

오늘날 청중들이 설교자로 부터, 목회자로부터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리고 설교자(목회자)는 청중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메시지를 선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선포하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청중을 기쁘게 하는 것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나는 어떠한가?

"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 
  하나님의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 
  두 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하나님을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는 자"(에스겔 13:18-19)
  가 될 바에는 침묵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리라.

2011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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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묵상 본문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14:24)

 

 이영표 선수의 미니홈피 제목 "하나님께 효도하자"라는 글을 생각나게 한다.

 

유학(Confucianism)에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효(孝)를 꼽는다.

효는 모든 행동과 덕의 근본이라고 가르친다.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사람은 밖에 나가서 부모님을 근심하게 하는 악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효문이다.

효의 근본 밑바탕에는 '사랑'이 깔려있다.

나를 사랑으로 낳아 기르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의 응답이 바로 효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

그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의 응답,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 곧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효도하는 것"이 아닐까?


2011년 4월 9일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질문에 부딪혔다. 요한복음 1:43-51에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1. 먼저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 흥분에 가득차서 자신이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별로 미덥지 못하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조그만 시골 동네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빌립은 확신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이렇게 초청했다. 
        "와서 보라!"

2.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아마, 나다나엘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듯하다. 나다나엘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아니, 나를 얼마나 안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적이 없었다. 그는 의아해 하며, (만일 내가 나다나엘이라면 거짓선지자가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저를 어떻게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애매한 답변 한 마디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며 의심하던 나다나엘이 놀라운 고백을 한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3.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먼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그는 혼자 있었으며 그곳에 어떤 다른 목격자도 없었던 듯하다. 만약 목격자가 있었다면, 그 목격자가 예수님에게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정보를 알려 줄 수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는 대답이 나다나엘에게 그리 놀라운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다나엘의 마음 속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볼 때 그가 그곳에서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 또한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의 일'이 가진 비중을 볼 때 그가 그냥 단순히 그 아래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고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이 그곳에서 홀로, 뭔가 특별한 긍정적인 일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다시 한번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님의 평가를 생각해 보면, 그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a true Israelite)"이었다. 이 말을 통해서 다양한 가설들을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context)-로마의 식민지였으며,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매우 어렵고 혼란한 시기였음-을 고려해보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그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시기를 간구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간구처럼 그는 자신의 눈으로 메시야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과 하나님 둘 사이에 있었던 그 일, 그 간구를 아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보내신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4. 나다나엘이 그동안 자신이 간절히 기다려오던 이스라엘의 임금을 만났지만, 막약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그저 '나사렛 시골 청년' 또는 근거 없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짓선지자로 인식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화과나무 아래 거할 필요가 있다. 나의 일상의 길모퉁이에서 주님을 마주칠 때, 스쳐지나가지 않고 그분을 알아보기 위해서, 나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고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단 둘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민족, 열방을 위해서 간구하고 엎드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무화과나무 아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2011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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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몇 명의 기독청년들이 불교의 사찰에서 땅밟기를 한 사건으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물론 우상숭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것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또한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다른 종교의 신전을 무너뜨리시기보다는 장사치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셨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교회는 먼저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개혁하는 데에 우선적으로 우리의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고해서 이번에 땅밟기를 한 청년들을 손가락질하고 사회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완성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이번 일은 몇몇 개인의 잘 못이라기보다는 관용과 자비의 정신과 자기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부산물이다. 또한 무엇보다 성도들을 잘 못 가르친 목회자들, 특히 나를 포함해 청년사역에 몸을 담고 있는 (담았던) 사람들의 잘못이 더욱 크다. (이런 의미에서 그 사건 직후 한 책임있는 기독교연합기관이 땅밟기는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책임없이 "꼬리자르기"를 한 발표는 적잖이 실망스럽다)

 

지난 시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이었다. 개신교는 "개혁교회"라고 부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과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고 한다. 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개신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개혁의 대상은 남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나 자신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은 "교회개혁"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탄식하고 계신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인데, 너희가 맛을 잃으면(니) 어떻게 세상이 썪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문제는 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부패한 것이 아니다. "세속"이란 어떤 의미에서 원래 그런 것이다.

문제는 교회가 그 빛을 잃고, 그 맛을 잃은 것이다. 


2010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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