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가 나온다.

 

나사로가 병들어 사경을 헤멜 때에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나흘 뒤에야 주님께서 나사로와 그 누이들이 살던 베다니에 도착하셨다. 이때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너무 비통하고 슬펐다. 주님께서 오빠 나사로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기 전에 그곳에 계셨더라면 그가 더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를 외롭게 남겨두고 떠나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 순간, 그 장소에 계셨더라면......

          우리 삶에 이런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이 천안함이 침몰하는 그 순간, 그 장소에 계셨더라면,

          주님이 고 한주호 준위가 깊은 바닷속에서 의식을 잃을 때에 그곳에 계셨더라면,

          주님이 실종자를 수색하던 어선이 침몰하던 그 차가운 바다 위에 계셨더라면,

          주님이 고 최진영 씨가 스스로 목을 매어달던 그 시각, 그곳에 계셨더라면,

          얼마나 많은 비극과 사고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가?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유대인은 이렇게 말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예수님은 여기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으냐" (요한복음 11:37, 40)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 그 사건을 통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들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우리가 보는 것은 안타깝게도 주님의 부재를 본다. 하나님의 침묵을 듣는다. 천안함 승조원들을, 구조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최진실 최진영 남매를 하나님은 살리실 수 없었던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무엇이라 답하며,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요한복음 11:25-26)


그날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나사로도, 마르다도, 마리아도 모두 자신의 수명이 다해 세상을 떠났다. 나사로는 그날 다시 살아났지만, 또 다시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비록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그의 수명이 연장되긴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똑같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소망이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우리에게 부활이 있음을 보여준다. 미래의 약속이 현재에 성취되는 것을 보여준다. 부활을 믿는 자에게 부활은 더 이상 먼 미래에 일어날 종말론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늘 삶 가운데 소망으로 존재하는 현재적인 사건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의 사건 속에서도 죽음에 정복당하지 않고,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이러한 소망, 그리고 현재적인 승리는 눈앞의 죽음과 절망을 넘어선다. 


오늘날 끊임없이 일어나는 많은 재난과 사건들 속에서 경험되는 주님의 부재

"주님께서 계셨더라면...." 

안타까움, 슬픔, 정말, 고통, 그 깊은 어두움

그 부재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그곳에 주님께서 흘리시는 비통의 눈물이 있다.

부활의 소망이 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5)


2010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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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곳

묵상/말씀묵상 2010. 3. 29. 16:00

'무엇을 먹고 살까'란 문제와 함께 '어디서 살아야 할까'라는 문제는 우리 생활의 기본적인 질문의 하나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또 이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요즘 어떤 집에서 살아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자주 이사를 했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이사하기가 더 힘들다.

내가 외국인 학생 신분이라 공식적으로 신용도 없고, 또 버클리는 미국에서도 집값이 매우 비싼 동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학교 하우징도 매달 내는 렌트비가 만만치 않다.

 

오늘 종려주일 예배를 갔더니, 설교본문이 아래의 구절이었다.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Believe in God, belive also in me.

 In my Father's house there are many dwelling places."

 (John 14:1-2a)

 

신기하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왜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말씀하셨을까? 그 순간 제자들의 가장 커다란 염려가 "dwelling place"에 관한 것이었는 듯 말이다. 과연 그랬을까? ...... 그럴만도 했겠지. 예수님을 따라 고향과 가족을 떠나 길 위에서 여행하던 그들인데, 갑자기 주님께서 돌아가시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도, 그 곳으로 가는 길도 알지 못해 매우 당황할 테니까 말이다.

 

어짜피 길 위에서 사는 인생, 당장 비를 피할 좋은 집, 적당한 집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아버지, 곧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그 말씀으로 위로 삼고

낙심하지 않고 걸어가야하겠지.

여우도 제 굴이 있고, 새도 자기 둥지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그 외로움, 그 고단함을 죄인인 내가 조금이라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다면 감사하고, 영광이지.

그러므로 괜히 마음을 괴롭게 하지말고,

길 위에서 종려나무가지라도 주워서 흔들며 춤추며 외쳐야지.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to the King! Hosanna to Jesus the King!


2010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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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부산의 한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수배 중이던 김길태 씨가 시민들의 도움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분노하게 하던 사람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김길태 씨의 인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씁쓸하다.

  

최근 몇년 동안 어린아이와 학생들을 대상으로한 성범죄 사건으로 정부에서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개선 등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성범죄 전과자를 소홀하게 다루는 제도의 허술함을 지적하고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범행을 지른 성범죄자들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애초에 그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성범죄자가 생기지 않도록 사회의 정신적, 영적, 도덕적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번 사건의 피의자는 어릴 때 한 교회 앞에 버려진 후 입양되었고, 길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길태'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자신이 버려졌던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크게 비뚤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그를 버렸던 생부와 생모, 또는 그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살았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 숨겨진 사정을 모르고서 누가 쉽게 비판하거나 칭찬할 수 있겠는가?) 보다 크게 그와 같은 성범죄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우리 사회 (내가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회)의 책임으로 간주해야 한다.

 

고귀한 생명, 또는 여성의 육체를 자신의 성적욕망을 해소하는 수단으로만 보게하고 (여기에 대중문화의 역할도 크다), 여러가지 욕망, 불안, 분노, 원한, 스트레스 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구조가 지속되는 한 또 다른 성범죄자들은 계속 양산 될 것이며, 갈수록 전자발찌를 차고 다녀야하는 '범죄자,' '사회부적응자,' '정신이상자'들은 늘어 날 것이다.

 

교회의 사역의 대상, 섬김의 대상에는 이론적으로 이런 이들까지 포함된다. 하지만, 나의 짧은 경험으로는 실제로 기존 교회에서는 '정상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사역하지만, 소수의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역시 여러 가지 이유와 한계들로 돌봄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사실 경제 발전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우리 사회의 숙제가 아닐까?


2010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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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

묵상/말씀묵상 2010. 2. 24. 17:00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시편 37편 3절)

 



땅에 머무는 동안, 육체 가운데 사는 동안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뭘 먹고 살지?"

여기에 이상적인 정답이 있다.

"주님의 성실하심"

그런데 그분의 성실은 입에 씹히지도 않고, 목구멍에 넘어가는 느낌도 없다.

하지만, 내가 감각할 수 있어야만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산소!"

산소는 혀로 맛볼 수도 없고, 이로 씹을 수도 없지만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나는 산소를 마시고 호흡하고 있다.

 

주님의 성실하심은 산소보다도 더 하겠지?

느끼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내 삶을,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먹을거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편 8절) 

추우나 더우나, 배고프나 배부르나

모든 상황 속에서

비록 잠시 요동할지라도, 변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깊은 신뢰를 통해 맛볼 수 있는 그 참 맛

 

하나님의 성실

그분의 선하심


2010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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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요한복음 10:11, 12)




선한목자는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보호한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얼마나 헛되이 애써 왔는가?

나는 선한 목자가 아니다.

달아나지 말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양들 속에 남아 있자.

남아 있는 건 할 수 있는데,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내가 아닌 양을 보호하지?


2009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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