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의 제목으로 잘 알려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는 원래 영국의 사제이자 시인인 John Donne (1572~1631) 이 쓴 시의 제목이다.

 

이 시에서 존 던은 모든 사람은 섬과 같이 떨어진 존재가 아니며, 모두 대륙과 같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곧 나의 죽음이며, 내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누구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조종을 울리는 지 알아보려 하지 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종은 나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1937년 스페인의 내전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다루며, 우리는 모두 한 인류임을 이 시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후에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다른 글에서 머튼의 시와 함께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최근, 잔인하게 살해된 안양 초등학생 혜진이와 예슬이를 생각하며, 그리고 티벳에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어가고 있는 많은 이들을 기억하며 존 던의 시를 읽어 본다.

 

 

For Whom the Bell Tolls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사람은 아무도 자기 홀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이니

만일 한 조각의 흙덩이가 바다에 쓸려 내려가면

유럽은 작아진다.

곶이 씻겨 내려가도 마찬가지이며

당신의 친구 또는 당신 자신의 땅이 쓸려 내려가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죽음도 나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저 조종이 울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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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어난 숭례문 화재와 관련된 소식이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뉴스가 수사 진행과 문화재관리 대책, 책임소재 규명, 복구방법과 비용 등에 맞추어져 있다. 이 모든 것들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70대의 노인이 숭례문에 불을 지른 이유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알려진 대로 용의자는 토지보상문제와 관련한 기업에 대한 원망과 관계 당국에 대한 분노 등으로 그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일들은 숭례문과 전혀 무관한 데도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몇 해 전 대구지하철 방화에서도 있었다.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그때도 범인이 개인적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여,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작년에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 역시 비슷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

 

갈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그 분노를 쏟아놓고 있다. 가슴에 난 불을 스스로 다스리고 끄지 못해 그 불똥이 무관한 사람들, 문화재 등으로 옮겨 붙어 큰 피해를 입해는 것이다.

 

물론 문화재보호를 위한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문화재를 훼손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난 분노의 불, 원망의 불씨를 다스리기 위한 사회적, 국가적 관심과 노력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2008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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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한 것이 좋다

날적이 2008. 1. 25. 10:16

오랜만에, 누님의 아이들, 그러니까 조카들과 며칠을 함께 보냈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준영이,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는 가영이는

다른 사람들은 썰렁하다고 표정을 굳히는 나의 유치한 유머에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팬들이다.

'유치한' 게, 나랑 통한다!

 

많은 어른들은 유치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치해서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늘 복잡하고, 삶을 살아가는 많은 노하우로 그 머리와 가슴을 채우고 있다.

그 노하우들이란 대개 선입관, 편법, 탐욕,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들이다.

나도 그런 어른이다. 벌써 삼십대 중반이다! 

 

유치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하다는 말이리라. 그리고 단순하다는 뜻도 된다.

깨끗함과 단순함은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미성숙한 사람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일지는 모르나

기독교신앙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래서 난 유치한 것이 좋다. 순수한 우리 조카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아이가 된 것 같다.

나도 벌써 때가 많이 묻은 아저씨이기에

아이들과 같이 놀다보면, 나도 그 순수함으로 덩달아 정화되는 것 같다.

비슷하게 무한도전 같은 유치한 방송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으면, 일종의 카타르시스도 느껴진다.

 

조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효과일까?

어제 저녁, 유치한 영화를 보며, 제법 눈물을 흘렸다.

함께 간 사람들은 모두 지루하다는데, 혼자 눈이 빨개져서 극장을 나왔다. 창피하게도......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도 눈물이 또 나왔다.

 

우습다.

 

'권혁일, 이 정도면, 유치하다 못해 청승이다!'


2008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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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우체국에 가기 위해 건널목에 섰습니다.
며칠 동안 씨름하던 원고를 급히 부치기 위해서입니다.
멈춰진 신호등 앞에 서니 사람들이 보입니다.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 ......
그리고, 복잡한 교차로를 빠져나가는 여러 모양의 자동차들 ......
각각 다른 모습으로, 각각 다른 방향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저들도 모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겠지?'
비록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지도 알지 못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목적을 잘 깨닫지 못한 이들이 있을지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조금 전엔 내가 빠르기 길을 걸어가기 위해 피해가야할 존재로 보였는데
이제는 함께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는 동료로 느껴집니다.

신호등이 바뀌고
저도 그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위해 성실히 살 때에
세상이 굴러갑니다 지구가 돌아갑니다

이번 한 주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주일에 만나 함께 즐겁게 예배합니다
주일은 교차로에서 신호대기를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살아가지만
우리가 더 큰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는 지체인 것을 확인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기쁜 날, 쉼의 날 되길 기대합니다

 

2007년 9월 6일 부산, 수영교차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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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초대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없이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공동체이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면서, 교권이 강조되고  평신도는 교회의 바깥뜰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이로부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 종교개혁이었다. 마틴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통해 다시 평신도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웠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의 교회를 중심으로 '평신도를 깨운다'는 모토로 시작된 '제자훈련'과 최근의 'Cell 교회 운동' 또는 'NCD'운동은 교회에서 평신도 사역자의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사역자의 질적 기준을 낮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나 사역자라는 명찰을 달고 교회 안팎을 활보할 수는 있을 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참다운 평신도 사역자는 다음과 같은 모습이 요구된다.


 1. 활동(doing)하기보다 존재(Being)하는 사람


사역자는 어떤 행위(doing)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는 가르치는 것, 찬양대는 연주하는 것 등 행위가 사역의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역자는 행위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난다고 말씀하셨다.(마7:17)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먼저 행위에다 전력을 쏟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좋은 나무로 존재하기를 열망하고 애써야 한다. 이를 위해 주님 안에 거하는 예배, 묵상, 기도는 행위보다 훨씬 중요하다. 사역의 열매는 이 예배, 묵상, 기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거할 때에 좋은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힌다.(요15)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은 자녀로, 예배자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이다.


 2. 혼자하기 보다 함께 하는 사람.


많은 경우 교회의 사역이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각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함께 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는 좋은 능력과 재능,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함께 할 때는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지 못해서 제대로 사역이 진행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마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격이다. 하지만, 성경은 모사가 많으면 일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잠15:22)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팀으로 함께 일하는 방법을 배워 나갈 때 그곳에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팀으로 함께 하기 위한 4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영어로 T/E/A/M의 머릿글자이다. Trust(신뢰), Empathy(공감), Accommodation(배려), Mission(목적)이다.


 3. 이분법을 넘어선 통전적인(Holistic) 사고


교회 사역과 자신의 가정, 직장, 학교 등의 일을 병행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9:62)"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니라(딤전 5:8)"고 경고하셨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정답이겠는가? 이러한 딜레마에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교회일과 자기 개인의 일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아서 하는 모든 행위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일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한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교회의 사역들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 성과 속을 이원론적으로 가르는 사고는 우리의 사역을 불구로 만들고 있다. 이원론을 넘어서 통전적인 사고만이 이러한 딜레마를 넘어서서 우리의 헌신과 섬김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사고는 또한 우리의 섬김의 영역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둬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세계로 확장시킬 것이다.


 4. 발을 씻기는 사람


많은 사람들은 사역의 직분을 자신의 명예와 자랑으로 여긴다. 실제적으로는 어떤 사역을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에서 어떤 타이틀을 가지려고 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존경받는 명예직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주님의 본을 따라 다른 이들의 발을 씻기는 실제적인 종이다.(요13) 다른 사람의 발밑에 서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발아래에 두는 격이다.


 5. 지식을 겸비한 열정을 가진 사람.


어떤 이들은 교회 일을 하면 자신의 열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열정은 종종 일을 그르칠 때가 많다. 지식 없는 열정보다는 열정 없는 지식이 더 낫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지식을 겸비한 열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야 한다.(벧후3:18)


2007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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