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기다리다

날적이 2008. 12. 31. 10:11

대학시절, 늦은 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끊긴 것 아닌가 염려하며 버스를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갑자기 그때의 느낌이 마음 속에 일어나는 건,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요즘, 어떤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게다. 

곧 해가 바뀌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던 아론은 얼마나 조바심이 났을까? 그는 결국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 금송아지를 만들고야 말았다.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꾸 내 손으로 금송아지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충동이 든다.

우직한 믿음으로, 바보같은 신뢰로, 걱정없이 매일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기다림 아닐까?

그런데 요즘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목을 빼고 길 저쪽을 바라보다가,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주위를 서성이고 맴돌다가, 버스노선표 위에나 시선을 올려놓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 날들을 보낼 것인가?


2008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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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쓰며 영어로 번역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올려둔다. 그가 한글로 시를 쓰던 때는 일제강점기 말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언어는 물론 정체성까지 말살하려고 하던 때에, 청년 윤동주는 '위험한 언어'로 '위험한 내용'의 시를 썼다. 그 언어의 아름다움과 내용의 깊이와 감동을 다른 나라 언어로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대한 흉내 내어보려고 하였다. 기존의 영어 번역들이 시인의 육필 원고가 아니라 편집자들에 의해 변형된 원고를 대본으로 하여서 아쉬운 점들이 많다. 그래서 품을 들여 다시 옮겼는데, 짧은 실력 탓에 어쩌면 더 못한 것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더 나은 표현이 있다면 제안해 주신다면 고마울 것이다. 


한글 시는 원래 시인이 썼던 언어의 음악적인 맛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육필 원고에 있는 어휘를 그대로 두었다. 다만 띄어쓰기만 현대 맞춤법에 따라 고쳤다. 영어 번역은 영어로는 좀 어색한 표현이 되더라도, 가능한 원래의 의미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 역동적 등가 번역(Dynamic Equivalence Translation)방식이 아닌 문자적 번역 방법을 택했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제2판, 2002)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고, Kyung-nyun Kim Richards와 Steffen F. Richards가 번역한 Sky, Wind, and Stars (Fremont, CA: Asian Humanities Press, 2003)을 참조하였다.


이적 (異蹟) 



발에 터분한[각주:1] 것을 다 빼여 바리고

황혼이 호수 우로 걸어오듯이

나도 삽분 걸어 보리잇가?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홀(自惚), 시기, 이것들이

작고 금메달처럼 만저 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써서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려내소서


1938. 6. 19.



Miracle



Shall I take off stuffy things from my feet

And walk lightly

Like the twilight walking on the lake?


For me, it is indeed a miracle

That I have been called

To this lake

Though nobody called me.


Today of all days 

I keep fiddling with love, self-intoxication, and jealousy

As if they are gold medals.


However, without regret,

I will write all of mine on the waves and let them go 

As for You, therefore, call me out upon the surface of the lake


June 19, 1938.


Poem. Yun Dong-ju (1917-1045)

Trans. Hyeokil Kwon



  

       이 시에는 두 가지의 이적이 나타난다. 먼저는 이미 일어난 것인데, 시인은 아무도 부르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호숫가로 불려 나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를 부르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단지 시적 화자는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연정, 자홀, 시기 등에 대한 집착이 그의 귀를 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의 내적 귀먹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에 의해 호숫가로 불리어 나왔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이적이다. 


       두 번째 이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모든 집착을 밀려가는 파도와 함께 떠나가게 하고,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의 발을 호수 위에 내딛을 때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로 선택한다. 이에 그는 주님께 자신을 호수의 물 위로 불러 달라고 겸손히 요청한다. 곧, 두 번째 이적은 우리가 집착으로부터의 벗어나고 주님의 부름에 순종으로 반응할 때에 시작된다. 

  1. 날씨나 기분 따위가 시원하지 아니하고 매우 답답하고 따분하다 [본문으로]

MBC 스페셜, "시대의 연인, 최진실" 이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그녀가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배우 최진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물론,

그녀의 동료와 선후배, 지인과 친구들이 인간 최진실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깊은 고통과 외로움 가운데서 자신을 향한 세상의 독설(毒舌)에 죽어 갔지만,

만약, 그녀가 죽기 전에 이 다큐를 보았다면,

자신이 이토록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분명히 다른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 받는 연인으로, 그리고 세상에 사랑을 주는 연인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내 주위에 아무도 없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이 외롭고 절망스럽더라도

분명, 나는 누군가의 진실한 사랑을 받고 있는 연인입니다. 

 

-------------------------------------------------

 

당신의 주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계십니다.

그분은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으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당신을 잠잠히 사랑하시기도하고

당신으로 인해 즐겁게 외치며 기뻐하십니다. 

 

스바냐 3:17


2008. 10. 18.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의 관상(contemplation) 체험에 따른 사상적 진화: 『명상의 씨』와 『새 명상의 씨』의 비교연구

 

영문제목: The Progress of Thomas Merton's Thoughts according to His Experience of Contemplation: 

A Comparative Study of Seeds of Contemplation and New Seeds of Contemplation

 

석사학위 (Master of Theology) 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서울

2008년 7월

 


원문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사이트(RISS)에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동

 

 



목차

 

Ⅰ. 서론

 

Ⅱ. 관상의 관점에서 본 토머스 머튼의 생애 ·

A. 예비 관상가

B. 관상의 성숙

C. 관상의 열매

D. 요약

 

Ⅲ. 관상에 대한 머튼의 주요 저작들

A. 전기의 작품들

B. 전환기의 작품들

C. 후기의 작품들

D. 요약 ·

 

Ⅳ. 『명상의 씨』와 『새 명상의 씨』의 작품분석

A. 배경과 특징

B. 『명상의 씨』와 『새 명상의 씨』의 차이점

C. 『명상의 씨』와 『새 명상의 씨』에 나타난 관상이해

D. 요약

 

Ⅴ. 토머스 머튼의 관상체험에 따른 사상(思想)적 진화

A. 개념적 경향에서 체험적 경향으로

B. 심리학을 넘어서 기독교 인격주의적 경향으로

C. 분리적 경향에서 통합적 경향으로

D. 고립적 경향에서 개방적 경향으로

E. 가톨릭적 경향에서 기독교적 경향으로

F. 요약 

 

Ⅵ. 토머스 머튼의 사상적 진화가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

A. 순전한 하나님 체험을 추구하는 영성

B. 내적 자아의 깨어남과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

C. 통합적인 영성과 생태영성의 확립

D. 한국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정체성 확립과 구현

E. 교회의 일치와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영성

F. 요약

 

Ⅶ. 결론

참고문헌  

존 던 (John Donne)의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는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토마스 머튼에게 영향을 주었다. 머튼은 존 던의 시의 첫 구절을 가져와서 "아무도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머튼이 '자유를 위한 노래'를 위하여 쓴 씨, "All the Way Down"(1966)에서도 이러한 존 던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생각과 공명을 이루고 있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머튼은 2차세계대전으로 온 세계가 전쟁과 죽음의 폭풍 가운데 있던 시기를 살았으며, 여러가지 저술활동 등을 통해서 활발하게 반전운동을 벌였다.

 

이 시에서 머튼은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간 이야기를 통해 아래로 깊이 내려가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관상 체험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온 인류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전쟁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의 종을 울린다'는 표현을 통해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종을 울리는 것', 그것은 머튼이 세상에서 관상한 것을 나누는(Contemplata aliis tradere)  방식이었다.




ALL THE WAY DOWN

(Jonas Ch.2)

 

I went down

Into the cavern

All the way down

To the bottom of the sea.

I went down lower

Than Jonas and the whale

No one ever got so far down

As me.

 

I went down lower

Than any diamond mine

Deeper than the lowest hole

In Kimberly

All the way down

I thought I was the devil

He was no deeper down

Than me.

 

And when they thought

That I was gone forever

That I was all the way

In hell

I got right back into my body

And came back out

And rang my bell.

 

No matter how

They try to harm me now

No matter where

They lay me in the grave

No matter what injustices they do

I've seen the root

Of all that believe.

 

I've seen the room

Where life and death are made

And I have known

The secret forge of war

I even saw the womb

That all things come from

For I got down so far!

 

But when they thought

That I was gone forever

That I was all the way

In hell

I got right back into my body

And came back out

And rang my bell.

 
줄곧 아래로

(요나서 2장)

 

나는 내려갔다.

동굴 속으로

줄곧 아래로

바다의 바닥까지.

나는 더 밑으로 내려갔다.

요나와 고래보다도

아무도 나만큼

그렇게 아래로 가보지 않았다

 

나는 더 밑으로 내려갔다.

어느 다이아몬드 광산보다도

킴벌리의 가장 낮은 동굴보다도

더 깊이

줄곧 아래로.

나는 내가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도 나보다는

더 깊이 내려가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내가 계속해서

지옥에 있다고

그들이 생각했을 때

나는 즉시 내 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나의 종을 울렸다.

 

아무리 그 어떤 방법으로

그들이 지금 나를 해하려 한다고 해도

아무리 그 어떤 무덤 속에

그들이 나를 두려고 해도

아무리 그 어떤 불의를 그들이 행한다고 해도

나는 보았다

모든 믿음의 뿌리를

 

나는 그 방을 보았다

생명과 죽음이 만들어 지는 곳.

그리고 나는 알았다

전쟁의 비밀 요새를.

심지어 나는 자궁도 보았다

모든 것들이 나오는 곳.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멀리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내가 계속해서

지옥에 있다고

그들이 생각했을 때

나는 즉시 내 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나의 종을 울렸다.



 

*킴벌리(Kimberly)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중부의 도시이며 다이아몬드 광산의 산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