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연교회 청년부 소식지

2007년 3월 4일 


참회일기를 쓰자!



윤동주 시인을 아는가? 그는 일제의 횡포로 암울했던 1917년에 태어나, 광복 직전인 1945년 2월에 29세의 나이로 일제의 감옥에서 옥사한 청년시인이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민족시인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였다. 윤동주는 16살 때에 캐나다 선교사가 운영하던 미션스쿨 은진중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살이 되던 해에는 만주의 용정 중앙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일본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신약성경을 열심히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윤동주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의 이러한 이력들 때문이 아니라, 그는 혹독하고 악한 일제시대에 누구보다도 순결한 삶을 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 중)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살아가기를 원했고, 그래서 작은 허물에도 크게 괴로워했던 순결한 마음을 가진 형제였다. 이러한 윤동주의 순결의식은 그로 하여금 날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참회의 글을 쓰게 하였다. 그가 만24세 때에 쓴 <참회록>이라는 시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겨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윤동주의 <참회록> 중)


이처럼 윤동주는 일제시대인 1930,4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암울한 그 시대 속에서 순결한 기독청년으로 살고자 참회의 글을 썼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60-70여년이 지난 2000년을 전후해서 청년기를 살고 있다. 비록 윤동주와 우리는 각각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 또한 오늘날의 혼란스럽고 타락한 시대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띠고 있다. 그저 좁은 대학의 문과 취업의 문을 통과하여, 생활의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꽃피게 할 사명을 띠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사람,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도 참회의 글을 쓸 것이 요구된다.


지금은 사순절(Lent) 기간이다. 사순절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간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참회의 일기를 쓰자. 밤이면 밤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그날의 죄를 고백하는 일기를 쓰자. 우리 마음에 낀 죄의 녹을 닦아내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성 금요일(4월 6일)에는 우리가 함께 모여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 개인의 죄와 공동체의 죄를 회개하자.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대에 빛이 되는 순결한 기독청년이 되도록,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깨끗한 성령의 샘이 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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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교회 청년부 2월을 여는 글

청년부 소식지, 2007년 2월 11일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배를 예배 되게


“만일 태국에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했다면, 태국의 교회는 지금처럼 약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국 단기선교 때에 선교센터의 이사장이신 쁘라차이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태국은 약 170여 년  전에 독일의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진 나라이다. 우리나라보다 약40년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국가이다. 그러나 지금 태국의 기독교는 전체 인구의 1% 정도 밖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약한 상태이다. 이에 대해 여러 사람들은 그 원인 중 한 가지를 태국에 복음을 전한 독일교회에서 찾는다. 그것은 독일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정도로 한 때 기독교가 왕성했고, 또 국교(國敎)도 기독교인 나라이지만, 사실 오늘날의 독일교회는 아주 쇠퇴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국 교회의 어머니교회가 되는 독일교회의 쇠퇴로 태국의 기독교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인 원인들이 있지만, 선교지와 그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은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두 주간 태국 땅을 밟고, 태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더욱 절실히 느낀 것은 우리 민족이 함께 예배하는 한국교회의 중요성이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기부터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선교사를 파송한지 약 1백년이 되었으며, 전 세계 각지로 1만 6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세계 두 번째의 선교사 파송국이 되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숫자적으로 세계2위라서가 아니라, 그 만큼 많은 전 세계의 영혼들, 그리고 선교지의 교회들이 우리 한국교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한국교회가 부흥하면 그 영향력이 선교지의 여러 교회들에게로 흘러가서 선교지에서 부흥이 일어날 것이고, 반대로 한국교회가 쇠퇴하면 선교지에서의 복음의 진보도 힘겨울 것이다. 그뿐 만이 아니라 아직도 세상에는 추수할 곡식이 많고, 이를 추수할 수많은 일꾼들이 필요한데, 우리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잠재적인 선교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면 그 잠재적인 선교사들이 비전을 발견하고, 훈련받아 선교지로 나가게 되겠지만, 만약 한국교회가 쇠퇴하게 된다면 선교사가 줄어들게 되고 그 만큼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교회의 회복과 부흥은 곧 세계선교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 완성을 앞당기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부흥과 쇠퇴의 기로에 서 있다. 평양대부흥의 100주년이자, 우리교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07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부흥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높아져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부흥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의 선교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중요한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흥이 우리 교회 가운데, 부산에, 이 민족에 임하도록 기도하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최근 우리의 가슴을 지피고 있는 찬양처럼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배를 예배 되게, 우릴 사용하소서”라고 고백하며 내가 먼저 주님께 철저히 복종하며 헌신하는 우리 씨앗공동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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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교회 청년부 <씨앗>소식지

2007년 1월 14일


나무가 숲을 이루어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던 2007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우리공동체 가운데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우리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그림으로 그려보았습니다.

 

1. 토양 : 우리의 가장 중요한 토양은 바로, 예배와 묵상입니다. 함께 드리는 예배와 우리의 삶 가운데 날마다 갖는 경건의 시간은 우리 공동체가 성장하여 숲을 이루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토양입니다.

 

2. 나무 : 올 한 해 우리는 네 개의 나무를 중점적으로 키워나갑니다.


 기도의 나무 :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는 것이자, 부흥을 위한 본질적인 전략입니다. 이 기도의 나무에는 매주의 <토요기도회>,<예배를 위한 기도회>,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기도하는 <디아스포라 기도모임>, 5월27일 해운대 백사장에서 있을 부산경남지역 청년들의 기도모임인 <Again 1907>, 그리고 중요한 시기마다 있을 특별기도회(체인)이라는 가지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올해 <기도사역팀>이 신설되었습니다.


 공동체의 나무 : 공동체는 올 한 해 우리가 정말 많은 사랑과 관심으로 키워야할 나무입니다. 공동체의 성장은 우리 개인의 성장은 물론, 선교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공동체 안의 무너진 영역을 다시 세우고, 상한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가지들을 자라게 할 것입니다. <온라인 공동체-청년부 홈페이지 활성화>, 2/4분기에 실시될 공동체40일 캠페인 <Better Together>,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Login Project>, 깨어진 관계의 <치유, 회복>, 가족별·또래별 <요리대회, 체육대회, 등반대회> 등이 있습니다.


③ 사명의 나무 : 주님의 지상명령, 전도와 선교의 나무도 우리가 키워야할 중요한 나무입니다. 태국북부지역에 거룩한 강이 흐르게 할 <태국단기선교-거룩한 강>, 7월 31일-8월 1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07 통영선교>, 우리 씨앗공동체의 본질적인 사명 <캠퍼스선교>, 10월 18-21일의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그리고 11월 11일 전교회적으로 실시될 <1111전도주일>, 그리고 매주의 <전도팀> 등의 가지가 있습니다.


④ 양육의 나무 :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의 나무로 자라가는 것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나무 입니다. 이를 위한 가지는 이번 주부터 있을 겨울수련회 <PUSAN KOSTA KOREA>, 2월 5-6일 <JUMP 2007>, 그리고 더불어 함께 하나님께로 자라나가는 <가족모임>과, 리더십 양육을 위한<3th JDTS>, 11월 말의 <07 말씀과 청년> 등이 있습니다.

 

3. 숲 : 공동체적으로는 이러한 4가지의 나무를 중점적으로 키워갈 것이며, 그러할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심으신 ❛의의 나무❜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일 때 <하나님 나라>라는 푸른 숲이 우리 공동체와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올 한 해 우리 모든 ❛씨앗들❜의 헌신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 비전을 사십시오. 이 비전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씨앗공동체의 <공동구매> 참여 하신다면, 공짜로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기도의 마우스로 지금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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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교회 청년부 소식지

2006년 12월 3일

 

물꼬를 터라!

 

 

‘물꼬가 트이다’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물꼬가 트이다’는 것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던 어떤 일이 극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 입니다. ‘물꼬’란 논두렁을 깎아내어서 논배미에 물이 넘어 흐르게 만들어 놓은 어귀를 말하지요. 제가 시골에 갔을 때에 물꼬를 넘어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농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없지만(^^;) 만약 물꼬가 막혀있다면 물이 흐르지 못해 논의 물이 썩고 말지요.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갈보리 언덕 꼭대기의 십자가에서부터 흘러내려서, 언덕 아래로, 온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웅덩이가 되어 복음이 우리 안에 고여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고여 있는 웅덩이의 물이 썩고 냄새가 나는 것처럼, 고여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로 썩어 갑니다.


그래서, 이번 태국단기선교훈련 <거룩한 강-The Holy Streams>은 고여 있는 복음의 물꼬를 트는 시간입니다. 우리 대연교회와, 태국 난에 있는 두렁을 깎아서 고여 있는 복음의 물을, 성령의 강을 흐르게 하는 것이 이번 <거룩한 강>을 통해 기대하는 바 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연동’과 태국의 선교센타가 세워진 ‘난(Nan)’지역의 공통점은 바로 ‘물’입니다. ‘대연(大淵)’은 크고 깊은 못을 의미하고(실제로 대연동에는 원래 큰 연못이 있어서 ‘못골’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난’은 지리적으로 ‘난 강’이 발원하여 주변의 산악지대에 물을 공급하는 곳이 바로 ‘난’입니다. 이처럼, 우리 <대연교회>와 <난선교센타>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생명수’이신 주님을 알게 하는, 그리고 성령의 강이 흐르게 하는 그런 ‘수원지(水源池)’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물꼬를 트는 작업, 이것이 바로 <07 태국단기선교훈련>을 앞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삽’이 되어 물꼬를 트는 일에 동참할 사람을 찾습니다. 공동체의 대부분의 지체들은 부산에서 ‘기도의 삽’을 쥐고 함께 할 것이지만, 그 중에 또 여러 지체들은 직접 태국 땅 가운데, 자신을 복음의 삽으로 꽂을 것입니다. 이 중에 어떤 분들은 11박 12일의 일정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이들에게는 개인재정 50만원을 채워가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입니다. 만약 내 안에 이 <거룩한 강>을 내는 일에 직접 동참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신다면, 일정과 재정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맡겨 두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환경을 여실 것입니다. 그것을 내 힘으로 해결하려는 그 생각이 바로 ‘교만’입니다. 전도사인 저 역시 숨 가쁘게 바쁜 여러 일정 가운데 많은 시간을 내어야 하며, 천만 원이 넘는 전체재정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두기로 결정하고 나아갑니다. 복음이 없어 메마른 땅에 성령의 <거룩한 강>을 내는 이 일에 함께 할 동역자가 어디 없습니까?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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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적형성 과정:

그대를 찾아 어둔 밤으로


나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는 아주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150cm의 단신의 갈멜수도회 수사이었지만, 나는 186cm의 큰 키를 가진 개혁교회 전도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 공감이 느껴지는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형성 과정 가운데서, 나를 형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검소함의 습관

나는 1974년 초여름, 해운대의 철길을 끼고 있는 가난한 동네의 셋방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라는 역사적 격동기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시기 위해 열심히 일하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매일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특별히 어머니는 아주 검소한 분이셨는데, 작은 돈도 헛되이 쓰는 법이 없으셨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시면서도, 다른 이들을 위해서는 그리 인색하지 않으신 분이셨다. 그러한 삶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내면엔 탐욕으로 부를 쌓아가는 삶을 부정하고, 검소한 삶을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태도가 형성되어 갔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다녔던 비교적 보수적인 교단의 주일학교 교육과, 청교도적 신앙을 추구하던 목사님들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진리를 찾아 헤매다

20대를 전후해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문학’과 ‘개혁’이었다. ‘글쓰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삶의 진리를 찾아 가는 수단이었다. 당시 내가 쓴 시 중에 “그대에게로 가는 여행”이라는 시가 있는데, 나는 그 시에서 “(그대가) 연필 끝에 새초롬히 섰소”라는 시구를 쓰며, “그대”로 상징되는 진리를 글쓰기를 통해서 발견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십자가의 성 요한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아직 “어둔 밤”의 정화를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진리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가려져 있었다.

또한 나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구현되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장차 그것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에 내 삶을 투신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난 대학에서 문학과 개혁,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학신문사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년간의 기자활동을 통해서는, 진리도 찾을 수 없었고, 세상의 개혁도 이루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러할 수 있다는 확신도 사라져버렸다. 더욱더 이 시기의 나는 겨우 주일예배에 앉아 있을 뿐, 그것을 제외하고는 온통 학교일에 매달려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도 메말라 부스러지는 흙과 같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난 모든 일을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말씀을 묵상을 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회심하게 하셨다. 그리고 막연한 진리를 향한 갈망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분명히 해 주셨다. 또한 세상을 향한 나의 알량한 정의감이 아닌, 하나님의 깊은 긍휼의 마음을 알게 하셨다. 그러고 약 6개월 후 나는 한 선교대회를 통해서 “십자가를 질 수 있나?”라는 주님의 물음에 “저의 심령 주의 것이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라고 응답하며 헌신하였다. 십자가를 내 삶의 핵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삶의 방법으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일 뿐이었다.


신을 벗고 어둔 밤으로

고무된 마음으로 신학교에 가기로 결정하였지만, 처음부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신대원에 지원한 첫 해에는, 원하는 학교에 가기 위해 교단을 옮겨 추천을 받는 과정에서 거절을 당해야 했고, 열심히 준비하여 시험을 쳤던 둘째 해에는 넉넉하게 들어가리라는 기대와는 반대로 문턱에서 좌절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교만을 다루어 나가셨다. 나의 신앙적 열심과 지적 능력에 대한 자만을 하나님은 그렇게 꺾으셨다. 그래서 세 번째 시험을 보는 해,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 발의 신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철저히 부인하고, 나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나서야, 나는 감사하게도 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신대원에 들어간 첫 학기, 난 영성훈련을 만나게 되었다. 은성수도원에서의 주말경건훈련과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른 영성훈련은 내가 그렇게 찾고자 했던 “그대” 곧, 주님께로 나를 한 걸음, 한 걸음 안내해 주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세상의 기쁨과 맛을 추구하는 나를 정화해나가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내면화함으로써, 내가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고, 또 다른 이들을 주님을 본받는 삶으로 인도하는(고전11:1) 소명으로 이끄셨다.

신대원 졸업 후 나는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실제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중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오의 햇빛 아래에서의 걸음이 아니라, 해질녘 들판 길처럼, 어둔 밤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간혹 나는 영적안일과 두려움 속에서 벗어버린 신발을 다시 주워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때마다 주님은 나를 깨우치시고, 다시 내가 신발을 벗어던지기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아직도 세상의 기쁨과 맛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하는 나의 내면을, 하나님을 향해 불꽃같이 타오르는 열망으로 채우고자 하신다. 사실 요즘 내가 감당해야하는 삶의 모든 상황들은 나의 감각과 영혼을 능동적, 수동적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어둠을 뚫고 오는 빛을 그리고, “주님의 순전한 은혜”를 갈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실로 요즘 나는,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 길을 따라 어둔 밤을 지나 한 걸음씩 걸어 나갈 때, 마침내 정오의 태양보다 눈부신 빛 아래서, 나는 “그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목회와 신학』2006년 12월호

권혁일


십자가의 영적형성에 비추어 바라본 나의 영적형성에 대한 에세이. 

아래의 게시글 "십자가의 영적형성과정"과 함께 쓴 글.

 <목회와 신학> 웹페이지에 유해룡 교수님의 영적지도와 함께 게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