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3 수련회


1. 방학이 다가왔지만, 다들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곧 여름수련회가 다가왔는데, 보충수업을 빠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린 고3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야자를 마치고, 교회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야기는 수련회로 흘렀다. “우리 담임이 수련회 갈려거든 맞고 가라던데” 한 친구가 이야기한다. “난 맞아도 안 보내준단다 ㅋㅋ” 다른 친구가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난 안 그래도, 주일에 학교에 자율학습하러 안 나오고, 교회 간다고, 선생님이 볼 때마다 째려본다” 다들 상황이 장마 때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처럼 캄캄하다. 사실 이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농땡이 안 치고, 충실히 야자에 참여하였지만, 그래도 성적만큼은 자신이 없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성적이다.

 

2. “하나님, 제발 우리 선생님 마음을 열어주세요.” 쉬는 시간,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고 기도한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무실로 향하였다. 가슴이 제법 두근거린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 내가 왜 왔는지 다 안다는 듯한 눈치다. ……… “무슨 소리하노? 안 된다! 내년에 대학생 되어서 가라!” “선생님, 수련회 안 가면, 공부가 더 안 될 것 같습니다. 다녀와서 힘내서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용기를 내어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의 눈빛은 여전히 무섭기만 하다.

 

 3. 수련회를 떠나는 날 아침, 친구들이 하나 둘씩 교회로 모여든다. 나처럼 어렵게 허락을 얻은 이들도 있고, 아예 허락을 얻지 못해, 어떤 친구는 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음료수와 함께 책상에 올려두고 왔단다. 다녀와서 매를 맞겠다고 했단다. 조금 무모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 열정만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처럼, 어렵게 참여한 수련회였기에, 우리는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고3 여름수련회가 있었기에, 우리는 남은 수험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20여명의 동기들 중 거의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2006. 7. 16. 대연교회 청소년부 주보 칼럼


고3때의 기억을 더듬어 썼습니다.

내용의 진실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제의 경험에 약간의 상상력과 변경을 가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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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3-4절, 우리의 사귐 

 

 

본문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개역개정판 요1 1:3-4)

 

묵상 


  사도 요한이 보고 들은 바, 곧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하여 증거한 이유는 바로 듣는 자들로 하여금, 우리(곧 믿는 이들의 공동체)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이 사귐은 단순히 친목을 위한 그런 사귐이 아니다. 이 사귐은 ‘코이노니아’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었다. 이러한 사귐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하다. 곧 복음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믿는 자들의 공동체,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는 것, 그것이 복음 전파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날 교회의 책임이 전도가 그저 ‘전파(3절의 전함, anouncement)’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믿는 자들이 공동체와 교제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데에 있다는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한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 안에 복음을 듣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귐에 동참하게 하는 데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등록하는 것만도 큰 기쁨이 된다. 그런데 새가족들이 그저 교회에 발걸음을 디디는 데에 끝나지 않고, 우리 안에서 교제하고, 또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자라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완성하게 해준다. (충만하게. complete - 4절). 이러한 기쁨의 완성 또는 충만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가?


주후 2005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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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2절, 보고 듣고 만지는 주님 


본문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개역개정판 요한일서 1장 1-2절)

 

묵상


  요한은 육체로 오신 주님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 음성을 들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 주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요한과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이시다.

 

  아쉽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성령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을 볼 수 있고, 그 분을 만질 수 있다. 예배와 기도 가운데 강력한 주님과의 연합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상한 맘을 만지시는 주님을 경험할 수도 있다. 말씀을 읽을 때에 내 심령을 뜨겁게 하고, 말씀을 통해 나의 내면 깊은 곳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자연을 통해 온 천지를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온 천지에 가득하시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 안에 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주님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 


2005.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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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하루

묵상/말씀묵상 2005. 3. 22. 16:00

본문 : 마가복음 11장 27-44절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주간, 주님은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만져주심을 바란다. 눈 앞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주님의 마음은 참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때에 방해꾼들이 나타난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헤롯당원들, 사두개인들 이들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을 곤경에 빠뜨릴 목적으로 갖가지 곤란한 질문들을 퍼부어 댄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데 오히려 내 마음이 조급해진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부족하다. 이제 며칠 후면 주님은 체포되어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데, 그래서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시고, 그들을 돌보셔야 하는데 방해꾼들이 주님의 시간을 빼앗아 버리니 오히려 내가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다. 침착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저들의 질문에 대답하시고,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 저들의 악함을 신랄하게 지적하신다. 내가 볼 때에는 그 시간이 참 아까운데, 주님은 그렇지 않나 보다. 오히려 주님은 그렇게 악한 이들을 대응하는 것도 메시야로서 주님이 해야하는 일로 여기시는 듯 하다. 메시야의 '본업'에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늘 당연히 해야할 일로 받아들이신다.

나는 요즘 많은 일들로 마음이 조급하다. 나의 남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오늘 해야하는 많은 일들로 인해 분주함과 조급함과 불평하는 마음이 있다. 해야할 일이 많은데, 부수적인 일들 대문에 정작 내가 해야할 일들을 못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그 일도 "내가 너에게 맡긴 일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부수적인 일 또는 정작 내가 해야할 일들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 저의 좁은 시각과 마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감당해내기 위해 주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성밖으로 나가 쉬시며 기도하신 것처럼 나 또한 그러한 쉼과 기도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매일 밤늦게까지 여러가지 일들로 제대로 쉰 적이 거의 없다. 자연히 기도의 시간도 줄어든다. 낮 시간의 사역을 위해, 저녁에 주님 안에 쉬며 기도하는 시간을 제대로 가져야겠다. 

고난주간의 주님의 삶은, 내 삶에 멋진 모델이 되신다.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0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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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

묵상/말씀묵상 2005. 3. 18. 16:00

65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6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I keep your precepts with all my heart. NIV)
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개역개정판 시 119편 65-72절)




 

시인은 주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에게는 주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기에 고난이라도 유익하다고 고백한다.(고난, 그것은 가능한 피하고 싶은 것이 나의 맘이다) 이렇게 그는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을 때에 전심으로 주의 법을 지키고자 한다. 실로 그는 세상의 값진 보화보다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로서 살고 있는 나이지만, 내 안에 말씀을 향한 이런 강한 사랑과 열망이 있는지 되돌아 본다. 나는 주의 말씀을 얼마나 즐거워하고 사모하는가? 사랑하는 아내보다, 하고 싶은 공부보다, 내 삶의 대분을 시간을 투자하는 사역 그 자체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고 배우고자 하는가? 그리고 그 말씀을 대충이 아닌 전심으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어느새 그 다른 것들이 주님을 말씀보다 앞서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말씀을 깊이 깊이 묵상함으로 그 말슴의 단맛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 비록 고난이 사방에서 휘감아 싸더라도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겠기에, 주의 말씀으로 정결케 되겠기에 감사해야겠다. 지금의 어려움들을 통해서 나를 더욱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 만들어 주실 것을 기대해야 겠다. 

교만한 자들은 그 마음이 둔해서 깨닫지 못한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교만함으로 둔해지지 않도록 매일 아침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 겠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이렇게 기도해야 겠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말씀을 제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여 전심으로 지키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게 그런 열망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2005.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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