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적형성 과정:

그대를 찾아 어둔 밤으로


나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는 아주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150cm의 단신의 갈멜수도회 수사이었지만, 나는 186cm의 큰 키를 가진 개혁교회 전도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 공감이 느껴지는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형성 과정 가운데서, 나를 형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검소함의 습관

나는 1974년 초여름, 해운대의 철길을 끼고 있는 가난한 동네의 셋방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라는 역사적 격동기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시기 위해 열심히 일하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매일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특별히 어머니는 아주 검소한 분이셨는데, 작은 돈도 헛되이 쓰는 법이 없으셨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시면서도, 다른 이들을 위해서는 그리 인색하지 않으신 분이셨다. 그러한 삶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내면엔 탐욕으로 부를 쌓아가는 삶을 부정하고, 검소한 삶을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태도가 형성되어 갔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다녔던 비교적 보수적인 교단의 주일학교 교육과, 청교도적 신앙을 추구하던 목사님들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진리를 찾아 헤매다

20대를 전후해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문학’과 ‘개혁’이었다. ‘글쓰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삶의 진리를 찾아 가는 수단이었다. 당시 내가 쓴 시 중에 “그대에게로 가는 여행”이라는 시가 있는데, 나는 그 시에서 “(그대가) 연필 끝에 새초롬히 섰소”라는 시구를 쓰며, “그대”로 상징되는 진리를 글쓰기를 통해서 발견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십자가의 성 요한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아직 “어둔 밤”의 정화를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진리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가려져 있었다.

또한 나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구현되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장차 그것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에 내 삶을 투신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난 대학에서 문학과 개혁,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학신문사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년간의 기자활동을 통해서는, 진리도 찾을 수 없었고, 세상의 개혁도 이루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러할 수 있다는 확신도 사라져버렸다. 더욱더 이 시기의 나는 겨우 주일예배에 앉아 있을 뿐, 그것을 제외하고는 온통 학교일에 매달려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도 메말라 부스러지는 흙과 같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난 모든 일을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말씀을 묵상을 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회심하게 하셨다. 그리고 막연한 진리를 향한 갈망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분명히 해 주셨다. 또한 세상을 향한 나의 알량한 정의감이 아닌, 하나님의 깊은 긍휼의 마음을 알게 하셨다. 그러고 약 6개월 후 나는 한 선교대회를 통해서 “십자가를 질 수 있나?”라는 주님의 물음에 “저의 심령 주의 것이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라고 응답하며 헌신하였다. 십자가를 내 삶의 핵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삶의 방법으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일 뿐이었다.


신을 벗고 어둔 밤으로

고무된 마음으로 신학교에 가기로 결정하였지만, 처음부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신대원에 지원한 첫 해에는, 원하는 학교에 가기 위해 교단을 옮겨 추천을 받는 과정에서 거절을 당해야 했고, 열심히 준비하여 시험을 쳤던 둘째 해에는 넉넉하게 들어가리라는 기대와는 반대로 문턱에서 좌절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교만을 다루어 나가셨다. 나의 신앙적 열심과 지적 능력에 대한 자만을 하나님은 그렇게 꺾으셨다. 그래서 세 번째 시험을 보는 해,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 발의 신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철저히 부인하고, 나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나서야, 나는 감사하게도 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신대원에 들어간 첫 학기, 난 영성훈련을 만나게 되었다. 은성수도원에서의 주말경건훈련과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른 영성훈련은 내가 그렇게 찾고자 했던 “그대” 곧, 주님께로 나를 한 걸음, 한 걸음 안내해 주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세상의 기쁨과 맛을 추구하는 나를 정화해나가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내면화함으로써, 내가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고, 또 다른 이들을 주님을 본받는 삶으로 인도하는(고전11:1) 소명으로 이끄셨다.

신대원 졸업 후 나는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실제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중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오의 햇빛 아래에서의 걸음이 아니라, 해질녘 들판 길처럼, 어둔 밤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간혹 나는 영적안일과 두려움 속에서 벗어버린 신발을 다시 주워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때마다 주님은 나를 깨우치시고, 다시 내가 신발을 벗어던지기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아직도 세상의 기쁨과 맛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하는 나의 내면을, 하나님을 향해 불꽃같이 타오르는 열망으로 채우고자 하신다. 사실 요즘 내가 감당해야하는 삶의 모든 상황들은 나의 감각과 영혼을 능동적, 수동적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어둠을 뚫고 오는 빛을 그리고, “주님의 순전한 은혜”를 갈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실로 요즘 나는,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 길을 따라 어둔 밤을 지나 한 걸음씩 걸어 나갈 때, 마침내 정오의 태양보다 눈부신 빛 아래서, 나는 “그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목회와 신학』2006년 12월호

권혁일


십자가의 영적형성에 비추어 바라본 나의 영적형성에 대한 에세이. 

아래의 게시글 "십자가의 영적형성과정"과 함께 쓴 글.

 <목회와 신학> 웹페이지에 유해룡 교수님의 영적지도와 함께 게재되어 있습니다.

어둔 밤을 걸어간 맨발의 수사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형성-


흔히 서구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른다. 이 어둠을 지나 16세기에 종교개혁의 여명이 밝아 왔는데, 십자가의 성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 1542~1591)은 이 여명기에 어둔 밤을 걸어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이라는 밝은 빛을 향해 가는 길을 맨발로 걸어간 신비가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선두 주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존 칼빈(John Calvin, 1507~1564)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았음은 물론이고, 가톨릭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의 선두주자였던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와 동시대에 같은 스페인 땅을 밟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빛을 향해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여정은 다른 인물과는 사뭇 달랐다. 루터와 칼빈은 개신교라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고, 이냐시오와 테레사는 긍정의 길(kataphatic way)을 걸어갔다면, 십자가의 성 요한은 부정의 길(Apophatic way)을 걸어갔다. 이렇게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길을 걸은 것은 각자의 영성형성이 독특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가난한 직공 부부의 셋째 아들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스페인의 척박한 땅 폰티베로스(Fontiveros)에서 한 가난한 직공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폰티베로스는 인구가 약 5000여명 쯤 되는 작은 도시로, 아빌라의 테레사의 고향인 아빌라에서 북동쪽으로 24마일쯤 떨어진 곳이다. 원래 그의 아버지 곤잘로 데 예페스(Gonzalo de Yepes)는 톨레도(Toledo)에서 비단장사에 종사하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하지만 예페스는 고아이자 가난한 직공이었던 요한의 어머니 카탈리나 알바레즈(Caltalina Alvarez)와 결혼함으로써 집안에서 쫓겨나 의절을 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서 예페스의 가족은 톨레도를 떠나 폰티베로스의 극빈자들이 사는 구역에 보금자리를 꾸미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이 세 살 되던 해, 아버지 곤잘로는 전염병으로 인해 어린 부인과 세 아들 그리고 극심한 가난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가난이 얼마나 심했던지 요한의 둘째 형인 루이스(Luis)는 어린 시절 영양실조로 죽고, 첫째 형 프랜시스코(Francisco)는 읽고 쓰는 것을 배우지 못해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막내 요한은 그의 몸에 항상 가난의 표를 지니고 다녔는데, 그는 구루병으로 인해 키가 약150cm 밖에 자라지 않아 단신으로 살았다.

요한의 아버지가 죽은 후 요한의 어머니는 톨레도에 있는 예페스의 친가에 아이들을 맡기려 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하고, 스페인의 거대한 상업도시인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 Campo)에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요한이 9세가 되었을 때에, 알바레즈는 요한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에 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곳에서 요한은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묵을 곳을 제공 받았고,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요한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될 수도 있었던 장사를 배웠지만, 어린 소년 요한은 장사에 대한 별다른 매력과 열정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그곳에서 요한은 여러 가지의 직업들을 시도해 보았다. 지역의 장인들 밑에 도제로 들어가 목수, 재단사, 조각가, 화가 등으로 일했지만, 그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해서 차례로 해고당하곤 했다.


형성적인 '가난의 습관'

요한은 17세에 메디나의 한 병원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학업에 대한 요한의 열의를 알아차린 병원 설립자인 돈 알론소 알바레즈(Don Alonso Alvarez)의 호의로, 요한은 메디나에 새롭게 세워진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요한은 낮에는 병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해 그곳에서 라틴어와 헬라어, 종교와 수사학을 배웠다. 요한의 가난한 어린 시절은 그렇게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요한의 가난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병원장 돈 알론소 알바레즈는 확실히 요한의 재능을 제대로 알아보았던 것 같다. 요한이 21세가 되던 해, 알바레즈는 요한에게 서품을 받고 병원의 지도신부가 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자리는 요한이 가난을 벗어 날 수 있는 경제적인 안정과 세속적인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년 요한은 보장된 미래에 안주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고독과 관상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 대신 메디나에 있는 갈멜수도회에 입회해 수사가 된다.

흔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결핍된 삶으로 인해 부에 대한 집착에 빠지기가 쉽다. 그런 사람들은 가능한 모든 기회와 수단을 활용해 부의 축적과, 신분의 상승을 꾀한다. 하지만 요한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오히려 ‘가난’을 형성적인 에너지로 받아들였다. 곧 가난을 향하여 자신을 개방하고,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써 관상생활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자신을 투신하였다. 이를 안토니오 데 니콜라스(Antonio T. de Nicolas)는 ‘가난의 습관’이라고 한다. 곧 요한에게는 가난이 지긋지긋한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습관이 되었다. 그는 이러한 가난의 습관 속에서 육적 가난뿐 아니라 영적 가난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사랑에 불타 열망하며

갈멜수도회는 학문적 연구를 우선으로 하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해 번잡한 대학의 도시인 살라망카(Salamanca)로 보내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1년간의 초심자 과정을 마친 뒤, 1564년에 살라망카 대학(University of Salamanca)과 성 안드레 갈멜수도회 대학(Carmelite College of San Andres)에서 4년간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당대의 저명한 선생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고, 지적 재능을 인정받아 성 안드레 대학의 학사장으로 임명받는다. 당시 요한을 목격한 증언자들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 요한은 금욕적이고 관상적인 생활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살라망카에서의 이러한 풍부한 학문적 경험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완전한 관상생활에 대한 매력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카르투지오 수도회(Carthusian order)로 전향할 것을 고려했다.

이처럼 요한의 내면에는 하나님에 의해 부여 받은 선-형성적인 차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요한은 세상적 부와 학문적 성취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 가운데 거하는 관상생활에 대한 내면의 근원 깊은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요한은 자신의 시 “어둔 밤(the Dark Night)”에서 “사랑에 불타 열망하며(Anxious, by love inflamed)”라고 노래했다. 이런 초월적인 능력을 통해 요한은 하나님의 신비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맨발로 걸어가다

그러다 1567년에 요한은 사제 서품을 받고 그의 첫 번째 미사를 드리기 위해 메디나 델 캄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아빌라의 테레사를 만났다. 마침 그녀는 두 번째로 수녀원을 시작한 후에, 남자 수도원을 개혁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테레사는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에, 고독과 엄격한 삶에 대한 요한의 소명이 카르투지오 수사가 되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남자 수도원을 개혁하는 일을 통해 더 만족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요한을 설득했다.

그 결과, 요한은 아빌라의 테레사와 함께 갈멜수도회 개혁에 동참하게 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1568년 12월에 두 명의 동료와 함께 갈멜수도회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맨발의’(discalced)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가 이렇게 불리워진 것은 그들이 맨발로 다녔기 때문이다.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한 켤레의 신발은 신을 수 있도록 허용하셨다. 그러나 이들은 그 한 켤레의 신발마저 소유하지 않고 벗은 발로 다니기를 기뻐하였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철저한 가난과 금욕적인 삶,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때 요한은 그의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꿨다. 십자가는 그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더욱 더 큰 영적 가난, 곧 어둔 밤을 향해 쉼 없이 걸어갔다.

이후 요한은 1577년까지 수도회의 초심자 수련담당과 맨발의 수도회 대학의 학장을 역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또한 갈멜수도회 개혁을 위한 테레사의 활동을 도와 5년동안 수녀들을 대상으로 영적지도를 하고, 테레사의 영적지도자로서 테레사 가까이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이 기간을 통해서 요한은 영혼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깊이 배웠다. 또한 요한은 죄인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적지도를 행하고, 주변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요한에 대하여 테레사는 그는 “신적이며 천상적인 사람”이고, 그녀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영적지도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고 술회하였다.


어느 어둔 밤에

1577년 12월 2일 어두운 밤이었다. 그동안 요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신발을 신고 있는(calced)’ 갈멜수도회의 형제들에 의해 그는 눈이 가려진 채로 톨레도로 끌려가서 어두운 감방에 갇히게 되다. 그가 갇힌 곳은 평소에 손님을 위한 세면소로 사용되던 작은 방이었는데, 창문도 없고 오직 천장에 있는 작은 통풍구를 통해서 희미한 빛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간혹 찾아오는 몇몇의 수사들은 그에게 차가운 비난과 함께 음식만을 마루 위에 던져 놓고 돌아갔다. 그는 간수와도 이야기할 수 없었고, 방을 옮길 수도 없었다. 요한은 좁은 방을 가득 채우는 악취로 인해 점점 병들어 갔다. 그의 등은 채찍질로 인한 상처로 가득했고, 그의 몸은 벌레로 득실거렸으며, 그의 옷은 썩어갔다. 그곳에서 요한은 거의 먹을 수도 없었고, 잘 수도 없었다. 여름에는 뜨거운 열기로 숨을 헐떡여야 했다.

이와 같은 비좁고 고립된 감옥에서의 혹독한 고난은, 그동안 가난의 습관 속에서 맨발로 걸어 온 요한으로부터 그나마 남아 있던 모든 위로와 소망을 박탈했다. 이것을 요한은 육과 영의 능동적, 수동적 어둔 밤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어둔 밤은 요한을 철저하게 정화시켰고,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게 했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가난, 곧 어둔 밤 속에서 요한은 희미한 빛을 타고 오는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순전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아홉 달 동안의 이러한 수감 생활의 경험 속에서 요한은 마음으로 시를 노래했다. 스페인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서정시 중의 하나인 “영적 찬송”(Spiritual Canticle)과 “어둔 밤”이 이때 지어졌다. 그래서 그는 “어둔 밤”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아, 나를 인도하는 밤이여

새벽보다 더 사랑스러운 밤이여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자를

한 몸으로 묶어주는 밤이여”


이후 1578년 8월 요한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시 “어둔 밤”과 “영적 찬송”, “갈멜의 산길”(The Ascent to Carmel) 등을 완성하고 이에 대한 주석서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또 한 번 종교재판에 연루되어,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많은 작품들과 편지들이 폐기되거나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1591년 12월 14일에 갈멜의 성자 십자가의 성 요한은 평소 그가 사랑하고 자주 인용하였던 아가서를 읽어달라고 부탁하고선 침상에서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어둔 밤을 걸어간 맨발의 수사

이처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을 맨발로 걸어가 주님의 품에 안긴 신비가이자 시인이며, 성자이자 수도회 설립자이면서 개혁자였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그의 급진적인 영적 여정은 당대의 개혁자들인 루터나 칼빈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유형의 길을 걸었던 것은 주위의 시·공간이 바로 로마 가톨릭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이라는 사회·문화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요한이 메디나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고, 아빌라의 테레사의 개혁에 동참하며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했지만, 그의 영성형성 과정에서 겪은 혹독한 가난과 고난은 요한으로 하여금 이냐시오나 테레사와는 다른 길을 걷게 했다. 곧, 요한의 내면에 선-형성된 하나님을 향한 불타오르는 갈망은 이와 같은 가난과 고난을 형성적인 에너지로 받아들여, 자신을 하나님과의 높은 관상적 일치로 날아오르게 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십자가의 성 요한을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유일하고 독창적인 존재로 형성해 가셨다.


『목회와 신학』2006년 12월호

유해룡, 권혁일


유해룡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쓴 글입니다.

       어둔 밤 

 

1.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불타 열망하며

좋아라, 순전한 은혜여

아무도 모르게 나왔다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2.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옷을 바꿔입고, 비밀계단을 오른다
좋아라, 순전한 은혜여

캄캄한 속에 꼭꼭 숨어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3. 행복한 밤에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은밀한 곳

빛도 없이 길잡이도 없이

나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빛밖엔


4. 그 빛이 나를

정오의 빛보다 더욱 확실히 인도한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5. 아, 나를 인도하는 밤이여

새벽보다 더 사랑스러운 밤이여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자를

한 몸으로 묶어주는 밤이여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자를 변화시키고


6. 내 가슴의 꽃밭

오직 그분만을 지켜온 그곳

거기서 당신이 잠드셨을 때

나는 당신을 어루만지고

잣나무의 바람이 부채가 되고


7. 작은 탑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그분의 머리채를 만져드릴 때

부드러운 당신의 손으로

내 목에 상처를 내시니

나의 모든 감각은 끊어졌다


8. 망각 속에 나 자신을 남겨두고

사랑하는 그분께 내 얼굴 기대이니

모든 것이 멈추고, 나도 사라진다

백합화 떨기 속에

내 시름 버려두고 돌아선다


십자가의 성 요한 지음

권혁일 옮김

왼편의 작품은 16세기 스페인에 살았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Juan de la Cruze, 1542. 6. 24.- 1591. 12. 14.)의 "어둔 밤(The Dark Night)"라는 시이다.

이것은 연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 체험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은 그의 수도원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이들에 의해 납치 되어 어두운 감방에서 약 아홉달 동안 갇혀 지냈는데, 이 때 그가 경험한 고통과 은혜를 "어둔 밤"과 "영적 찬송 (Spiritual Canticle)"이라는 시에 담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 "어둔 밤"을 해설한 주석서가 바로 <갈멜의 산길>과 <어둔 밤>이라는 영성 고전 작품들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긴 두 권의 책들보다 이 시 한편이 '어둔 밤'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어둔 밤'은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모든 영적, 육적 욕망으로부터 정화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과의 연합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둔 밤을 주시고,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의 다른 욕망들이 어두워지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불타게 하신다. 우리의 삶이 어두워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고 삶의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품으며 기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4

바람소리/목회칼럼 2006. 9. 3. 16:00

대연교회 청년부 2006년 9월을 여는 글

청년부 소식지, 2006년 9월 3일

 

RE4

Return X Reconciliation Rebuilt Revival

 

   9월이 되었다. 아직도 한낮에는 머리 위의 햇볕이 뜨겁지만, 그래도 새벽에는 제법 쌀쌀한 기운에 이불을 끌어 당기게 된다. 그리고 교회 등나무 아래 바람을 따라 원을 그리며 굴러 다니는 낙엽들도 이제 가을에 접어 들고 있다고 서로 재잘거린다. 그러게! 아무리 환경오염으로 이상 기온이 발생하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까? 그래서 9월은 우리에게 소망을 이야기해 준다. 그것은 자연에도, 그리고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스가랴 1장에는 하나님과 천사 사이에 오간 ‘때’에 대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천사가 온땅을 두루 다닌 후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만군의 하나님, 언제까지 예루살엠과 유다의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렵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신 지 벌써 칠십 년이나 되었습니다”(슥1:12) 

   여기서 천사가 언급한 “칠십년”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회복의 때이다.(렘29:10)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return)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rebuilt) …”(개역개정판)

 

   그렇다. 현재 우리 삶에, 우리 교회에 있는 어려움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회복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return), 화해하게 하시고(reconciliation), 다시 세우시며(rebuilt), 부흥케하실(revival) 때가 있다. 이번 가을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때를 소망하며 기다릴 것이다.

 

   영어에서 're'라는 접두어는 ‘다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번 가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실(renovare) 것을 바라는 우리 씨앗공동체가 되자.

 

* renovare 는 새롭게하다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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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교회 청년부 2006년 8월을 여는 글

청년부 소식지 (2006년 8월 6일)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


  10여년 전 쉼을 간절히 원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밤늦게서야 돌아오는 생활을 1년 반 정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여러 가지 일들로 잦은 밤샘과 출타를 하다보니 몸도 맘도 너무나 지쳐 있었습니다.


   일단은 과중하게 떠 안고 있던 여러 가지 일들 중, 최소한의 것들만을 남겨두고는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심을 실천에 옮겼는데, 매일 아침 묵상을 꼬박꼬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창세기부터 매일 일정 분량을 정해놓고 읽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사실 그동안 이런 저런 일로, 말씀묵상을 거의 중단하다시피하였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또는 밥을 물에 말아 대충 때우듯이, 그렇게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결심을 하고 다시 시작한 묵상이기는 하지만, 말씀의 샘물에 깊이 빠져드는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제 안의 갈급함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시냇물을 갈망하였고, 점점 저는 하나님께서 깊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친히 저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날마다 제가 말씀을 대하고 앉을 때면, 주님은 어느새 저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셔서, 저의 영혼을 소생 시켜주셨습니다. 그 풀은 이전에 나를 즐겁게 하였던 그 어느 것보다도 저를 만족시켜주었고, 저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 때는 저에게 있어서 회복의 시간이었으며, 새로운 전환의 시간이었습니다.

 

   흔히 쉰다고 하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쉼은 단순히 활동을 중지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 안에 머무르는 적극적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8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열정과 힘을 다해 준비하였던 06 통영선교도 바다 위의 배 뒤에 남겨진 물길과 같이 우리의 추억 속에 아름답게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쉴 때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머무르는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쉼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새로운 힘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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